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 (2021년 5월 30일 주일 설교)

2021-05-3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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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 메시지 ----------------------------------- 고린도후서 1:12~2:4, 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설교 도입부는 생략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원고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파일 cor(2)02 .mp3 파일 다운로드 ​ (고린도후서 강해 2) 본문 14절의 ‘우리의 자랑, 너희의 자랑’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오해나 편견을 두려워하고, 또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무척 괴로워합니다. 때론 그런 오해의 가능성만으로도 마음이 힘들 때가 있지요. 얼마 전 저희 교회 성도님 한 분의 차를 탔던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모임에 함께 참석했다가 늦은 저녁 돌아오는 길에, 방향도 다른 저희 부부를 집까지 데려다주셔서 편안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저는, 성도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요, 그러던 중에, 저 앞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네비게이션을 봤는데요, 제한속도보다 한 시속 2, 3km 정도, 아주 조금 초과해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운전하던 성도님이, 저와의 대화에도 계속 신경을 쓰고 계셔서, 그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신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차는 이제 거의 카메라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는데 속도는 여전히 그대로여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급히 네비게이션을 가리키며 성도님께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속도가 좀 빠른데 …!” 예상 못한 제 이야기에 살짝 당황한 성도님께서 잠시 브레이크를 밟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갑자기 중단됐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 순간 저는 약간 후회가 됐습니다. 운전자가 알아서 잘 할 텐데,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었습니다. 사실 제가 운전하신 성도님보다 나이가 좀 더 많았는데요, 괜히 연장자라는 이유로 간섭하게 된 것 같아서, 혹시 성도의 기분이 상한 건 아닌가, 마음이 쓰였습니다. 더구나 제가 느끼건대, 성도님은 끝까지 카메라를 확인하지 못한 채 그 지점을 지나온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더 기분이 나쁠 것이지요. 카메라에 단속돼서 벌금 내는 걸 막으려 한 걸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속도 좀 줄여서 운전하라는, 소위 ‘꼰대’의 지적으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이해했다면, 제가 운전자였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 그런데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이미 시간이 조금 흘러서, 그렇게 뒤늦게 설명을 하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됐습니다. 결국 상황은 그냥 그렇게 마무리됐고, 저는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사모님께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괜찮다고, 설사 오해를 했어도 그걸로 당신을 이상하게 볼 그런 관계는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고, 그렇게 아주 작은 삶의 에피소드 하나가 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벌써 두 달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제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에겐 그게 그렇고 사소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반증이 되겠지요. 누군가 저를, 꼰대 같은 목사, 지적하고 참견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향한 고린도교회의 오해를 풀기 위해 애를 씁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이야기로 편지의 첫인사를 대신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바울은 그 오해를 해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앞서 저의 경우처럼 그냥 아주 소소한 일상의 오해가 아니라, 그의 소명과 사역, 또 인격에 관한 문제였고, 향후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 그 오해의 발단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그 일정을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변경한 데 있었습니다. 사실 이건 그렇게 작은 문제가 아니지요. 바울의 말에 대한 신뢰 문제이고, 당연히 서로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심각한 부분입니다. 더구나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을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는 상황입니다. 비난의 빌미가 될 수 있었고, 가뜩이나 원만하지 않은 관계가 자칫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 수도 있었습니다. ​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향후 일정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당시 에베소에 있던 바울은, 거기서 오순절을 지내고 가겠다고 했지요. 오순절이면 딱 지금, 요즘 시기입니다. 오늘이 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니까요, 오순절은 대표적인 봄의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에베소에서 봄을 지내고, 여름과 가을에는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서 겨울을 나고,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걸 이미 고린도전서 말미에 써서 보낸 상태이지요. 그런데 그 계획이 틀어졌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편지와는 달리 곧장 고린도로 건너가서, 그곳에 잠깐 머물다 바로 되돌아왔습니다. 아마 당시 바울을 향한 극심한 비난 중에는 이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겨울에나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들을 책망하고 근심하게 했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그때 바울이 생각한 수정된 일정은 오늘 본문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일단 고린도로 먼저 갔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다시 고린도로 되돌아와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마저도 틀어지게 되지요. 그러한 방문 이후에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지 못하고, 곧장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다시 마게도냐로 건너와 있지요. 