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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24. 안식년과 희년

2021-08-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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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8 수요 성경 강해 ----------------------------- 레위기 25:1~55, 안식년과 희년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와 종결부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첨부파일 lev24(2) .mp3 파일 다운로드 ​ ■ 두 주 만에 다시 레위기 강해를 이어가는데요, 지난 23장에서는 ‘거룩한 시간’ 그러니까 절기에 대한 내용을 살펴봤고, 24장에서는 성소 안에 위치한 등잔불과 진설병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시간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하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25장 역시 그러한 ‘거룩한 시간’에 대한 규례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말씀인데요,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규례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거기서 분배받은 땅을 어떻게 경작하여 먹고 살아갈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이고, 또 모든 절기 규례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출애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레위기 전체의 클라이맥스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 본문의 순서대로 먼저 안식년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안식년은 안식일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7년에 한 번 땅을 쉬게 하는 규례입니다. 씨를 아예 뿌리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땅을 쉬게 하는 건데요, 땅이 안식하니, 짐승도 쉬고, 사람도 쉬고, 다 쉴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땅과 함께 피조 세계의 쉼이 이루어지는 해가 바로 안식년입니다. … 다만 밭에서 스스로 자라는 작물의 경우는, 그냥 누구나 먹어도 상관이 없는데요, 이때도 의도적으로 추수를 해서 거두는 것은 아니고, 각자 필요에 따라,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무나 가져가 먹을 수 있는데요, 파종을 따로 하지 않으니 그 양이 그리 많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안식년에는 그 전에 거두어서 저장해둔 곡식, 이른바 묵은 것을 먹게 됩니다. 그 묵은 것을 먹는 1년의 시간 동안 땅은 안식하고 또 소진된 힘(地力)을 보충합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휴한법이라고 해서, 지력을 회복하고, 흙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일정 기간 동안 작물을 심지 않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생산성을 중시하는 요즘에는 그런 경우도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많은 비료를 뿌려서 어떻게든 땅의 힘을 유지시켜가면서, 계속해서 소출을 거둡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땅을 쉬게 해야 한다, 분명히 말씀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땅을 마치 인격체처럼 표현하면서, 땅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서 안식하게 하라, 명령하시지요. 말씀드린 것처럼 땅이 쉬어야 인간도 쉬고 짐승도 쉬고, 또 인간의 탐욕도 잠시 쉬어가기 때문입니다. 그 쉼을 통해 어그러진 창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더 충만히 누리고,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온전히 하라는 뜻이 안식년에 담겨 있는 겁니다. … 아울러 하나님은 안식년을 지켜야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계시는데요, 23절에 보면,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다만 그 주님 안에 깃들어 사는 거류민, 또 동거하는 자일뿐이라고 하시지요. 여기 ‘동거하는 자’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나중에 다시 설명이 됩니다만, 토지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그런 대상입니다. 다만 이 땅에 사는 동안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이것이 땅에 대한 성경의 관점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는 주인의 뜻대로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또한 오늘 말씀처럼 쉬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 실제로 땅은 어느 인간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지요. 땅에서 경작한 것들은 우리가 흘린 땀의 결과일 수 있어도, 그 땅 자체는, 본래 인간이 아무것도 기여한 바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든 생명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살아가는 삶의 근본 터전이지만, 땅은 그럼에도 조금도 더 넓힐 수 없는, 제한된 자원이지요. 그래서 땅은 아주 특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이것을 독점하거나 함부로 남의 것을 빼앗게 해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이런 토지의 특징을 감안하여, 토지를 다른 자원과 구별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토지 공개념’이라는 말도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토지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그 토지의 가치를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토지를 살 수 있고, 그걸로 더 많은 부를 쌓는 하나의 투자 개념에 우리는 익숙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토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함께 그 땅에 깃들어 생명을 유지하라고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23절에 “너희는 거류민이다.”라고 할 때 그 ‘거류민’을 아래쪽 주석에서는 ‘소작인’이라고 했습니다. 땅을 빌려 소출의 일부를 가져가는 품꾼이라는 뜻입니다. 동거인도 그런 뜻입니다. 내 집이 아닌 하나님의 집에 잠시 기거하면서, 내 땅이 아닌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며 품삯을 받는 사람, 그가 본문이 말하는 동거인의 의미입니다. 땅에 의존하여 사는 인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말일 겁니다. 세상에선 어림도 없다고 하겠지요. 그럼 여러분, 당시 이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을까요?