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2021년 12월 26일 주일 설교)
2021-12-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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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3:11~13,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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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28) 본문 11절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로 이제 고린도후서 강해가 모두 마무리되는데요, 설교자로서 한편으로는 시원하고, 또 섭섭하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을 설교할 때마다 늘 느끼는 비슷한 감정인데요, 참 설교하기가 쉽지 않다, 하는 마음도 있고, 그래서 성도님들께 늘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서신서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설교 형식이기 때문에, 별다른 스토리나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습니다. 설교를 다시 설교하는 일이 그래서 좀 버겁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요, 내가 좀 실력이 좋아질 때까지는 다시는 바울 서신은 설교 안 해야지, 하면서도 하도 바울이 쓴 편지가 하도 많아서, 그러기도 어렵습니다. 어쨌든 오늘 마지막 강해를 하게 됐는데요, …
오늘 본문은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한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11절에서, 형제들아 기뻐하라, 이렇게 번역된 부분은, 많은 영어 성경이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평범한 작별인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어지는 다른 인사말들은 평범하지 않은데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어떤 부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온전하게 되라’고 이야기합니다. ‘온전하게 되라’ … 앞에서 계속해서 사도가 강조했던 부분이지요.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여, 부족함 없는 모습으로 세워져가기를 늘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그러한 온전함이 단순히 나 자신만의 어떤 고립된 신앙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특히 강조했었습니다. 나 혼자 믿음 생활 잘 하면 된다, 이게 아니었지요. 주님의 몸을 이루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온전함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때론 나의 연약해짐을, 낮아짐을, 더디 감까지도 기꺼이 감내하면서, 그렇게 누군가를 온전하게 세워주면서, 때론 온전하지 못함의 결과를 함께 짊어지면서,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그런 온전한 믿음이 되라고 계속 이야기했는데요, 실은 오늘 마지막 인사에서도 그런 권면의 마음이 동일하게 느껴집니다.
온전하게 되라는 말을 하고나서는,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이야기하지요. 여기 위로를 받으라는 말도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위로를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래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네가 좋은 위로가 돼라, 그래서 서로 위로를 나누라, 하는 뜻입니다. 내가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좋은 위로가 되어, 서로 그것을 나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에도,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하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저 나 혼자 아무 걱정 없는 그런 평안이 아니라, 마음을 같이 나누고 하면서, 거기서 나도 누군가에게 평안의 한 부분이 되라는 것입니다. … 그렇게 하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실 거라고 이야기하지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거기서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서로에게 그런 존재임을,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평강이 됨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권면합니다. 거룩한 입맞춤, a holy kiss … 바울이 서신서 말미에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요, 당시 성도들이 성찬식을 나누기 전에 서로 나눈 입맞춤이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는데요, 거룩한 입맞춤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우리는 바울이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권면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속 같은 메시지인 거지요. 성도의 입맞춤을 통해 화목함을 회복하고,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깊이 누려라, 하는 것입니다. … 비록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던 고린도교회였습니다만, 그래서 진리를 좇고, 거룩함을 도모하고, 교회의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아야 하지만, 그런 성도의 삶이, 또 교회의 모습이 그냥 그렇게 삭막해지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나는 바울 파, 베드로 파, 아볼로 파, 서로 분열되어 있는 교회였기에, 바울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서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거룩함을 이루어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죄와 싸우면서, 문제를 바로잡으면서, 동시에 화목을 도모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아무 거리끼는 문제없이 그냥 서로 웃고 좋을 때도 ‘거룩한 입맞춤’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지 않은 뭔가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이라는 말 자체가 그래서 엄청난 도전입니다. 거룩하게 입을 맞춘다, 입을 맞추는데 거룩하게 한다, 여러분, 쉽지 않겠지요? 이 행위 자체가 하나의 큰 모순처럼도 들립니다.
거룩하면서 화목해야 합니다. 정의로우면서 따뜻해야 합니다. 악을 멀리하면서도 서로를 온전히 용납해야 합니다. …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 하다가는 둘 다 놓치지 십상이고, 대개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항상 고민입니다. 과연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상황을 바로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잠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일단 인내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 돌이키기를 권면할 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의사가 암 조직만을 정확히 떼어내고, 사람은 살려내듯이, 죄만 잘라내고, 그 영혼은 살려내는, 그런 게 돼야 하는데, 그 능력과 정성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히거나, 아니면 그냥 문제들을 눈감아버리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거룩한 입맞춤은 그냥 하나의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되고 맙니다.
