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2021년 6월 6일 주일 설교)
2021-06-0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오순절 후 두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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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2:5~13,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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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3) 본문 10절의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실 참 어려운 말이지요. 듣기도 좋고, 의미도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 죄와 죄인을 분리해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가 싶기도 하고, 또 구체적으로 실제 삶에서 어떻게 이것을 실천하고 살아야 하나 싶은, 참 막막한 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이것과 반대의 모습일 때도 많지요. 보통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죄인을 미워하는 데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죄보다 죄인이 먼저 보이지요. 죄는 없애고, 사람은 돌이키게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 사람이 아닌 죄가 살아남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죄인을 불쌍히 여기려다가, 죄까지 용납해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이 또한 어디서든 자주 보는 일입니다. 거룩함을 자처하는 교회에서도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사회의 지탄을 받곤 하지요. 몸에서 정확히 암세포만 제거하여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도 참 어렵지만, 죄인에게서 죄만을 때내어 그 사람을 살려내는 일, 그리고 그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우리의 죄와 책임을 하나님이 다 면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죄가 있지만, 없는 걸로 간주해주겠다, 또 과거와 현재, 미래에 지은 죄를 다 용서해주신다, 이게 복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정말로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해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말씀대로(벧전 2:24), 이젠 죄를 멀리하고, 죄를 이김으로써, 참으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죄와 사망에게 대신 내어주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지난 수요일 레위기 말씀을 나누면서, 이른바 ‘아사셀’ 염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이 대속죄일인데요, 이날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제거하고, 또 그 죄로 인해 오염된 하나님의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큰 속죄의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런데 이때 드리는 속죄제는 단순히 죄를 씻는 속죄의 제사만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씻기 위해 제물이 죽임을 당하는 보통의 속죄제사도 드려지지만, 또 한 가지, 죄를 멀리 내보내기 위해 그 제물이 광야로 내보내지는 그런 속죄의 제사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멀리 내보내는 속죄의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을 가리켜 ‘아사셀’이라고 부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전가된 채, 이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그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내보내집니다. 광야 깊은 곳까지, 절대 되돌아올 수 없는 사막의 험준한 곳까지, 때론 절벽까지 데리고 나가서, 거기다 이 아사셀 염소를 두고 오는 건데요, … 이스라엘의 죄가 단지 사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멀리 떼어내져 제거되었음을, 그래서 더는 그 죄가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었음을, 이 아사셀 염소를 통해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 옮기심으로, 우리를 온전히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 아사셀 염소 가운데 녹아져 있고, 그래서 아사셀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예표가 됩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 아사셀 염소가 되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으로 나가, ‘해골’이라 하는 골고다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죽임당한 어린양’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멀리 치워버리시고, 그 죄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으신 ‘아사셀 염소’로서,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단지 죄를 씻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영향력에서 온전히 벗어나, 의를 행하는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우리가 그 능력으로 새로워졌음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바로 그 일을 지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죄는 미워하고 처분하되 죄인은 살리려고 합니다. 어떤 심각한 잘못으로 인해 교회에서 책망과 징계를 받은 누군가를, 이제 그만 용서하고 위로하여,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바울을 포함한 모든 성도가 그 죄에 대한 온전한 자유를 누리자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좋은 일이고, 멋진 일인 건 알겠는데, 현실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냥 죄와 죄인 모두를 함께 처분해버리거나, 아니면 죄에 대해서까지 관용을 베푸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닌 거지요. 하지만 여러분,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없을 것입니다. 어렵지만 해내야 하지요.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고,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고백교회도 이러한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사람,’ 죄를 짓고 벌을 받은 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추측만 해볼 뿐인데요, 앞서 고린도전서에서 언급된 음행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 잘못된 성찬을 먹고 마신 당사자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에 대해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가했던 사람일 수도 있지요.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바울 자신이 그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 바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문제인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먼저 그를 용서했고, 그러니 고린도교회도 그렇게 해 주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이 성도에 대한 교회의 징계는 이미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 징계가 충분했으니, 이제 그만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지요. 6절에 보면,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옵니다. 