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민수기 강해 2. 수를 계수할지니(2)

2021-10-1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 20211013 수요 성경 강해 ----------------------------- 민수기 1:1~54, 수를 계수할지니(2)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 음성은 생략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고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파일 num02(2) .mp3 파일 다운로드 ​ ​ ■ 20세 이상의 남자,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사람의 수를 세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와 아론이 실제 수를 세는 장면과 그 결과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본문 앞쪽에는 이 일을 함께 담당해야 했던 사람들, 각 지파의 우두머리라고 된 사람들의 이름이 먼저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각 지파의 각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 한 사람씩을 너희와 함께 하게 하라.”고 되어 있지요. 그 후 5절부터 15절까지, 총 열두 명의 지도자 이름이, 각 지파별로, 그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성경에서 누구를 소개할 때 보면, 대개 그 아버지의 이름이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요, 여러 비슷한 이름 중에서 정확히 그 사람을 지명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또 그가 속한 가문을 중시하는 히브리 전통 때문입니다. ​ 구약의 전통과 신앙에서 아버지가 가진 영향력은, 우리 유교적 문화의 아버지 권위에 못지않지요. 야곱과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버지가 빈 축복은 곧장 예언적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고, 또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어쨌든 하나님은 수십 만 명의 인구를 세는 이번 이 중요하고 어려운 일에 있어서, 각 지파의 우두머리이자, 또한 군대의 지휘관 역할도 감당하는 이 열두 명을 세워, 모세와 아론을 돕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늘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탁월한 누구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예비하셔서, 동역하고 협력하게 하십니다. 민수기를 읽어보면, 이번 인구조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단 며칠 만에 신속하게 완료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여기에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동역자 리더십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열두 명의 리더들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방법을 주목해보게 되는데요, 여러분 본문을 보면 이들을 어떻게 뽑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까? … 사실 정확하게 그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닌데요, 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직접 지명해주셨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5절에 보면, “너희와 함께 설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이름들이 연이어 나오게 되는데요, 이렇게 그 이름을 부르고, 또 그 이름을 말씀하는 주체가 누구겠습니까? 네, 1절에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계속 이 문장의 주어입니다. 또 모든 이름이 다 불린 다음, 마지막 16절에 보면, “그들은 회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요’ 그 조상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이스라엘 종족들의 우두머리라.”고 되어 있지요. 회중에서 부름을 받은 자다, 이렇게 나오는데요, 회중에서 뽑았다, 선출됐다, 이런 표현이 아니라, 회중에서 부름을 받았다, 이렇게 표현된 것 역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의 결과임을 나타냅니다. 아울러 17절에도, 이들이 ‘지명된 사람들,’ ‘이름 불러 뽑힌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심’이 강조됩니다. ​ 물론 하나님이 정말 직접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다 이렇게 지명하셨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리더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나님이 일일이 다 이렇게 부르셨다, 꼭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미리 그 지파의 리더십으로서 세워져 있었고, 그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일에 참여케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본문이 강조하려는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그 정확한 과정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분명 본문은, 이 일을 주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부르신 것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이 세워진 건 그냥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신분이 어떻고, 또 무슨 능력이 있고, 이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 아예 기록도 하지 않지요. 단지 그들의 가문과 이름만 똑같이 기록되어, 하나님이 그들을 회중에서 부르셨다고만 나옵니다. 여기엔 모세의 역할도 제한적입니다. 분명 모세도 나름의 역할을 했을 텐데, 그럼에도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에는 오직 하나님만 개입하신 것처럼 성경은 기록합니다. 본문 후반부의 레위인들도 마찬가지지요. 