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2021년 8월 22일 주일 설교)
2021-08-2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오순절 후 열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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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1~13,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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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2) 본문 1절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앞서 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했었지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랬습니다. 그냥 어떤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화목 된 관계 말고, 정말 깊고 친밀한 사랑과 교제를 함께 누리는, 그런 실질적인 화목의 관계를 하나님과 이루어가라고, 바울은 간절하게 요청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살아가고 계시는지요? 근래 어떤 성도님 한 분이 저에게,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깊어지는 방향으로 자라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 참 감사하다고, 제게 따로 말씀하시기도 했는데요, 그분의 감사가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저도 다시 한 번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한 가지 더 간청하고 있습니다. 1절에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할 때, 이 ‘권하다’라는 동사가, 사실은 앞서 5장에서 ‘간청하다’라고 번역됐던 동사와 같은 단어[파라칼레오]입니다. 오늘의 권면 또한 바울의 간절함 바람이 담겨 있는 그런 말씀인 것이지요. 그럼 바울은 이번엔 뭐라고 간청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사실 무척 두렵고 아찔한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긴 받았는데, 헛되이 받는다. 그 받은 은혜가 무의미해지고, 아무 결실 없이 은혜가 낭비되고 있다, 하는 뜻이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보다 더 심각한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이렇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간청하고 있다는 건 여러분, 무슨 뜻이겠습니까? 고린도교회가 지금 그렇게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는 상태다,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고, 또 오늘 저와 여러분도 조심하라는 뜻일 겁니다. 곱씹어볼수록 정신이 번쩍 드는 그런 말씀이지요.
그럼 도대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생각해봐야 되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이 권면 이후에 바울은 이사야서 말씀을 곧바로 인용하고 있고, 이어서 자신이 주의 일을 감당하면서 당한 여러 고난에 대해 나열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결국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통해 일하셨는지를 고백하고, 다시 한 번 앞의 권면을 반복하면서, 오늘 읽은 단락을 마무리하고 있는데요,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모습인지, 또 반대로 은혜를 제대로, 온전히 받아 누리는 신앙은 또 어떤 것인지, 표면적으로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아서, 저희가 직접 그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데요, 본문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감이 좀 오시는지요?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 이것이 어떤 의미, 또 어떤 신앙의 모습이겠습니까?
이 표현 자체만을 두고 생각해본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 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은혜를 받긴 받았는데, 아무 결실 없이 은혜가 소멸되거나 낭비되는 것을 의미할 겁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결국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 지난주 우리는 구판수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가 좋은 밭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안 좋은 밭에서 이루지 못한 열매를, 우리의 삶이라는 그 좋은 밭을 통해 30배, 60배, 100배의 넉넉한 하나님나라의 결실을 맺게 하신다, 하는 위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디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너무나 귀한 은혜의 말씀이었지요. 저도 예배와 순 모임을 마치고, 아내와도 한 번 더 말씀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봤는데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받은 말씀의 은혜대로, 우리의 삶이 정말 열매가 풍성해졌습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풍성한 열매를 믿고 기대하며, 한 주 동안 열심히 말씀의 씨앗을 뿌려보셨는지요? 혹시 말씀을 들을 땐 기쁨으로 받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그냥 힘없이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게 될 수도 있겠지요. 여러분, 우리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풍성한 열매로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이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은, 단순히 그런 말씀과 은혜에 대한 어떤 하나의 반응이나 모습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건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우리 신앙의 전체적인 방향과 태도에 관한 문제인데요,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진정한 깊이와 크기를 우리의 삶이 다 분별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보통 ‘은혜’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것도 어떤 좋은 느낌이나 감정의 상태로 축소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오히려 우리를 그런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해서, 나 자신에게만 집중된 삶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헛되이 받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우리의 삶의 지경을 넓혀 가게 만듭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들고,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통로가 되고 싶게 하고, 더 나아가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하나님나라와 비슷해져가기를 갈망하는, 그런 삶의 모습으로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받은 은혜의 스케일이지요. 