자칫 이제 그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원문의 의미는, 이미 상당한 벌을 받았고, 그것이 충분했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벌을 받았다는 걸 보면, 아마도 ‘성도의 교제’나 성찬에서 제외되는 어떤 책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어쨌든 바울은, 명확하고 충분한 처벌 뒤의 용서를 이야기합니다. 죄에 대한 처벌 없이, 그저 회개만 있는, 그런 용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교회의 권징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선한 행실은 칭찬하고, 악한 행실은 징계하여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고 성도의 덕을 세워야 하지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역으로 보면, 죄인은 미워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죄는 미워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한 처벌이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에, 용서의 가능성도 그만큼 생기는 것이지요. 정당한 징계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용서를 먼저 말하는 건 결코 죄를 미워하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명확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당연히 그 피해 당사자의 용서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공동체가 용서를 말할 수 있습니다. … 고린도교회의 이번 문제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것이 바울이고, 그가 먼저 용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용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꾸로 돼서, 사람들이 먼저 바울을 향해 용서하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정말 안 될 일입니다. 용서할 마음도 없고, 지금 당장은 그럴 힘도 없는데도, 그저 신앙과 사랑을 명분 삼아 용서를 강요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이고,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처벌의 과정을 더욱 분명하게 함으로써, 용서가 가능한 환경을 먼저 만들어줘야 하지요. 그렇다 해도 용서는 결국 그 피해자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문제로 남겨두고, 공동체는 기다려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피해자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보면, …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를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유대인 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었을 때, 용서로 인해 치유 받는 최초의 사람, 혹은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그 사람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그 죄의 힘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용서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내가 쥐약을 마시고 쥐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지요(by 앤 라모트). 정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용서라는 해독제를 마셔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아마도 바울은 이미 그 해독제를 충분히 마신 것처럼 보입니다. 10절을 보면,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이라고 해서, 바울이 용서를 하긴 했는데, 이젠 그 일이 어떤 일인지도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마치 그것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써야 겨우 기억이 난다는 말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미 용서를 했으니,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고, 또 더는 기억하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용서를 안 했다면 모를까, 이왕 용서를 했고, 그러니 아예 잊어버리기로 바울은 작정한 모습입니다. 잊으려 한다고 다 잊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바울 자신과 그들 모두가 자유를 되찾으려는 힘겨운 노력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것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지요. 결국 회개한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의 망각을 통해서 진정한 현실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여러분이 누군가를 용서하셨다면, 그의 허물과 여러분의 상처를 또한 잊을 수 있게 돼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용서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은, 10절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이 자신의 용서에 대해, ‘그리스도 앞에서 한 용서’라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한 용서, … 사실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주님 얼굴 앞에서 용서한 것이다. 참 독특한 표현이지요. … 본래 ‘용서’라는 한자어 ‘容恕’에도 ‘얼굴’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요. ‘용서’의 ‘容’이 얼굴 ‘용’입니다. ‘서(恕)’라는 글자가 그냥 ‘용서하다’라는 뜻이지요. 왜 ‘얼굴’이라는 말이 들어갔을까, 혹시 용서를 통해 잘못한 상대방의 ‘면을 세워준다’는 건가 싶지도 하지만, 실은 이 얼굴 ‘용’자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신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그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오래 전 사람들은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런 뜻으로만 이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면전에 그를 용서했다’는 건, 분명 그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 앞에서, 주님께 받은 그 용서의 힘으로 그를 용서한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용서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받은 용서에 근거하여, 우리는 남의 허물도 용서하지요.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100데나리온을 탕감해줍니다. 그게 믿어져야 가능한 일이지요. 바울이 이렇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건, 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누리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바울은 바로 그 은혜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내가 남에게 탕감해준 100데나리온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일만 달란트에 집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겁니다. 백 데나리온이 적은 금액이라 그냥 탕감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100데나리온, 절대 작은 돈이 아니지요. 그게 작아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일만 달란트, 그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용서하고 탕감해줄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받은 은혜만큼, 그 용서의 크기만큼, 우리는 남도 용서할 수 있을 따름이지요.
