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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2021년 5월 23일 주일 설교)
2021-05-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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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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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1~11, 모든 위로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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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 본문 3절의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고린도전서에 이어서 고린도후서를 곧바로 강해하게 되는데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린도후서가 기록된 배경과 맥락에 대해 먼저 간단하게 살펴보고, 그 후에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 앞서 고린도전서를 쓸 때만 해도 바울은, 지금 머물고 있는 에베소에서,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역으로, 그러니까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교회가 있는 지금의 그리스 북부 지역을 돌아보고 그 후에 (그리스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거기서 겨울을 지내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이미 밝혔던 내용이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바울은 이 계획을 변경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고린도로 건너간 것인데요, 그렇게 거기서 약 3개월 정도를 지내게 됩니다. 아마도 고린도전서를 통한 여러 권면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아간 고린도에서, 바울은 더욱 충격적인 사건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 중 일부, 특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매우 극심한 공격과 모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2:5~11, 7:12).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체험과 믿음을 자랑하면서, 대놓고 바울의 사도적 지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다른 사도들과 바울을 비교했고, 그들에 비해 바울의 언변이 약하다느니, 그 외양이 변변치 못하다느니 하며 바울을 폄하했고, 그런 이유로 교회들의 인정도 받지 못하여 스스로 일하면서 선교비를 충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사건건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매듭 짓지 못한 채, 급히 다시 에베소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으로 인해 교회가 더욱 분열되고 또 혼란에 빠지는 상황은 피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 결국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이제 다시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써서, 문제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디도를 통해, 고린도로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7장에 나오는 이른바 ‘근심의 편지,’ ‘눈물의 편지’라는 서신입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편지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빠져 있는 서신이지요. 당연히 바울은 이 편지에 대한 고린도교회의 반응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디도가 답장을 가지고 오기도 전에, 바울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에베소를 떠나, 말씀드린 마게도냐까지 먼저 가서, 거기서 디도를 기다려 만나게 됩니다. 천만다행으로 디도가 가져온 소식은, 바울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바울을 대신해서 갔던 디도를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영접했고, 그의 권면에 순종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야 바울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고, 그런 고린도교회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되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바로 이 고린도후서를 써서, 다시 한 번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게 됩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어려운 일들이 계속 이어졌고, 그래서 마치 아픈 손가락처럼, 늘 마음 한 견을 에이게 만드는, 그런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사실 당시 바울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환난’이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요, 바울은 특별히 에베소에 있으면서,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8절과 9절에 당시 바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같았다고 말하며,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회고합니다. 정말 모든 게 다 끝났구나, 이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막다른 골목까지 이르렀던 건데요, 그런 상황 속에서 고린도교회의 문제까지 최고조에 달했으니, 아무리 바울 사도라 해도 너무나 버거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는 그런 고난의 풀무 속에서 탄생한 말씀이고, 그래서인지 학자들은 이 고린도후서를, 그의 많은 편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신으로 꼽기도 합니다.
본래 바울 사도와 고난은, 애초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여러 번 갇혀 성경의 많은 편지들을 옥에서 썼지요. 그러면서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습니다(고후 11:23~27). 매도 정말 수없이 맞았지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또 다른 세 번은 채찍으로 맞고, 또 한 번은 돌로도 맞았습니다. 그가 타고 가던 배가 부서진 경우도 세 번이나 있었고, 그 중에는 일주일 동안 망망대해 위를 표류한 적도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여정 가운데, 늘 춥고 배고팠고, 때마다 강도와 테러의 위협에도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절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했던 결사대까지 조직되어 그를 뒤쫓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바울은 스스로 일하여 돈을 벌어가며 복음을 전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곡해했고 미워했고 비난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개척하여 세운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 중에 한두 사람만 나를 미워해도 삶이 지옥 같은데, 어떻게 그런 고난들을 다 감내하며 복음을 전했는지 그 심정을 우리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 더구나 바울은, 당시로는 고칠 수 없었던 육체의 질병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가시’요,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지요.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몸속 깊이 박혀 있는 그 가시를 좀 빼내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마저도 들어주지 않으셨고, 바울은 평생 그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있다고 했던 그의 고백이, 절대 과장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면서도, 바울은 그런 고난과 환난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편지 서두에서 인사를 건넨 후에 곧바로 그 이야기이지요. 환난과 고난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 형식이 놀랍습니다. 3절 맨 앞에 나오는 구절, ‘찬송하리로다’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고백 속에 고난을 담은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 자신을 위로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바울은 이번 편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찬송을 통해, 자신이 고난 속에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지요. 자신에게 왜 그런 고난이 있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 고난의 결과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는데요, … 바울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하나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가지 내용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려고 하는데요, … 먼저 자기 자신의 신앙과 사역의 관점에서, 바울은 그 모든 고난을 통해 어떤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됐다고 이야기합니까? 9절 말씀인데요,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자막).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아멘.