어떻게 보면 맨 처음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한 일정으로 되돌아간 셈입니다. ​ 상황이 이렇다보니 고린도교회로서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고린도교회를 너무 쉽게, 가볍게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요. 누가 만나자고 하면서 약속시간을 먼저 제안했는데, 본인이 정한 그 약속을 두 번이나 일방적으로 변경한다면, 절대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나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물론 그 사람의 평소 성품도 다시 보게 될 수밖에 없지요. 고린도교회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그냥 사적인 약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교회를 섬기는 일이고, 그리고 구제 예물을 통해 예루살렘을 돕는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러니 바울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느꼈지요. 그는 신뢰하기 어려운 경솔한 사람이요,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요, 제멋대로 교회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물론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는 다만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고, 그래서 급히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바울은 평범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극도의 고난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있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의 손을 피해가며 어렵게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본래 선교의 현장은 변수가 너무나 많지요. 청년들과 함께 단기선교를 가보면, 처음에 선교사님과 합의된 일정이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불법이어서 감시를 받는 경우는 더하지요. 아침 계획 다르고 오후 계획 다릅니다. 문제는 이런 걸 바울이 제때에 소통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슨 전화나 메일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을 보내서 설명하는 방법뿐인데,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칫 서로에 대한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통의 편지를 써서, 신뢰할만한 사람을 통해 고린도로 보내는데요, 오늘 고린도후서에서도, 편지의 시작부터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갑니다. 이 오해를 풀지 못하는 한, 지금부터 기록하는 모든 내용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사도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 해명을 기록하고 있는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좀 난해하고, 다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 자신이 계획을 변경했는지, 그 정확한 이유와 원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게 중요한 상황인데, 사도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18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 하나님은 미쁘시고, ‘예’ 하고 ‘아니라’ 함은 되지 않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왜 이 부분에 나와야 하는지, 쉽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차라리 그 부분은 빼고, 12절부터 14절, 그 다음에 곧바로 23절로 이어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진행입니다. … 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나는 이 소중한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할 수 있는데, 나는 너희를 아끼는 마음에 그리 한 것이다. 나는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인데, 나의 지난번 방문으로 인해 너희를 이미 한 번 근심하게 했으니, 같은 문제로 다시 너희를 책망하고 싶지는 않다. 너희가 스스로 돌이키고, 상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나는 갈 테니, 그땐 우리가 기쁨 가운데 만나자. …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그 난해한 중간 부분을 제외한 본문의 내용인데요, 어느 정도는 이해가 그런 설명 아니겠습니까? ​ 그런데 바울은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18절부터 22절의 난해한 내용을 덧붙인 것인데요, 실은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아멘) … 어떤가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들이 잘 이해가 되시는지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과연 이걸 잘 이해하고 오해를 풀게 됐을까요? 도대체 바울은 왜 이런 내용을 중간에 삽입해서 자신의 의도를 해명했을까요? ​ 여기 이 부분의 핵심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18절에 ‘미쁘시다’ 하는 말이 ‘신실하다’라는 말의 옛말이지요(Re). 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고,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멘’으로 화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또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십니까? 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과 온 인류에게 하셨던 모든 구원의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셨지요. 구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우리에게 약속하셨지요. 주님의 다시 오심과 하나님나라를 약속하셨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도장처럼,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성령을 부어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이번에도 ‘예’가 되고, ‘아니요’ 되지 않는, 신실한 약속이 될 것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 알 수 있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 가운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아멘. … 또한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서, 그 안에서 함께 자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서로의 관계를 확증하는 분 또한 성령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러니 그 신실하신 성령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의지합시다.