과연 현실에서 우리가 이 거룩한 입맞춤을 어떻게 감당해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고민과 실마리가 실은 바로 고린도후서 전체의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 거룩한 입맞춤,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스스로 끊임없이 도전해 왔지요. 때로는 한없이 약한 십자로, 때로는 강하고 엄한 능력으로, 그러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깊고 끈끈한 교제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쉼 없이 거룩한 키스를 던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울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의를 주장하거나, 또한 어떤 권위를 통해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거나, 그들에게 영향력 있는 자가 되기 위함이 아님을, 계속해서 강조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다(1:23~24), 나는 지금 내 변명을 하거나 내 권위를 세우려 함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온전히 세우고자 함이다(12:19~), … 내가 너희에게 가고자 하는 것도, 또 가지 않고 이렇게 편지로 권면하는 것도, 모두 다 너희를 아끼기 위함이고 너희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다(1:23, 12:13), 이야기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이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한지,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런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실마리들을 조금씩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결코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거룩’을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좀 더 편하기 위해서, 내 기분이 좋아지고 내가 기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먹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증명하고, 반대로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진리를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우리는 거룩하게 입맞출 수 있습니다. … 바울은 한 번도 고린도교회와 자기 자신을 둘로 나눠 생각한 적이 없지요. 여러분이 온전한 것이 곧 내가 온전한 것이요,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7:3), 우리는 같은 운명을 짊어진 주님의 한 몸입니다, …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 백성과 함께 광야에서 삶을 마친 모세의 운명처럼, 우리는 결코 나와 너로 나뉠 수 없는, 주 안에서 함께 자라가는 주님의 지체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입맞춤의 시작입니다,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경건은 모두 헛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본성과 맞지 않는 일인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와 남이 명확하게 구분된 세상에서 살고 있고, 철저하게 이기적인 선택들이 모일 때 비로소 가장 진보한 사회를 이룬다는 이념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지요. 진실하게 타인의 유익과 기쁨을 먼저 구하고, 그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나를 내려놓고, 마땅한 내 권리와 자유도 기꺼이 부인하며, 어떤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한 일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어떤 명령으로 이 편지를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라, 이게 아닙니다. 안 되는 거 억지로 해라, 노력해라, 그렇게 끝내지 않지요. 어떻게 끝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그 은혜와 사랑과 사귐을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라고 기원하며 고린도후서가 끝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가능한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와, 성령의 친밀한 사귐만이, 그것을 온전히 누리고 경험하는 것만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사도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마지막 13절은 아주 독특한 바울의 기원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구절이긴 하지요. 예배를 마칠 때마다, 목사가 축도로서 늘 이 말씀을 그대로 옮겨 기도합니다. 오랜 교회 예배의 전통이지요. 그런데 이 중요하고 특별한 기도문이 다름 아닌 고린도전‧후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왜 ‘다름 아닌’이라고 했는지 여러분 이해하실 겁니다. 이 기도에 담긴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특별한지, 어째서 이런 기도문이 고린도후서에만 기록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고민하고 아파했던 그의 실존이 여기 녹아져 있습니다.
보통은 바울이 이렇게 편지를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서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빈다는 기원으로 끝나지요. 바로 다음에 나오는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이어지는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 디모데전서와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까지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똑같은 표현으로 끝납니다. 바울 외의 다른 사도들이 기록한 편지들도 대동소이합니다. 하나님의 평강, 샬롬을 빌거나(히브리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 등), 은혜를 빌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면서(베드로후서, 유다서 등) 신약성경의 각 책들이 마무리됩니다. …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함께 언급하고, 복음의 핵심을 삼위일체의 사역 안에 담아 표현한 기원문은 이곳이 유일무이합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그래서 더 깊이 고민하고 아파하며 이 편지를 썼다는 증거이겠지요. 기독교 역사의 모든 예배 가운데 고백되어 온 이 축복의 기도는, 다름 아닌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그 힘들고 어려운 거룩한 입맞춤을 통해서 빚어진, 또 하나의 놀라운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입맞춤은, 오직 성삼위 하나님의 온전하신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지금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깊은 사귐을 온전히 누리고 경험할 때, 비로소 거룩한 입맞춤을 나누는 온전한 교회됨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사실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가 되는 말씀으로 자주 인용됩니다만, 여러분, 사도는 여기서 어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 게 아니지요.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고, 어떤 하나님을 누렸는지를 지금 고백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 실제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4세기나 돼서야, 그러니까 고린도후서가 기록된 후 3백년은 지나야 공식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성경에도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는 없지요. 신약에도 없고, 구약에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구별되어 나타나고, 그럼에도 한 분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어떤 신앙적 경험과 고백이 모여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시며 그분에게 기도를 올립니다. 또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이 하나님께 기도한 것도 아닐 것이고, 예수님이 모습만 달리 하여, 옷만 갈아입고 우리에게 오신다는 뜻도 아닐 것입니다. 분명 세 분 하나님의 격이, 위격이 구별되며, 우리에게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이 삼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가 되시는지, 우리는 그 신비를 도저히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창세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영광으로 존재하셨으며(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다시 예수님 안에 있어, 온전히 하나이셨다는 주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요 17:21~22).