왜 레위인은 이번에 수를 세지 말라고 하시는지, 왜 그들만 따로 하나님께 특별히 속한 자로 구별하시는지, 왜 꼭 레위 지파여야 하는지, 우리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우리가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만, 중요한 건 우리가 추측하는 그런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 택하심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성경의 증언인 것입니다. ​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은, 그가 어떤 절차와 어떤 기준에 따라 세워졌든, 겉으로는 누구에 의해서 세워졌든, 그는 결국 하나님이 택하여 회중 가운데서 직접 지명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실입니다. … 당연히 우리는 그 세워진 사람에게 마땅히 순종하고, 협력하여, 결국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람에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어느 대선 출마자 한 분이,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성도들이 교회의 어느 일꾼에게 협력하고, 그를 존중하여 순종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이전에, 그를 세우신 하나님 앞에,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어떤 중요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세워진 일꾼들, 리더십들, 지금의 팀장님이나 순장님들도 해당되는 것이지요. 그분들에게 기쁘게 순종하고, 힘껏 돕는 일은, 결코 사람에게 충성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충성하는,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헌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깊은 신앙적 경지인지, 이것이 우리 신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마음에 잘 품고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못한 면이 많더라도, 그가 악행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면, 피차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을 주의 몸 된 교회로 부르신 이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오늘 여기 계신 분들은 다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진 분들이시지요. 한편으로는 다름 아닌 주님이 나를 세우셨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늘 가지시길 바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다른 주의 일꾼들에게 힘껏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에 이르셔서, 우리 모두를 통해 의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 그렇게 세워진 일꾼들을 통해, 백성들의 수를 세는 이번 일은, 매우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됩니다. 본문 18절에 보시면, “둘째 달 첫째 날에 온 회중을 모으니”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19절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가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계수하였더라, 말씀합니다. 둘째 달 첫째 날에 온 회중을 모아 계수했다는 건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명령하신 날이, 바로 그 둘째 달 첫째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날, 모세는 열두 명의 리더십과 함께 온 백성들을 모아, 그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하나님이 ‘오늘 당장 시작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 당시 백성들은 어땠겠습니까? 하던 일 다 멈추고, 급한 것도 뒤로 물리고, 예고도 없던 이 일에 참여했을 겁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대단한 것이고, 그만큼 그들의 신앙이 자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애굽을 떠나 여기 시내 산까지, 약 13개월의 여정을 통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덧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예배 공동체로, 하나님의 군대로 조금씩 새로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습도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말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삶이 먼저 움직이고, 지체하지 않고 속히 순종하는 그런 신앙을 목표로 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일사분란하게 함께 움직이는, 그런 좋은 믿음의 일꾼들, 동역자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이제 20절 이하에는, 그렇게 계수된 각 지파별 숫자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장남 르우벤 지파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납달리 지파까지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때 나열된 지파의 순서는,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따라 정해진 순서입니다. 먼저 레아와 라헬의 계열이 나오고, 이후에 그 여종이었던 실바와 빌하의 계열이 나오는데요, 대체로 그런 순서입니다. …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의 후손, 레위 지파는 여기 빠져 있는데요, 그럼에도 열한 지파가 아니라 열두 지파인 것은 왜 그렇습니까? 네, 레위 대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대신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32절, 요셉의 아들). 이렇게 요셉 대신, 그 두 아들이 들어간 것은, 일찍이 야곱이 애굽에서 죽기 직전에, 그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면서, 이 둘을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손자를 왜 아들로 삼는다고 하느냐 싶지만, 이것은 야곱이 요셉을 특히 사랑하여, 한 사람 몫의 축복으로는 부족하니, 두 명의 손자들을 통해, 두 배의 유산과 축복을 물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 물론 당시는 야곱이 물려줄 게 하나도 없었지요. 오히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이 가진 걸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게 훨씬 좋아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이 훗날 이렇게 열두 지파가 되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나눠 받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야곱과 하나님만 아셨겠지요. 