여기에 대한 주님의 입장은 분명하십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라고 하시지요. … 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는 말씀도 하십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심한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라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왜 주님께 용서받은 걸, 이 사람에게 갚고 살아야 하는지,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시지요. 참으로 주님의 은혜가 믿어지고, 경험된다면, 또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이 말씀에 순종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주님 얼굴 앞에서, 주께 받은 은혜 앞에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이야기합니다. … 본문 7절에 이 ‘용서하고 위로하다’라는 표현은, 사실 바울이 아주 공들여 사용한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헬라어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용서하다’라는 일반적인 헬라어 동사는 ‘아피페미’라는 말이 있는데요, 바울은 여기서 일부러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은혜’를 뜻하는 명사 ‘카리스’의 동사형 ‘카리조마이’를 쓰는 거지요. 본래 ‘빚을 탕감해주다,’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이고, 당연히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가 어디에 근거하는지, 또 어떤 힘으로 용서가 가능한 것인지 바울은 꼭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 ‘위로하다’라는 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많이 나왔던 ‘위로’라는 단어, 기억하시지요? ‘파라칼레오’라고 해서,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는 ‘보혜사’라는 단어도 여기서 왔다고 했습니다. …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죄를 범한 성도를 향해, 바울 자신과 성도들이 해야 하는 일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사역, 또 성령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해, 죄와 죄인을 다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 죄의 문제가 발생했다면, 죄를 분별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후에는 용서하고, 또 위로하는 일들이 이어져야 한다고 사도는 가르치는데요, 죄를 심판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역할만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성령 하나님의 위로가 죄인을 함께 행해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공동체는 죄를 이길 수 있고,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살려내는 하나님의 사랑(8절)이 이루어진다고, 바울 사도는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징계 받은 그를 용서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를 위로하여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징계나 용서가 끝이 아니라, 그 사람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되, 죄인을 용서하고 다시 일으켜서, 의로운 자녀로 회복시키는 것까지가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이야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용서가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징계 받은 그가 여전히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 그들과 같은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한 몸이기 때문이고, 그 용서와 위로를 통해 비로소 교회는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실패와 배신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회복의 메시지도 함께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으니, 네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의 실패로 인해 절망에 빠져 있지 않게 하시고, 또 빠져나온 후에는 절망에 빠진 다른 이들을 일으키는 사명까지 부여해주십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그 사명이 있어야만, 그가 온전히 일어설 수 있음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역시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넘어지고 징계 받은 이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겨 아예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도록, 이제 그만 그를 그 근심으로부터 꺼내어주라고, 거기까지가 그 지체를 위해 감당해야 할 우리의 용서의 몫이라고 사도는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을 놓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징계만으로, 또 용서만으로 우리는 버거워 하지요. 하지만 여러분, 주님은 말씀합니다. 용서했다면, 그 생명을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그것이 더 기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그 하나를 위해 아흔아홉을 들에 두고 가서 찾아오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 바울도 본문에서 똑같이 고백합니다. 12절과 13절 내용이 그것이지요.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바울이 머물고 있는 드로아에는 선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를 통해 복음의 능력이 드디어 나타나고, 구원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선교지 어디서도 그런 우호적인 반응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늘 상황은 힘들고, 열매는 적었지요. 그런데 지금 드로아는 다릅니다.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게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거기서 계속해서 사역하지 못한 채, 바다 건너 마게도냐로 넘어옵니다. 왜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회복됐는지, 그 소식을 가지고 오기로 한 디도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 그 다음 조치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고, 징계 받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일을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역의 성과나 결과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의 회복을 바라는 사도의 이 간절한 마음이, 영혼을 향한 이 끈적끈적한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용서하고 위로하는 책임은 회피하고, 그저 지적하고 한탄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내 할 일 다 했다는 그런 모습은 반드시 버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들이 그런 모습이었지요. 모든 경건의 목적이, 결국은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모습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자기 교만이 대표적인 사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사탄에게 속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11절이지요.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옳은 일, 바른 일을 행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사탄에게 속을 수 있습니다. 죄를 분별하고 지적하고 처벌하지만, 그를 회복시키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영혼에 대해 무책임한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이 사탄의 계책이고 속임수라는 걸,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발견하고 지적하는 그것이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그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위로하며, 그를 근심의 늪에서 꺼내야 합니다. 다시 그가 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온전히 살려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이며, 그 수고를 서로에게 행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그 길로 잘 가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잘 살펴보십시다. 사탄에게 속아서 놀아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십시다. 죄를 미워하되,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하고 위로하는, 그 쉽지 않은 믿음의 길을 우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는지, 오늘 말씀 앞에 우리의 모습을 차분히 비추어보십시다. … 요즘 저는 우리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고, 그래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보다는, 그저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 응징하는 데만 관심을 두는, 그런 사회인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합니다. 혐오가 또 다른 혐오를 부추기고, 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 힘을 쏟습니다. …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늘 죄와 용서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용서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냥 술 한 번 같이 먹고 털어버리는데, 교회에선 한 번 어긋난 감정이 몇 년씩 이어집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 말씀 앞에서, 돌을 내려놓고 가는 게 아니라, 주님 면전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돌을 던져대기 바쁩니다.
여러분, 우리 그러지 마십시다. 손에 돈 돌을 그만 내려놓고,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하고 위로하며, 결국 죄인을 돌이키게 만드는, 그런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 내가 돌이켜 일어섰다면, 다시 다른 형제를 굳게 하는 데까지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 이것이 비록 어렵고 고단한 일이겠지만, 우리가 그 방향을 놓치지 않고, 함께 기도하며 걸어간다면, 반드시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건강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함께 이루어갈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거기까지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