제대로 받은 은혜는 절대 나 자신의 삶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은혜를 제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그 은혜를 축소시켜버리고, 단지 내가 위로받고,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머물러버리곤 합니다. 사도는 지금 그러한 신앙의 모습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라는 것이지요. 너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도록,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1절에 나오지요.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에게 간청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나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아니라, 너희도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동역자로 너희가 보냄 받지 않았느냐? 그게 너희가 받은 은혜가 아니냐? 그 부르심을 기억하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지금 살고 있느냐? 사도는 반문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은혜를 제대로 받은 증거가 뭐냐,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다, 라고 하는 분명한 자의식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걸 4절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세상에 나를 추천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같은 의미입니다. 은혜의 결과요, 열매는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다’라는 분명한 인식인 것입니다. …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11절에서 13절에 보면,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직접 권면합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계속 좁아지지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온전한 은혜에 눈을 떠라. 은혜를 받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그 은혜가 흘러넘쳐 살아 역사하고, 새로운 생명의 열매를 맺는 데까지, 은혜를 제대로 받아라, 사도는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 은혜의 메시지이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받는 위로로만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은 사람들, 정말 은혜를 은혜답게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하지요.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위로받았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다음이 항상 뒤따라옵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보내신다더라. … 내게 소명을 주시고,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더라,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더라, 그렇게 고백하지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냥 위로받고 은혜 받았으면 그걸로 된 건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랑 확연히 다른 점이지요. 여타의 종교들은 그냥 믿고 복 받고 자아를 완성하고 천국 가고 세상의 선한 시민으로 살면 된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만 꼭 소명을 말하고, 전도를 말하고, 선교를 말하고, 하나님나라를 말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뭔가 하나님을 위해 내 삶을 드리고픈 감격에 취합니다. 나만 생각하고 나의 평안과 행복만 생각하는 데 그치지를 않지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그것은, 결코 우리를 어떤 위로에 안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거룩한 차원의 삶을 바라보게 하고, 끊임없이 그 삶을 사모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 내가 하나님의 동역자다, 하는 말은 너무나 놀라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겠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여러 말들이 나옵니다만, 예컨대 5장에 나왔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도 그렇고,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성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도 그렇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하나님의 동역자’ 같은 말씀은 사실 인간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동역(同役)이라는 것이 그런 거지요. 어느 정도 수준이 맞는, 정말 비등비등한 관계여야 사용하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동역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뭐 그 정도는 몰라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지금 간청하지요. 은혜를 받을 거면 그렇게 받으라는 겁니다. 헛되이 받지 말고, 마음을 넓혀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스스로를 인정하는, 그런 모습으로 은혜를 제대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2절에서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사야 49장은 여러분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까? 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들이 누굽니까? 하나님께 은혜 받은 백성, 그런데 은혜를 헛되이 받은 백성이지요.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의 복이 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는데, 복은커녕 다시 세상의 종으로, 세상의 포로로 전락해버린, 그런 백성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이사야 49장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구약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지금이 은혜 받을 때다, 이제 구원이 임할 것이다, 말씀하면서, 여전히 너희는 나의 종이요, 나와 함께 일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여전히 열방의 빛이어서, 내가 내 영광을 너희 안에 나타내고, 너희를 통해 세상이 복을 얻을 거라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포하십니다.