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이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저 땅을 분배 받아서 살았으니, 아마 지금 저와 여러분보다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쉬웠을 리 없습니다. 처음엔 감사로 순종했겠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권리가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겁니다. 7년째마다 땅을 쉬게 하고, 묵은 것을 먹으며 사람도 쉬고 짐승도 쉰다? 전적으로 토지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했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욕심을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일이지요. 토지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없이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이러한 안식년, 또 나중에 사려볼 희년을 제대로 지켰다는 기록이 거의 전무합니다. 희년의 경우는 아예 성경에 언급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안식년마저도 히스기야 왕 때 정도에 일시적으로 지켜졌다는 작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입니다(왕하 19:29). ​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땅은 내 것이며, 안식년을 지켜 그것을 온전히 쉬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약속하십니다. 18절 이하(~21절)에 보면,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하십니다. 참 가슴 떨리는 약속의 말씀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7년마다 자신의 삶으로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여러분 그 믿음의 감격이 어떠했을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으로, 삶으로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안식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 맞이하게 되는 50년째 해가 ‘희년’입니다. 복 ‘희’(禧), 행복 ‘희’ 자를 써서,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정확히는 50년째 되는 해의 대속죄일(유대력 7월 10일)에서 시작되어 다음해 속죄일까지 1년간 희년으로 지킵니다. 대속죄일에 큰 나팔을 부는 것으로 희년이 시작되는데요, 그 나팔[쇼파르]을 만드는 숫양의 뿔이 히브리어로 ‘요벨’이어서, 영어로는 희년을 ‘year of jubilee’라고 표현합니다. ‘요벨’을 음역해서 ‘jubilee’라고 한 겁니다. ​ 이러한 희년에는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10절에 설명되어 있는데요,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이 분배받은 토지, 자기 집안이 물려받은 기업으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말해 50년 동안 서로 사고 팔았던 모든 토지 거래가 무효화되고, 그 땅들이 전부 본래의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말 그대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거지요. 이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간다고 10절 끝에 나오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종이나 노예로 팔려 다른 사람의 집에 동거하며 살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어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빼앗겨 종이 되는 일은 거의 대부분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희년에는 그 모든 빚도 다 탕감되게 됩니다. 누구에게 얼마의 빚을 졌든, 또 누구에게 얼마의 돈을 빌려줬든, 그 모든 채무관계가 다 완전히 소멸됩니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가족과 함께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자유, 그러나 세상 가운데 살면서 잃어버렸던 모든 자유를 되찾는 날, 그것이 바로 희년인 것입니다. ​ 50년마다 희년이 돌아오게 되니까, 지금보다 수명이 훨씬 짧았던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의 인생에 단 한 번 이 희년을 맞이했겠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인생에 한 번은, 진정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는 셈입니다. 그래서 희년을 가리켜 ‘은혜의 해’라고도 부릅니다. … 물론 그 50년 동안 많은 토지를 구입하여 재물을 축적했던 사람들, 또 많은 종과 노예를 부리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 희년이 별로 은혜로운 해가 아닐 겁니다. 절대 희년을 지키고 싶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그들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물질의 종, 탐욕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면, 그들 역시 이제야 비로소 그 모든 욕망과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기회를 얻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희년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생긴 많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희년이 왜 대속죄일로부터 시작되는가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욕심대로 살았던 삶,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섬기고 살았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삶의 근본적인 회개가, 희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물론 희년 전에는 그럼 욕심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이냐, 50년으로 그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 그 동안 더 악착같이 땅을 사고 곡식을 거둬서 곡식과 돈을 비축하며 살면 되지 않겠느냐,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50년까지 기다리고, 버티고 있지만 말고, 중간에라도 다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노력하라고,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강조하십니다. 땅을 무르는 것에 관한 규례 그리고 이자를 받지 말고 빌려주라는 규례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 25절 이하에 보면 땅을 무른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요, 어떤 땅을 본래 그 임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 만약 누군가 가난해져서 자신의 기업을 팔아야 할 수밖에 없게 됐다면, 그냥 그 사람의 일이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그 친척 중 하나가 가서 그 땅을 도로 사서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땅 무르기 규례입니다. 참 놀랍지요. 