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서로를 바라본다면, 미쁘신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관계를 온전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날, 서로에게 자랑이 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 모두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 사도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관계 또한 그렇게 서로의 자랑이 되도록,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을 믿습니다. ​ 이러한 말씀을 통해 사도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울 자신이 결정한 모든 일이 바로 그 성령의 인도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게 된 것도, 또 가지 못하게 된 것도, 어떤 인간적인 의지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모든 것을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성령님이라는 것을, 바울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어떤 인격이나 성품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을 그들 가운데 보내셔서, 복음, 곧 성취된 약속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 지금도 바울 안에서 모든 것을 인도하고 계신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에, 바울 자신을 신뢰해달라는 것입니다. … 여기엔 당연히 바울 자신은 지금도 그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지요. 그래서 이것은 어찌 보면 참 대범하고, 자칫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그런 변론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자신을 변호하는 변명처럼 들릴 수 있고, 그래서 더는 아무도 이 문제로 자신을 비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입막음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바울도 그걸 모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내용보다는, 자신의 현실적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고, 계획을 변경한 것이 얼마나 불가피한 일이었는가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신의 신실함을 증명해줄 다른 사람들, 디도나 디모데 같은 사람들의 증언을 말해도 될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자신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인도하셔서, 친히 완성해 가시는, 그 성령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자고, 사도는 고집스럽게 강조합니다. ​ 바울의 이런 담대함과 무모함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해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선은 바울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해왔고, 그 결과가 바로 고린도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매순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여기까지 한 발, 한 발, 복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의지만으로 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고 인도하셔서 이루신 일을, 바울은 뼈저리게 경험해 왔지요. … 그가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마게도냐 땅도 그에게는 그런 곳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 바로 마게도냐와 고린도이지요. 아시는 것처럼, 바울은 본래 그리스 땅, 유럽으로 넘어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게도냐도 고린도도 계획에 없던 곳입니다. 사실 바울은 소아시아 선교에 매진하려고 했지요.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고, 넘치는 열매가 있어서, 그 열매들을 잘 거두는 게 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아시아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직접 막아서셨고, 결국 바울은 원래의 모든 계획을 바꾸어 바다 건너 유럽으로, 마게도냐로 넘어왔습니다. 당시 바울 곁에서 함께 사역했던 누가는 그 때의 일을 기록하기를,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고 썼습니다(행 16:7). 하나님은 바울에게 환상까지 보여주시지요.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자기에게로 오라고,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좀 도와달라고, 바울에게 간청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더는 고민하지 않고, 바울이 이내 모든 계획을 수정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10) 고백하면서, 마게도냐로 떠나기 위해 곧바로 힘썼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고린도는 그렇게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 자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탄생한 주님의 몸이, 바로 고린도교회였던 것입니다. ​ 이제 바울은 다시 한 번 마게도냐에서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바라봅니다. 비록 많은 것이 틀어지고 엉켜져버렸지만, 이 일을 시작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모든 ‘아니요’를 ‘예’로 완성하시는 하나님, 지금껏 자신을 그렇게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울은 이번에도 담대히 신뢰합니다. …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뜻마저 주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 지금 당장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의연할 수 있습니다. 그게 성도의 특권이지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했기에, 결과 앞에서도 담대한 것입니다. 과정은 내 뜻대로 하면서 결과만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두려움에 빠지고 낙심합니다. ​ 지금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육체를 따라, 자기 지혜를 따라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성실하게 그것을 분별해가며 걸어왔습니다. 바울은 그게 자신의 자랑이라고 12절에서 고백하지요. 참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의 뜻을 좇아 결정하고 순종하며 걸어온 삶, 그게 바울의 자랑이랍니다. 뭔가 우리의 자랑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내가 좋은 결과를 거두었느냐, 그게 자랑이 아니라, 내가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주님께 묻고, 듣고, 주님과 동행하여 걸어온 그 인생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울은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자랑이지요. 그게 자랑이지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예’를 선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그러면서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지만,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될 것이다.” … 비록 지금은 서로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이해하지만, 그래서 오해도 있고, 갈등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의 날에는 서로가 서로의 자랑이라는 걸 확인하게 될 거라고 사도는 확신합니다. 