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민수기 강해 11. 나팔을 불라
2022-01-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220105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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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0:1~36, 나팔을 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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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에 저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시내 광야에서 지키고, 그리고 부정함의 이유로 제때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일부 백성들도 한 달 뒤에 따로 다 유월절을 지내면서, 모든 출발 준비를 마친 부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출애굽의 밤을 다시 한 번 경험하듯, 그렇게 두 번째 유월절을 광야에서 지내고 나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성막 위를 덮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진두지휘하시게 된다는 말씀까지 살펴봤는데요, 이어지는 오늘 10장에서는,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시작하게 됩니다. 벌써 시내 광야에서 1년 가까이(약 11개월 20일) 머물렀다가 떠나는 건데요, 여기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 따라 성막과 기구들을 완성했고,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봉헌도 했습니다. 끝으로 두 번째 유월절까지 지키게 됐지요. 그 모든 일을 뒤로 하고 이제 가나안 땅을 향해 광야를 행진하게 되는데요, 12절에 보면, 그 다음 목적지가 ‘바란 광야’라고 나옵니다. 여기가 어딘지 지금으로선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지도를 잠시 보시면, 여기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지역이 시내 반도인데요, 아래쪽에는 시내 광야가 있고요, 그 위쪽으로 보면, 바란 광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란 광야는 가나안 땅과 조금 더 가까운 사막지대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 오늘 본문은 그 바란 광야를 향해 출발하는 장면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요, 본문 앞쪽에는 그 신호가 되는 나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 부분에는 호밥이라고 하는 모세의 처남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선은 그 마지막 부분, 호밥에 관한 에피소드를 먼저 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29절부터 32절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를 떠나면서, 이 호밥이라는 사람에게 모세가 뭔가 부탁을 하게 되지요. 29절 보시면,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고 나옵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바로 미디안 족속 출신이고, 그녀의 아버지이자 모세의 장인은 이드로, 혹은 르우엘이라고 불립니다. 이 사람은 미디안 족속의 제사장이었지요. 모세가 애굽에서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쳤을 때, 바로 이 미디안 족속이던 십보라와 결혼하여,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까지 거기서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호밥은 그 집안의 아들인데요, 아마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을 때,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모세의 장인이 모세를 찾아오던 시점에(출 18장) 같이 왔다가, 여기 시내 광야까지 함께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이 호밥에게 가나안까지 함께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땅까지 같이 가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신다고 하셨으니, 너에게도 우리가 선대하겠다, 제안하지요. 그런데 호밥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 거절합니다. 자신의 가족이 있는 고향 미디안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지요. 그러자 모세가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이번엔 훨씬 더 간곡하고 정중하게 부탁하는데요, 31절에 보면,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왜 호밥을 데리고 가고자 하는지, 그 이유가 여기서 밝혀지는데요, 미디안이 본래 광야에 사는 민족이니만큼, 이 사막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광야 어디에 천막을 쳐야 할지, 또 어디가 안전하고 어디가 위험할지 다 꿰뚫고 있는 만큼, 호밥으로 하여금 이번 여정의 일종의 길잡이 역할, 모세의 표현으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이 되어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좀 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절했던 호밥이 과연 이 모세의 간청을 받아들였는가, 본문은 여기에 대해 열린 결말을 보여줍니다. 호밥이 어떻게 했는지 밝히고 있지 않은 건데요, 아무리 본문을 자세히 살펴봐도 그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 대답을 적어놓지 않았을지 그것도 참 의문이고 또 풀어야 할 문제인데요, … 나중에 사사기에 가서 보면 호밥의 후손 중에 헤벨이라는 사람이 가나안 땅 북쪽에, 정확히는 사아난님이라는 곳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때 호밥이 모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가나안 땅에 함께 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단지 호밥의 자손 중 일부가 그곳에 자리를 잡은 건지, 아니면 정말 호밥이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가 그 후손들이 정착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사실 무엇보다 이 부분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이러한 모세의 권유 자체가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여기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아서 더 애매합니다만, 이제 광야로 행진해 나가는 이 시점에,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상징하는 구름이 그들을 앞에서 이끌어가고 있고, 또 본문 앞쪽에서는 나팔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까지 언급된 상황에서, 이렇게 이방인에게 자신들의 ‘눈’이 되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정말 잘 한 일인지, 우리는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물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큰 틀에서는 하나님이 인도해주시지만, 광야가 워낙 넓고 개방된 곳인데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 너무 많다 보니까, 대략적인 위치까지는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 중에 정확히 어디에 진을 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지, 거기에 대해서는 광야를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2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 그것도 난생 처음 광야에 나온 사람들이 지금 행진하고 있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진을 친다면, 그 너비만 해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거기에 어떤 위험이 있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호밥은 광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의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안목은 분명히 공동체에 엄청난 힘이 될 겁니다.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안전하게 광야를 지나가기만을 바랬던 지도자 모세의 마음이 담긴 그런 권면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해도 우리는 세상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모든 걸 다 하나님께만 의존해서 살지는 않지요. 