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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2021년 11월 21일 주일 설교)

2021-11-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1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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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수감사주일 메시지 ------------------------ 고린도후서 12:7~1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 첨부파일 cor(2)23 .mp3 파일 다운로드 (고린도후서 강해 23) 본문 9절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추수감사주일인 오늘, 여러분에게는 어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신지요? 올 한 해를 뒤돌아보며,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혜들로 인해서, 마음 깊이 감사의 고백이 있으십니까? 분명 감사한 것 맞는데, 특별히 생각나는 어떤 일이나 이유가 있는 건 아니어서, 그냥 감사하십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게 감사하다, 이런 마음이십니까? … 혹시 딱히 감사한 마음 없이 오늘 이 예배를 드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삶이 힘들고 어렵고, 또 그냥 내 마음이 복잡하고 지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부담이 되는, 그런 분은 안 계신지요? ​ 저는 이번 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추수감사주일의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가, ‘어떻게든 감사해야 한다는 어떤 신앙적 의무감을 다하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감사주일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감사를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겠다는, 그런 하나님을 깊이 누리는 날이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처럼 쩨쩨하게, ‘너희들 정말 나에게 감사하나, 안 하나, 한 번 좀 보자.’ 이렇게 우리를 감시하듯 보고 계신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 아니실까요? ‘내가 준 것들이 은혜로, 선물로 잘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구나. 조금 더 확실히 느껴질 수 있도록 뭐라도 좀 해야겠다!’ 하는 그런 마음이실 거라고, 그게 우리가 믿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 그렇게 제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했을 때, 다시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한 주 내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와 말씀을 통해, 또 남은 올 한 해의 시간들 속에, 우리를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 우리 안에 감사의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건, 아마 여러분도 충분히 경험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감사가 사라진 마음에는 진정한 평강과 기쁨이 머물러 있기가 어렵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감사 없는 마음은 꼭 사막처럼 메말라갑니다. 우리가 실족하는 것도 감사를 잃어버렸을 때이지요. 사실 인간의 죄라는 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 감사하지 못할 때 나오는, 어떤 잘못된 선택일 때가 많지요. 반대로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에겐 좀처럼 어둠이 머물기 어렵습니다. 간혹 시험거리가 찾아왔다가도, 우리 안에 감사의 마음이 있는 걸 보면, ‘에이, 여긴 아닌가보다.’ 하고 그냥 떠나가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우리 안에 진정한 감사가 시작될 때 회복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 그래서 감사는, 우리가 반드시 먹어야 할 영혼의 양식이며, 인생의 밥 같은 거라고, 그렇게 노래한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갑자기 찾아온 뇌성마비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어, 평생 침대에서 살아야 했던, 미즈노 겐조라는 일본의 시인입니다. 그 질병 때문에 그는 모든 언어 능력을 상실하게 됐고, 오직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는데요, 사고 이후 4년이 지났을 무렵, 그 마을에 들어와 전도를 하던 한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영접한 그가 평생 쓴 시를 모은 시집의 제목이, ‘감사는 밥이다’라는 책입니다. 감사는 밥이다. 밥을 먹어야 살 듯, 감사가 있어야 우리는 참으로 산다, 하는 말인데요, 여러분, 공감이 좀 되시는지요? 감사는 밥이다. … 전신마비로 인해, 말도 할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으니, 그의 어머니가 문자표를 들고, 처음부터 하나씩 하나씩 가리켜 나가는 걸 보다가, 겐조가 눈을 깜빡이면 그 글자를 적어나가는 식으로, 그렇게 시인은, 총 네 권의 시집을 썼습니다. 많은 좋은 시가 있는데요, 그 중에 ‘사랑의 손’이라는 시를 잠깐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 사랑의 손. “건강하게 보낸 날들도, 아픔에 괴로워했던 날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 기쁨을 노래하는 아침도, 눈물을 흘리는 밤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 기세등등할 때도, 후회투성이일 때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이라.” (우리도 같은 고백이지요?) ​ 겐조가 쓴 시들 속에는, 유독 ‘감사’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제목에도 들어가 있고, 또 시구(詩句)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도대체 뭐가 감사할까, …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특별히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뭐 얼마나 있겠습니까?) 읽어드린 시의 고백처럼, 그냥 모든 것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아주 작은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사는 것, 그게 시인이 말하는 감사의 삶입니다. ​ 우리가 주변을 돌아보면, 어떤 사람은 행복해보이고, 또 어떤 사람은 불행해 보이는가, 거기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열 가지 불행을, 한 가지 행복으로 포근하게 감싸면서 살아갑니다. “뇌성마비로,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하나님이 눈과 귀만은 지켜 주셨다. 말씀을 읽도록, 말씀을 듣도록, (나를) 말씀으로, 구원하시기 위해.”라는 겐조의 또 다른 시(‘눈과 귀’)처럼, 수많은 고난의 가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로 그것들을 포근히 감싸며 사는 사람은 늘 행복을 느낍니다. … 물론 반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열 가지 행복이 있지만, 한 가지 불행으로 그 모든 행복을 질식시켜버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요. 사실 어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본래 우리 인간의 마음이 참 그렇습니다. 이미 가진 모든 행복들을 마다하고, 기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까지 다 먹어봐야만 행복할거라고 여기고 사는 게 인간이니 말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감사는 어떤 좋은 상황, 좋은 조건에 대한 우리의 긍정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감사란 어떤 일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삶과 상황들을, 우리가 어떤 자세와 태도로 받아들일 것이냐, 거기에 우리의 감사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푼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하셨고, … 우리의 이 생명을 오늘도 하나님이 친히 붙들고 계셔서, 그 생명이 영원하게 하셨음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어진 삶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그것이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감사, 아니겠습니까? ​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백 년 전, 1621년 가을,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이 추수감사절의 첫 예배가 신대륙 어딘가에서 청교도인들에 의해 드려졌다고 하지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얻은 첫 수확으로 드린 그 첫 감사절은, 어떤 대단한 축복과 풍성한 소출 앞에서 드린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거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수확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에 감사하며, 그들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오직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손 안에 있음을 기뻐한 것입니다. ​ 저와 여러분도 지난 1년 동안, 하나님이 만드신 이 지구 위에서,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사람을 통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는 수많은 것들을 풍성히 누리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우리가 그저 쉬고 있을 때에도, 우리가 웃으며 먹고 즐길 때에도, …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범할 때에도, 오직 이 땅과 하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열심히 우리의 먹을거리, 입을 거리, 즐길 거리들을 준비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광야에서 날마다 만나를 먹은 게 아니지요. 