만일 그런 친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동거인이 되어 돈을 모아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되찾아오거나, 그것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희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땅을 잃었으니, 그는 더 가난해질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나중에 빚도 내고 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그렇게 종이 된 사람을 대신 속량하는 것, 그것 역시 땅을 ‘무르다’와 똑같은 동사(‘게울라’)를 사용합니다. 사람을 무르는 것은 ‘속량’ 혹은 ‘구속’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땅이나 사람을 대신 물러주는 자를 가리켜 ‘고엘’이라고 했습니다. ‘기업 무르는 자,’ ‘속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엘’이시고, 또한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의 ‘고엘’이 되셔셔,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의 기업을 대신 무르는 자로 나서신 것이지요. 바로 그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서로를 무르는 자로, 속량하는 자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부르셨음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아울러 하나님은, 기업을 잃어버린 그 사람에게 돈이나 양식을 꾸어줄 때, 이자를 받지 말라고 본문 35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종이나 노예처럼 함부로 부리지 말고, 근로자나 동거하는 사람으로 여겨서, 합당한 삯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겠지요. 나중에 신명기 15장에 보면, 그렇게 종이 된 히브리인을 안식년에는 반드시 자유롭게 해 주라고 하는 규례가 나옵니다. 희년이 되기 전에 안식년에 먼저 그 몸이라도 자유롭게 풀어주라는 건데요, 아직 땅까지는 되돌려 받지 못한 상황이니까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얻기에는 여전히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자유하게 하면서, 주인이었던 자가 그를 빈손으로 내보내지 말고, 반드시 후히 주어 보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어떻게든 희년까지 기다리지 말고 온전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말이 희년이지 실상 50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그 누구나, 그 무엇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권세든, 물질이든 말이지요. 비록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만, 과연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가, 다시 한 번 돌아본다면 의문이 생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백성으로 살아야만, 나를 섬기는 자로 살아야만 참으로 자유하다, … 주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삶이어야, 비로소 참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그걸 믿고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러한 안식년과 희년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거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역사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증언하지요. 레위기 2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레 20:22) 순종하면 땅이 그들을 토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요,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토해내고,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70년간 바벨론의 포로로, 종으로, 모든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게 되지요. 그들이 그 동안 가나안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결과입니다. ​ 사실 그들이 유대 땅을 떠나 바벨론에서 지낸 그 70년의 시간은 묘하게 하나님의 시간이요, 쉼의 시간인 7이라는 숫자와 겹칩니다. 그리고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70년 세월 동안, 가나안 땅은 비로소 그동안 빼앗긴 쉼을 누릴 수 있었겠지요. 농사지을 사람도, 땅을 착취할 사람도 없으니, 땅이 저절로 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여러분,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대로 살면 우리가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은 땅을 쉬게 하는 이런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지요. 비어있는 땅 하나 없이 인간은 빽빽하게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쉬는 땅 하나 없이 모든 땅이 계속해서 생산에 혹사당합니다. 덕분에 생산성이 높아져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부요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며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버리기를 반복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을 정말 이롭게 하는가, 정말 인간이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와 생명을 누리며 사는가,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수억 명이 고통을 당하고, 기후의 변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심각한 질병과 재난이 닥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인류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그 생명을 잃는 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멈출 수도 없는 속도로 브레이크도 없이 달려가고 있지요. 희년은 그걸 멈추게 하는 하나님의 브레이크와 같았습니다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지혜도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이 참으로 지혜롭고 똑똑한 것 같지만 다 헛것이지요. 참된 자유와 쉼은 결코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이룰 수 없는 것임을,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 모습으로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십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안식년과 희년을 지켰다는 명확한 이야기는 성경에 없지만, 그러나 그 정신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파편적으로 남아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왕 아합 시절에 살았던 나봇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나봇이 가진 땅(포도원)이 아합 왕의 궁전과 아주 가까이 있었믐제뇨, 그런데 아합 왕이 나봇에게 그 땅을 팔라고 합니다. 