결국 오늘에 와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자기 큰아버지들과 같은 항렬에 올라, 이렇게 각각 하나씩의 지파를 이루게 됐고, 레위 지파가 갑자기 빠지게 되면서, 결국 요셉은 다른 야곱의 자녀들과는 다른, 두 배의 몫을 차지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유대 사회에서 장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때, 다른 자녀들의 두 배를 받도록 되어 있는데요, 그러니까 비록 르우벤이 장자로 나오지만, 실질적으로는 요셉이 그 장자의 축복을 받아 누린 셈이 된 것이지요. 참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고, 그래서 야곱이 죽기 전 모든 아들들을 축복하며 남긴 유언의 메시지 중, 요셉에게 했던 말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라고 했는데요, 찬송도 있지요. 너는 담장너머로 뻗은 나무, 이게 요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축복 그대로 요셉은 그 가지가 담을 넘어 두 배의 몫을 차지하게 됐고, 그 축복이 참으로 하나의 예언적 선포가 되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믿음을 가진 아버지의 축복이 참 놀랍지요? ​ 그럼 이제 본문에 기록된 각 지파별 숫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더 확인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가장 많은 숫자를 가진 지파는 어디입니까? 네, 유다 지파가 가장 많고, 그래서 가장 큰 군대를 이루고 있지요. 74,600명에 이르는 압도적인 숫자로서, 그 규모와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요셉의 두 아들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숫자를 다 합해도(40,500명+32,200명 = 72,700명) 이 유다 한 지파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 공동체의 실질적인 리더십은 다름 아닌 유다에게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또한 야곱의 축복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와 같다. 왕의 지휘봉(규)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고,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던 말 그대로, 유다 지파는 명실상부한 리더 지파 역할을 감당합니다. 다윗도, 예수님도 유다 지파였고, ‘유다’라는 지파의 이름이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동의어가 되지요.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유다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지요. ​ 또한 열두 지파의 인구를 모두 합한 숫자는, 60만 3천 5백 5십 명이라고 4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12로 나눠보면, 각각의 지파가 평균적으로 약 5만 명 정도임을 알 수 있는데요, 5만보다 많으면 큰 지파이고, 5만보다 적으면 상대적으로 작다고 보시면 됩니다. 5만 명이면 현재 한국 군대 기준으로 하나의 군단에 해당하는 규모인데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열두 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군대가 조직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엄청난 숫자지요.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으로 넘어갔으니, 상상하기 힘든, 정말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숫자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당신의 언약과 말씀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이 이 숫자들 너머에 담겨 있습니다. ​ 이렇게 숫자를 세고 확인하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원하셨을 겁니다. 가나안으로 진격하는 이 거룩한 군대가 의지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의지하고, 숫자를 의지하고, 이런 게 아니라, 적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식언치 않으시고,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시내 산에서 주신 그 말씀을 잘 붙들고 나아가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이 숫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늘 놓치지 말고, 어느 상황 속에서나, 누구를 만나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흔들림 없이 그 말씀을 굳게 지켜나가는, 복 된 주의 백성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오늘 1장 후반부(47절 이하)에는, 이번 계수에 포함되지 않는 레위 지파에 대한 말씀도 나옵니다. 49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고,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 중에도 넣지 말라고 하십니다. … 숫자에 넣지 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겠지요. 일단은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와는 다른 별도의 호적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백성으로서, 그들은 다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오롯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존재라는 상징성을 가집니다. … 물론 그들도 나중에 따로 수를 셉니다. 민수기 3장에서 다루게 될 텐데요, 하나님은 레위 지파만 따로 계수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처럼 20세 이상을 계수하는 게 아니라, 생후 1개월이 지난 모든 남자를 계수하라고 하십니다(어린아이까지 다 합해서 총 22,000명, 가장 적은 수). 나가서 싸울 만한 사람을 세는 게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를 구별하여 세라는 뜻인데,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존재임을 나면서부터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이들마저도 모두 숫자 계산에 포함되는 거지요. 이 부분은 나중에 3장을 살펴볼 때 다시 조금 더 자세히 나누기로 하고, 어쨌든 레위 지파는 여기서 계수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게 되고,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각 지파와 가문 별로 분배되는 기업, 땅을 받을 때도 해당사항이 없게 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자체를 기업으로 가진 사람들이지요. 