이 또한 놀라운 고백이지요. 주님이 오셔서, 감춰진 모든 것들이 환히 드러날 때, 부분적으로 알던 것을 전체로 알게 될 때, 사람의 모든 동기와 목적이 밝히 드러나게 될 때, 바로 그때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한 자랑이 될 거라고, 바울은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는데, 그때 가서 부끄러워질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사랑하고자 노력한다면, 도리어 주님의 날 서로가 서로의 온전한 자랑이 될 거라고, 그 푯대를 향해 함께 걸어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관계도 그리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의 지혜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고, 더 온전히 주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자랑이 되는 믿음의 벗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바울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하자고 담대히 말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바울은 뭔가 해명하기 급급한 모습은 아닙니다. 자신의 본심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곡해할까 그리 조급해하지도 않습니다. 확신에 차 있고,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요. 소통과 관계가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근거는, 바울이 그들을 정말 온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절이지요.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바울을 더욱 담대히 만든 겁니다. … 온전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쫓아버린다고 성경은 말씀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담대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지요. 다만 잠잠히 기다리며, 변함없이 자신을 내어줄 따름입니다. 사랑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에게 유익이 되는 그것만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를 단순하게, 또 자유롭게 만들지요. 여러분, 그 온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이런 사랑이 24절에서는 이렇게 고백됩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담긴 결정적인 고백이지요. ‘그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그 기쁨을 돕는 자 되는 것,’ 그것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가진 바울의 진심이며, 그 사역의 대원칙입니다. 주관하는 자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기쁨을 돕는 자 되는 것, 여러분, 우리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기쁨을 돕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진실하고 담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없이 겸손하지요. 남을 주관하려 하지 않고, 다만 그를 돕고자 합니다. 그의 기쁨을 돕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 사실 우리는 사랑을 핑계 삼아 남을 주관하려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에 대해서도, 아내나 남편에 대해서도, … 그를 돕고 그를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주관하고, 그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바라곤 합니다. 사랑을 하면서까지도 우리는 교만해지기가 얼마나 쉬운 일인지, 우리의 또 다른 연약함입니다. ​ 본래 이 ‘주관하다’라는 동사(퀴리에우오)는 ‘주(님)’라는 명사 ‘퀴리오스’에서 온 말입니다. 주관한다는 것은, 내가 주인 노릇한다는 거지요. 사랑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 15:11). 바울도 그 주님의 본을 따릅니다. 비록 자신이 복음을 전하여 세운 자녀 같은 고린도교회지만,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들보다 훨씬 더 힘 있고, 지식도 있지만, 그는 다만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만족했습니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주인 노릇을 멈추고, 다만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실력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남을 주관하느냐, 내가 얼마나 남들 앞에서 중요한 사람, 힘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느냐, 그게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의 기쁨이 조금이라도 충만해졌다면, 그걸 돕는 자가 되었다면, 그게 우리의 실력이요, 자랑임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을 돕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믿고, 그를 주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는 사랑,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 안에 있어, 우리 모두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말씀을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관계, 소통, 이런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일 겁니다. 이 문제를 쉽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걸 보면, 우리 인생의 가장 어려운 기출문제 같은 것이 바로 이 관계, 소통의 문제 아닌가 싶습니다. … 이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세상과는 다른 해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서로를 대하라,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범사에 경건하라, 남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기쁨을 돕는 것으로,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라, 권면합니다. 그러면 서로의 자랑이 될 거라고, 지금뿐만 아니라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주의 날에,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자랑이 될 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그와 같은 믿음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 주의 날을 함께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 오늘 이 본문으로 바울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오해가 다 풀렸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남은 건 바울이 얼마나 진실한 모습으로 이 고백 안에 담긴 진정성을 몸으로 보여주느냐 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의 모습도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때론 대화로, 때론 편지로, … 때로는 그보다 더 오랜 인내와 섬김으로, 그렇게 신실하게 서로의 기쁨을 돕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 그래서 오롯이 서로의 자랑이 되는, 그런 복 된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