우리도 하나님이 베푸는 식탁에서, 귀한 손님대접 받아가며, 배불리 먹고 마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이것들은 다 그저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그림자일 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는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러한 감사, 그저 좋은 일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명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을 가지고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사서, 먹고, 누리기 때문에, 그것들이 전부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하지요.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돈만 있으면 그것들을 다 만들 수 있나요? 그렇지 않지요? 과연 공기와 물과 햇빛이 돈으로, 그 값이 매겨질 수 있습니까? 그걸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살 수 있나요? …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가 가진 돈의 가치가,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는 것들보다, 당연히 더 크다고 여기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게 하지요.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단적으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트에서 다 구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것이 마치 내 돈의 힘에서 나온 것처럼 착각합니다. 햇빛과 공기와 내리는 비에 감사하며 직접 농사를 짓고 거두던 사람들이 가진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오늘 우리는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대신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마땅히 누릴 권리가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삶을 대하는,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 그래서 감사는 사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주 깊은 영성입니다. 만물 안에 계셔서 모든 생명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내 삶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며,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의 생명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고, 생각하고, 직접 경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연이 준 선물이라고 여기며 살지요. 그들도 감사할 줄 알고 또 겸손합니다. 다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그 모든 감사의 고백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보존하고 계시고, 비록 그 안에 고통과 아픔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완성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 만약 어떤 좋은 조건에 대한 우리의 느낌, 반응, 이런 게 감사가 아니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이 삶을 대하는 우리의 겸손한 태도가 감사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볼 수 있을 겁니다. … 너무나 고통스러운 질병을 안고, 하나님 이것을 제거해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드러난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여러분은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아멘’은 하지만,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까? 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 당연히 질병은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요. 온전한 감사를 배우려면 이런 질병이나 고난이 있어야 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고난과 질병, 가난, 이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극복하고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가 오직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생명 안에 깊이 들어가, 거기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연약함이,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 깊이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력함 이외의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할 때,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 안에 온전히 들어가게 된다고 사도는 고백합니다. … 시인 겐조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고, 살 수 없다고, 깨달은 순간, 나를 굳게 붙잡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팔이,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전문)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내게 머물게 되더라는 바울의 말과 같은 고백입니다. ​ 어떤 문제가 생겨도 다 참고, 그냥 자포자기로, 다 감수하며, 억지로 감사하고 살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쳐주시고, 구원해 주시길 끈질기게 기도해야지요.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당장 이루어주시지 않는 바로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으며, 실은 그 어느 순간보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 안에 온전히 역사하고 계시는 때가 바로 그 순간임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이 9절 말씀이 우리에게도 믿어지고 고백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여기 9절에서 사용한 이 ‘머물다’라는 동사가, 아래 주석에 보시면, ‘장막으로 덮게’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성막을 세우시고, 그 안에 거하셨던 것을 가리키는 아주 중요한 동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우리 가운데 온전히 머물러 계시는 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때가, 바로 우리가 연약해진 때,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임을, 여러분, 꼭 믿고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은총을 넉넉히 받았고, 생명을 풍성히 누리고 사는 데,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때로는 연약함과 어려움도 있지만,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온전히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온전히 붙잡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험하며, 우리의 감사가 날마다 깊어져서, 삶의 모든 순간마다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누리고 즐거워하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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