어쨌든 삼위일체 하나님은 머리로 이해된 어떤 교리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누렸던 하나님 경험에서 나온 고백이며, 오늘 본문처럼, 그 고백을 담은 말씀을 통해 나중에 정리된 것이 오히려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 아울러 우리는 이 경험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특별한 고백이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단지 훗날 삼위일체 교리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갑자기 주신 어떤 영감도 아니었고, 혼자서 조용히 깨달은 진리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와 함께 부대끼고 섬기며, 끝까지 사랑하고, 그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랐던 그 신앙고백과 사역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경험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만이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하고 누렸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교통하심은 친밀한 사귐을 의미하지요, 이 세 가지를 모두 ‘한 분 하나님의 각기 다른 은총’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 유대인들은 본래 이렇게 인사하거나 고백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의 평강과 복을 기원할 뿐인데요,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사귐을 전혀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이 빗대어 말한 것처럼, 그들은 마치 얼굴에 수건을 쓰고 주님을 바라보고 느낀 것과 같았다면, 우리는 다 그 수건을 벗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깊은 사귐,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하나님 경험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간단하게라도 이 세 가지 내용의 핵심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라는 게 뭐지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은혜의 핵심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은혜가 뭐라고요? 네,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졌기에, 우리는 그것을 은혜,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것을 대신 감당하시고, 주님이 누리시는 것들을 우리가 누리게 하셨습니다. 죽음과 종 됨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은 주님이 친히 감당하시고, 주님이 누리던 생명과 자유와 하나님의 자녀 된 화목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아가페는 그럼 무엇입니까? …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아껴주시고, 귀하게 여기사, 결국 우리의 삶을 영화롭게 완성하시는, 그 하나님의 책임 있는 사랑, 그게 하나님의 아가페이지요. 하나님은 그냥 단순하게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가 없다고 여겨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한다는 발표가 있었는데요, 대통령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요. 죄가 무엇이든, 몇 년의 형기가 남았든 그냥 사면, 복권해줄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이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도 그러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을 대신 내어주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냥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받아들여주시고,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시는 그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인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 성령의 깊고 친밀한 사귐은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누리고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직접 거하시며, 말씀하시고, 위로하시는 성령의 모든 사역을 가리켜 우리는 ‘교통하심’이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예수님 안에 있던 그 성령의 권능이 우리에게도 나타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결박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 하나님 아버지의 그 성품이 우리에게서도 열매 맺게 하실 것이고, 또한 나와 하나님과의 사귐이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의 사귐으로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도록, 바로 이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모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기를 기도하며 이 편지를 마칩니다. 그들이 누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깊은 사귐이, 더 풍성해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과 사귐을 통해, 거룩한 입맞춤을, 그 온전한 교회됨을 이루어가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본래 받은 그 이상을 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한계이지요. 스스로 생명을, 은혜를, 사랑을, 사귐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받고 누리는 그만큼, 우리는 다만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우리에게 있기를, 더욱 풍성하게 누리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온전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면, 더는 다른 욕심에, 그로 인한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다만 기뻐하고 감사하며 오늘을 깊이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공급받고 있다면, 더는 내 인생을 내가 완성하고, 내가 구원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게 되겠지요. 내 삶이 결코 허무와 죽음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며, 아바 아버지께서 친히 내 삶을 완성하실 것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누리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만족하고 즐거워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귐을 더 확장하고 깊어지게 할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은혜와 사랑과 깊은 사귐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향해서 거룩하게 입 맞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강해를 마무리하고, 또 힘겨웠던 올 2021년을 또한 갈무리하면서, 저 또한 우리 성도님 모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성령의 깊고 친밀한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 다시 그 은혜와 사랑과 사귐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골로새서 말씀에 그런 구절이 나오는데요,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에바브라라는 동역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함께 종이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골 1:7) 여러분, 참 놀라운 말씀이지요. 이 짧은 구절 하나에, 어떤 한 사람을 소개하는 이 구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등장하는데, 그런 주님의 은혜를 배운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 것도, 성령의 교제를 알려준 것도 모두 에바브라였다고, 그를 통해 주의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모두가 함께 경험했다고,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에바브라와 같은 그런 존재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밀한 교제를,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부족함 없이 누려서,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가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정말 은혜와 사랑과 사귐이 가득한 존재가 되기를 우리가 함께 소망하십시다. … 값없이 은혜 베풀 줄 알고, 기분이나 느낌에 휘둘리지 않고 끝까지 아끼고 책임지며 사랑하고, 그래서 거룩한 입맞춤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