과학과 기술과 예술의 도움을 훨씬 더 많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고, 그러한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의 한 부분임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합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다스림이 있다고 믿는 거지요. 이런 걸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사람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이라는 뜻인데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가 그 은총을 함께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어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기도만 하지 않지요. 물론 기도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자료도 찾고 정보도 수집합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우리는 하나의 선택을 하고 결정을 내립니다. 모세에게 호밥도 지금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무시하고 그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 하나님이 다 말씀해주시지 않는 어떤 부분에 대한 도움을 얻는 것이지요. …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호밥에게 함께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모세의 모습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게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성숙한, 아주 지혜로운 리더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더구나 모세는 호밥을 단지 어떤 길잡이로만 여기고 있지도 않습니다. 비록 그가 이방인이지만, 이번 동행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누리는 그 은총에도 참여하도록 권면합니다. 일종의 선교적인 의미도 함축된 그런 초청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렇게도 생각됩니다. 지난 주일에 나눴던 말씀처럼, 누가에게 데오빌로가 있다면, 오늘 모세에게는 호밥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의구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민수기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본문이 과연 그런 긍정적인 의미로만 이 대목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을까, … 하나님이 친히 그 모든 여정을 인도하시겠다고 계속 말씀하고 계시고, 그래서 정말로 구름기둥이 그들 가운데로 내려와서, 그들의 출발과 멈춤을 다 친히 결정하신다는 이런 장면에서, 더구나 오늘 10장은 그 모든 여정이 시작되는 부분이어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이 친히 주관하신다는 뜻으로, 나팔을 부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모세의 태도가 괜찮은 건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 호밥 이야기 바로 다음 절, 33절과 34절을 보시면 그 내용이 사뭇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고 나오지요. 무엇이 그들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까? 네, 여호와의 언약궤가, 모든 대열 앞에서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또한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여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이 그들을 인도하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구름의 이끄심을 따라 전체 백성들을 맨 앞에서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쉴 곳을 찾은 것은 호밥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다고 본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중에 민수기 후반부에(25장, 31장) 가면, 이 미디안 족속은,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하고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방 신을 숭배하고 그 이방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장면이 민수기 25장에 나오는데요, 이때 그 중심에 있던 사람들이 다름 아닌 미디안 여인이었다고 성경은 지목합니다. 그 일이 원인이 되어 나중에 31장에서는, 미디안 족속과 전쟁을 치르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요.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 갚아라. 그들은 너희의 원수이자 나 여호와의 원수다, 이렇게 말입니다. 결국 그 전쟁으로 인해 미디안 족속의 다섯 왕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요, … 그런 미디안 족속이었던 호밥에게, 더구나 미디안의 제사장 가문에 속한 이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눈의 돼달라고 부탁하는 이것이 과연 바른 결정이었을까, 우리는 확신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연 이 부분을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지, 그래서 어느 쪽으로 설교의 메시지를 잡아나가야 할지 참 오래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자료도 꽤 많이 찾아봤는데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제 솔직한 심정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이렇게밖에 답을 드리지 못해서 너무 죄송합니다만, 저는 명확한 답을 드릴 실력이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 성도님들의 생각도 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다른 민족을 품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누리는, 정말 선교적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그런 어떤 과정으로 본문을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다시 인간적인 도움에 기대는 연약한 모습으로서, 결국은 하나님이 경고하신 우상과 음행의 뿌리가 되는, 그런 불신앙의 모습으로 이해할 것인지, 여러분은 어떤 쪽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성경 본문이 여기에 대해 답을 내려주고 있지 않은 만큼, 저희도 섣불리 한쪽으로 치우쳐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전체의 여정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 분명하시지만, 그래서 우리는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아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니만큼, 그것들을 잘 분별하고, 해석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신앙적 안목을 반드시 갖춰야겠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항상 깨어 있는 그런 영성이 있어야겠다,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꽤 긴 설명에 비해서는 다소 맥 빠지는 권면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제 우리의 삶이 이런 고민들의 연속이니만큼, 여러분, 오늘 이 모세와 호밥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두시고, 잘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지 않을까 말씀드리면서,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내용, 오늘 본문 앞쪽의 나팔에 관한 부분을 잠깐 더 살펴보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 내용의 핵심은, 사실 앞쪽에 나오는 이 나팔에 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꽤 긴 내용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데요, 간단히 정리하면 이런 거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팔 두 개를 만들라고 하시고 그 나팔의 쓰임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통 근동의 나팔은 양의 뿔, 숫양의 뿔로 만드는데요, 그래서 ‘양각 나팔’이라고 성경에 가끔 나오는데 혹시 들어보신 기억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나팔 그러면 대부분 이런 양각나팔인데요, 양의 뿔로 만드는 것이니만큼 그 모양은 이렇게 구부러지고 또 물결처럼 곡선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팔은 금속으로, ‘은’으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은을 두드려서 두 개의 나팔을 만들고, 그걸로 백성들을 모으거나, 행진하게 하는 하나의 신호로 쓰라고 하십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이 나팔을 불 수 있다, 8절에서 말씀하는데요, 이 나팔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하는 뜻입니다.