여러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그들이 다시 자유를 얻어, 자기 땅으로 되돌아갈 거라는, 어떤 위로의 메시지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의 후반부(40장~)는 다 그 내용이지요. 하나님이 그들을 열방의 빛으로 삼아, 그들과 함께 일하셔서, 그들을 통해 온 열방을 구원하신다, 그들에게 약속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내 이루고야 만다, 끊임없이 그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처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실 때 주셨던 말씀 그대로이지요. 믿으면 천국 간다, 믿으면 복 받고 구원 얻는다, 이게 아니라, 너희가 믿으면, 세상의 빛이요, 나의 동역자요, 사람 낚는 어부요, 나와 함께 일하는 자가 된다,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정말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본래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한 번 고꾸라진 상태가 됐을 때는 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 은혜를 받고 회심을 할 땐 뭔가 될 것 같고, 뭔가 내가 달라진 것 같고, 그래서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도 거침없이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하지만 일상의 삶을 살고,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내 믿음의 밑바닥을 경험하고, 내가 가진 삶의 문제만으로도 헐떡이고, 그러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 이렇게 여러 번 인생의 반격을 얻어맞으면, 오늘 이런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 그랬지요. “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출 4:13)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요, 하나님. 나이 80에, 다 늙어서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고, 세상을 구원한다고, 저를 보낸다고 하십니까? 젊고 능력 있을 때, 애굽의 왕자로서 힘도 있고, 비전도 있고, 꿈도 있어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도 안 되던 건데, 이제 다 어그러지고 망가져서, 인생 막바지에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늙은이가 무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역을 하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모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 수 없는 거구나, 내 신앙이 삶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그 실존적 고백을 모든 성도가 공유하고 있고, 그래서 다시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닌 물고기 낚는 어부로 되돌아가서, 처음보다 더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시 그런 우리를 찾아오시지요. 그리고 다시 권면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담대해라.” 다시 은혜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부르고 계심을 믿고, 기억하고, 또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고 선포하는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대답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그것을 믿고, 인정하고, 선포해라. 그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그 하나님의 일을, 일평생 소명으로 감당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지요. 믿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자신을 세상의 복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다, 나는 그 거룩한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고,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 거룩한 품격을 잃지 않았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4절인데요,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 그랬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했다. 여러분,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지요. 우리가 늘 주목하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신앙의 고백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는 것, 스스로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상에 천거하는 것, 삶의 모든 일에 대하여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성도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믿음의 고백은 없으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가장 시급한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슨 일을 하면 되는가, 질문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여기 4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니까, 무슨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가?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는가? 바울은 아니라는 겁니다. 대신 뭐라고 말합니까?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했다, 이야기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을 감당하든, 그 모든 일을 하나님과 동역하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겼고, 스스로를 항상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 모든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세속적으로 일상적인 일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일이든 아니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든 아니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나와 함께 이 일을 감당하고 계신다,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바울의 관심은 무슨 일을 하느냐, 거기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6절 이하의 말씀인데요, 모든 일을 하되,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그 일들을 감당했다고 바울은 길게 나열합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과 고난 속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강조하지요.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는, 그 일을 어떤 자세와 태도로, 어떤 모습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일 겁니다. … 저도 돌아보면, 과거에 젊을 땐,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어떤 사역을 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나, 이런 고민 속에 살았다면, 지금은 오히려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일이 내게 주어지고 맡겨지든,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와 자세로 감당하느냐, 거기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냥 교회를 청소하고, 집에서 설거지 하나를 하더라도, 그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 바울은 그 시작이 ‘깨끗함’[아그노테스]이라고 하지요. 6절 첫 단어가 ‘깨끗함’입니다. 탁월함, 훌륭함, 뭐 이런 게 아니지요. 여기 ‘깨끗함’이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함(clean)이기도 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뜻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pure)이라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복잡하고 잡다한 생각과 목적이 얽히고설킨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라는 단순한 마음을 지키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역의 출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마음으로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뭐가 작은 일이겠습니까? 그 규모나 눈에 보이는 영향력이 미비한 게 작은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적으로 작은 일, 내가 늘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 마땅히 해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일, … 뭔가 대의(大義)를 위하고 특별한 명분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그래서 한다고 해도 별로 티도 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 그런 일이야말로 실로 가장 작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엄마니까, 아빠니까, 자식이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있지요. 목사니까, 장로니까, 직분을 맡았으니까 해야 하는 일, 돈을 벌어야 하고,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 … 그런 일들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대부분 남이 잘 알아주지 않지요. 스스로 보람을 느끼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바로 그 작은 일에서부터입니다. 그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우리가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아무리 대단하고 세상을 바꾸는 큰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작은 일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감당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엄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교사요, 학생이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이다, 그 고백을 멈추지 않는다면, 분명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일이든, 심고 물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린도전서에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지금보다 더 겸손하면서도, 지금보다 더 담대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매순간 더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더 기도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분명 오늘 바울의 고백처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그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저는 언젠가부터 이 땅의 교회들이, 점점 영적인 요양원처럼 되어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마음 한 견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생명을 살리고, 사람 낚는 일은 하지 않고, 그저 겨우 생명만 유지한 채, 끊임없이 누군가의 사랑과 위로를 갈망하면서, 다른 누군가의 섬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그런 영적인 노인들이 모인 공동체가 오늘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 혹 우리고백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메시지가 선포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참으로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자처하여 제대로 받아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요, 생명을 살리는 그 부르심에 기쁘게 순종하며,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