다른 지파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 비록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레위인들은 싸움이 없는 자냐,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종류의 싸움을, 더 치열하고, 근본적인 싸움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내는 싸움을 싸웁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 백성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포하고 또한 지켜내야 합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거지요. …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막을 관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막에 관한 모든 일, 성막과 거기에 딸린 모든 기구들을 세우고, 해체하고, 운반하는 일들이 오직 레위 지파만의 몫입니다. 아울러 그 거룩함을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파수꾼 역할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 외인들이 가까이 오면 죽이라는 말씀이 51절 끝에 나오는데요, 설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외인’이라고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인’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본래 ‘이방인’을 가리키는 ‘자르’라는 명사입니다. 성막에 관한 한 레위 지파 외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지켜내야 하는, 레위 지파만의 특별한 소명을 일깨워 주신 겁니다. ​ 이에 대해 5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 놀라운 말씀이지요. 레위 지파는 성막 바로 옆으로, 성막 주변을 빙 둘러 그들의 장막을 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회중에 미치지 않게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막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막 ‘사이에’ 거주하는 건데요,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부정함이 충돌하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영광은 선포되도록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도 하면서, 또 반대로 세상의 부정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오염시키지 못하게도 하는, 그런 삶, 전혀 다른 의미의 전쟁, 이른바 거룩한 전쟁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칼만 들지 않았지, 레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이번 전쟁의 최선봉에 선 사람들임을 우리는 차차 알게 됩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고, 거룩하심을 지켜내느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게 할 것인가, 거기에 이 모든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 궁극적으로는 오늘 저와 여러분도 바로 이 전쟁을 감당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싸움을 싸웁니다. 여러분, 누군가 우리의 삶을 보면 그런 것들이 느껴지고 경험되어야 합니다. ‘아, 정말 이들은 뭔가 다른 걸 믿고 사는 구나. 그들에겐 다른 주인이 있구나. 이들은 돈인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섬기는 자들이구나. … 그리고 그 하나님은 거룩하시구나, 그분은 공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이 땅을 당신이 기뻐하는 어떤 그런 나라로 새롭게 하시려는 분이구나.’ 이것이 느껴지고 경험되도록, 저와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주 되심을 고백해야 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이십니까? ​ 우리의 싸움도 칼로 하는 게 아니지요. 육신에 속한 어떤 것으로 세상을 이기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병력, 얼마나 좋은 무기를 가졌느냐,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하게 보는 어떤 실력이나 능력을 성도가 갖추고 있느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느냐, 거기에 달린 싸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도 많고, 힘도 많으면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 걸로 싸우는 게 아니라, …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존하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심고 있는가, … 거기에 승패가 달린 싸움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선한 싸움을 잘 감당하고, 끝까지 싸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 말씀 맺습니다. 오늘 민수기 1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분명히 기록하며 마무리됩니다. 마지막 52절부터 54절까지 다시 보십시다. “52.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그 진영별로 각각 그 진영과 군기 곁에 칠 것이나 53.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54.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아멘. … 어떻습니까, 이젠 대놓고 군인의 정체성이 드러나지요? 막사, 진영, 군기 등의 단어가 보입니다. 레위인들은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자기들만의 전쟁을 위한 준비도 마쳤습니다. 이젠 정말 가나안으로의 진격이 임박한 것입니다. ​ 오늘 우리의 일상도 이 모습일 겁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소풍이나 여행이 아닙니다. 교회도 그저 단순한 사교단체가 아니지요. 우리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삶으로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늘 그 부르심을 기억하고, 그 부르심 앞에 충성해야 합니다. 군인에겐 결국 ‘충성’이 중요하지요. 제가 복무하던 부대의 경례 구호도 ‘충성’이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복 되게 하신다는 믿음으로, 기쁘게 주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 이미 수는 세어졌고, 저와 여러분의 이름은 지명하여 불려졌습니다. 다시 무를 수 없고, 되돌아갈 수 없고, 우리 앞엔 주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이어진, 광야가 놓여 있을 뿐입니다. 주의 세미한 음성을 잘 분별하여, 서로에게 피차 복종하며, 신속히 이 광야를 지나, 예비하신 하나님나라를 삶으로 경험하고 누리는, 복 된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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