두 개의 나팔을 만들어서 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춰서 다양하게 불게 됩니다. 두 개를 동시에 불면, 온 회중이 성막 앞으로 모이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만 불면 지휘관들만 오라는 뜻입니다. 나팔을 크게 불면 이제 행진을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크게 분다.’라는 것은 사실 조금 의역된 표현인데요, 원래는 ‘짧고 급하게 여러 번 분다.’라는 뜻입니다. 빰빰빰빰, 이런 식으로 짧고 급하게, 여러 번 불어서, 긴급한 상황임을 알리는 비상 나팔 소리를 내라는 거지요. 그래서 행진할 때나 또 전쟁에 나가야 할 때를 백성에게 알려주게 됩니다. 그러니까 눈으로는 하나님의 구름을 보면서, 또 귀로는 나팔 소리에 주목하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됩니다.
사실 나팔은,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악기이자 신호의 도구입니다. 그 소리가 아주 크면서도 또 매우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는 게 특징인데요, 우리가 지난 성탄절에 멋진 트럼펫 연주를 들었습니다만, 성경에서도 나팔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주된 악기 중 하나로 나옵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라고 말씀하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군대 기상나팔 소리가 워낙 안 좋은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 좀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나팔 소리만의 고유한 감성이 있지요. 석양이 쫙 깔린 그런 초원 위에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팔을 부는 모습, 대단히 낭만적인 장면입니다. 참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악기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나팔은, 단지 악기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나팔은 하나님 앞에 사람들을 모을 때, 가장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회로 모이라고 할 때, 절기를 시작하고 또 금식을 선포할 때 나팔을 불지요. 그래서 아예 ‘나팔절’이라는 절기도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의 달력으로 7월 1일이 나팔절인데요, 우리로 치면 1월 1일에 해당합니다. 바로 며칠 전이었지요. 새해 첫 날, 그 시작을 알리는 절기가 바로 나팔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믿음의 고백과 다짐을 하면서 출발하라, 하는 의미에서, 이런 나팔절이나 다른 중요한 절기에, 대속죄일이나 희년 같은 때에도, 나팔을 불어 성도들을 일깨우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나님께 주목하고, 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알람이 바로 나팔인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팔은 전쟁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전쟁을 치르러 나가기 위해 백성들을 소집할 때도 사용하고요, 또 전쟁에 나가서도, 나팔을 어떻게 부느냐에 따라, 미리 약속된 방식으로 병사들이 움직입니다. 소리에 맞춰 적을 향해 돌격해 나가기도 하고, 또 뒤로 물러나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많이 보셨지요? 열심히 싸우다가도 나팔 소리에 따라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나팔 소리가 분명해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방언을 하는 건, 다들 못 알아 듣는 그런 불분명한 소리이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대단한 은사이긴 하지만 성도들에게 유익함이 적은 그런 은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치러야 하는 영적 싸움의 신호가 되는, 그런 의미로도 성경에 나옵니다.