자신의 궁에서 가깝기도 하고 그 땅이 기름져 보였던지, 거기에 자신의 채소밭을 꾸미겠다고 한 겁니다. 당연히 다른 좋은 땅, 좋은 값으로 보상하겠다고 아합이 나봇을 설득했는데요, 그때 나봇이 뭐라고 하냐면,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이 포도원을 왕에게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팔 수 없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희년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지요. ​ 또한 다 아시는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 집안의 친척인데, 과부가 된 나오미와 룻 집안의 기업 무르는 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여, 그 집안의 기업을 되찾아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힘써 순종한 것이지요. 결국 그와 룻 사이에 태어난 오벳이 다윗 왕의 조부가 되는데요, 훗날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도 오르는 영광을 입게 됩니다. 비록 세상이 다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가셨으며, 또한 지금도 그 일을 행하고 계심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유다가 그렇게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훗날 그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향해 한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되는데요, 이사야 6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아멘. ​ 여러분이 익히 들어보신 말씀일 겁니다. 메시아의 오심과 그가 베푸실 자유와 구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데요, 여기에 보면 ‘은혜의 해’라고 해서 희년에 대한 선포가 등장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고,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날, 그 날이 바로 은혜의 해, 희년인데, 그 날이 메시아와 함께 임하게 될 거라고, 예언자가가 포로 된 백성들에게 외친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훗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당에서 바로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예언의 말씀이 이제 주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시는 장면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예수님은 이사야 말씀에 기록된 그와 같은 일들을 이 땅에서 직접 행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전한 자유와 쉼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 그 사실을 온전히 믿었던 성도들은 다시 그 희년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비록 세상은 여전히 억압과 불의로 가득했고, 그들에게 땅 한 평 새로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그 나라의 완성을 이 땅에서 살아내고자 힘썼습니다. 그리고 함께 그 나라를 누리며 살았지요.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져서,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며 살아갈 순 없게 됐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그 누구도 자기 재물을 내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그래서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비록 세상이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에 의해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려는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모인 성령의 공동체가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여전히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겠지요. 오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 또한 그 남은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할 수 있다면, 세상의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 일에도 참여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여의치 않더라도, 희년과 복음의 메시지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 각자가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과연 지금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오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할 수 있을지, 여러분 더 깊이 고민하고, 늘 생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 하루아침에, 갑자기 희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안식년과 희년의 말씀이, 레위기 가장 뒤편에 기록되어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희년을 살아내는 게 아니라, 레위기 말씀의 순서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순종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자로 살고, 정결함과 거룩함을 잃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하고, 안식일과 절기들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고백하기 위해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며, 날마다 주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다 보면, 분명 희년의 말씀을 삶으로 고백하게 되는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 주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미 시작됐으며, 이미 주님이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하십니다. 과연 지금 우리의 삶이 그 나라를 살아내고, 또 바라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내가 가진 것을 내 것이라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땅과 짐승과 이웃의 쉼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형제의 궁핍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자유와 쉼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과 일상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며,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부디 물질과 탐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여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우리고백교회가 서로의 형편을 돌아보고, 그 삶을 충분히 책임지는, 온전한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