하지만 나팔의 가장 중요한 의미,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의미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나팔이 무엇을 의미한다고요? 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던 산 위에는 빽빽한 구름과 함께 우레와 번개가 있었고, 그 소리가 마치 나팔소리처럼 크게 울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 예수님의 재림, 주님이 다시 오심도 이 나팔소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요.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찬송 가사도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는 고린도전서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 그리고 성도들의 부활, 이런 종말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일관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임재와 심판과 구원을 알리는 소리가 바로 나팔소리인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주님의 오심을 경고하고, 깨어 있기를 요청하는 소리로도 나팔은 성경에서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과 심판이 임박했다,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전쟁이 가까이 왔으니, 이제 그만 정신을 차려라. 지금 너의 모습을 돌아보고, 돌이켜서, 분별 있는 삶을 살아라,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도 바로 나팔소리로 표현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고 스스로 조심해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예상치 못한 때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말씀하십니다(눅 21:31~34). 저와 여러분을 향해 지금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고 있다,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런 나팔 소리가 잘 들리십니까? 우리를 향해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 내 앞에 모여라, 이제 앞으로 나가라, 여기서 멈춰라, … 네 삶을 돌이켜라,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해라, 그 불의에 맞서 힘껏 싸워라, … 여러분 그런 거룩한 나팔 소리들이 잘 들리시는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통해 나팔을 불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전해질 때, 또 세상의 여러 변화의 모습들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 마음에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지금도 나팔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습니다. … 때론 그 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고, 또 들리긴 하는데, 그 의미가 잘 분별되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국 그 나팔 소리를 얼마나 귀 기울여 잘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그 소리를 잘 분별해서, 거기에 합당한 반응을 적시에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고, 하나님의 때, 종말이 임박했다는 주님 말씀을 믿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나팔 소리에 그때그때 반응하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 또 어려운 숙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향해 울리고 있는 그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은 우리에게 조심하라, 말씀하시면서, 방탐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를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것이 이 세 가지라고 하셨지요. 방탕함과 술 취함, 그리고 생활의 염려. 뭔가에 탐닉하고 집착하며 거기에 빠져 살아가는 것, 그리고 세상의 풍조에 취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생활의 염려에 빠져 낙심하고 근심하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치고 사는 것,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서, 우리 앞에 찾아온 하나님나라, 이제 곧 다가올 그 마지막 날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마치 덫에 걸리듯 그렇게 그 날을 맞이하게 만든다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다시 오심, 또 주님의 마지막 때는 늘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둘째 치고, 우리는 결국 다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 누구도 그 날을 피할 수 없고, 그 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삶이란 쉽게 말해서, 결국 그 알 수 없는 마지막 시간을 오늘 지금 인식하면서, 그 때를 준비하는 삶이겠지요.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이 있는데요, 문제는 그 시험 날짜가 공개되지 않은 겁니다. 언제 시험을 칠지 모르는 어떤 가장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말입니다. …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제일 무서운 게 언제 쪽지시험 볼지 모르는 선생님, 언제 숙제 검사할지 모르는 수업, 이게 정말 긴장감이 넘치지요. 정해진 시험 날짜가 있으면 사람들은 그때를 준비하고 공부합니다. 내내 놀다가도 시험이 임박하면 벼락치기라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만약 그 시험 날짜를 모르는 그런 시험이라면, 반드시 그 날이 오긴 오는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는 시험이라면, 그땐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아마 처음엔 다든 긴장하며 준비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느슨해져서, 마치 시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깨어 있는 소수의 학생들은 늘 준비하겠지요. 당장 그 날이 내일일 수도 있으니까, 오늘 해야 할 몫의 공부를 열심히 하며 하루하루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그런 거지요. 언제일지 모르지만, 주님의 날은 임박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개인의 죽음일 수도 있고, 주님의 다시 오심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일 수도 있겠지요. 비록 그 날과 그 때를 우린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 날이 오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오고, 반드시 치러야 할 시험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것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느냐, 그 때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선택에 얼마나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느냐, 거기에 우리 성도 개개인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 달려 있을 겁니다.
여러분, 한 번 가정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 정확히 3년 정도 남아있다면,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그 정도의 기간이면, 뭔가 모든 것을 내려놓기도 그렇고, 또 갑자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일상을 포기하기도 어려운 그런 시간이겠지요? 그저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을 계속 성실하게 살아내면서도, 주어진 하루하루 더 깊이, 더 온전히 누리고자 애를 쓰게 될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것, 정말 의미 있는 것, 정말 시간이 아깝지 않은 그런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무엇을 하든 지금 이 순간을 깊이 누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노력하겠지요. 정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 정도라면, 아마 그냥 늘 먹는 세 끼의 식사도 우리에겐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될 겁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별 거 아닌 쉼과 여유도, 가족과 보내는 보통의 시간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은 게 없겠지요. 무엇보다 잘 안 들리던 거룩한 나팔소리도 그땐 더 크고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는 성도의 삶아 결국 이와 같을 겁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올 주님의 날을 더 자주 의식하며, 조금 더 준비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 우리에겐 나태함의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깨어 있음의 이유여야 할 겁니다. 바로 내일이, 혹은 오늘 밤이, 이 세상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될 수도 있고, 우리의 생명이 주님께 돌아가는 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으면서, 지금 주어진 이 순간을 온전히 깊이 누리면서도, 다시 오실 주님 나라에 어울리는, 거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생명이 지금도 주님 안에서 안전하며, 영원히 그러할 것임을 기억하고, 주님 안에 있는 평강을 사모해야 합니다. 내 삶을 좌우하고, 내 운명을 완성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그분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질 때, 그것이 정말로 우리의 삶을 복 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삶을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부디 오늘 이 민수기 10장의 말씀이,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주님의 그 날을 늘 인식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우리를 향해 울리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늘 주목하는 삶,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참된 생명과 안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