바울은, 이제 나는 죽는구나, 모든 게 다 끝났구나, 싶은 그 막다른 골목에서,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그 전까지는 바울 사도가 어떠했다는 것입니까? 네, 그도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못했다는 것이겠지요. 또한 자신이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을, 이전까지는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 극심한 환난 속에서, 비로소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됐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이지요. 바울 사도 같은 분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어떤 부분이었는지, 어느 측면에서 바울이 자기 자신을 의지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우리도 으레 그렇듯, 나의 지식이나 경험, 또 복음에 대한 나의 열정이나 자기 열심, 또 ‘자기 의’와 같은, 그런 여러 가지 인간적인 부분들을 바울도 의지하고 또 자랑했던 것일 겁니다. …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니겠지요. 하나님도 의지하지만, 다만 사람도 의지하고, 또 어떤 물질의 힘도 의지하면서,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 실제로 바울은, 말씀드린 그 육체의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허락하셨다, 고백하기도 했지요. 우리는 얼마나 쉽게 교만해지고, 또 얼마나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 정말 내 힘으로 안 되는 어떤 문제나 고난을 마주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 부인(否認)’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고난은 그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님 말씀을 지킨다고 시편 기자가 고백했지요(시 119:67). 우리도 마찬가질 겁니다. 고난 없이 죄를 떠나고, 고난 없이 믿음이 자라고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 어떻게 순종을 배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고, 히브리서 말씀에 나오지요(히 5:8). 정말 충격적인 말씀이고, 또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면, 우리도 결국 그렇게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 실제로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고난을 당해야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고난이 있어야 우리는 어쩔 수 없이라도 기도하지요. 그토록 끊어지지 않던 죄의 습관들도, 우리 몸에 고난이 시작되면 그땐 알아서 그것들을 멀리하게 되지요. 몸이 아프면 술도 안 먹고, 담배도 끊고, 하지 말라 해도 운동을 시작합니다. … 여러분, 집 나간 탕자가 언제 아버지 생각을 합니까? 자신의 모든 자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배가 고파지니까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돼지가 먹는 사료도 없어 굶어죽게 돼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리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 내 힘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해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코 온전한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바울도, 예수님도 결국 그렇게 순종을 배웠고, 그렇게 고난을 통해 하나님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 모두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든 고난을 통해서라도 잘 배우는 것이고, 또 한 번 겪은 그 고난을 아끼는 일입니다. 고난을 아낀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고난을 통해 얻은 믿음과 순종을 잘 간직하고 사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 여러분, 우리는 고난 없는 삶을 기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가 우리더러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게 복음의 내용 아닙니까? …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는 메시아는 고난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 자체가 그들에게는 모순이요, 걸림돌(스캔들)입니다.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바울의 고난을 보라, 저게 어떻게 사도일 수 있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주장에 대한 반론이지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고난의 의미가 이런 것이다, 이게 고린도후서와 모든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고난을 피해가거나 고난을 없애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우리 앞에 있고,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그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셔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절망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온전한 승리를 창조해내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 고난도, 죽음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며, 또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망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고, 우리는 그 현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 아님을 믿는 사람들이지요. 사망이 아무리 힘을 쓰고 용을 써봐야, 결국 다 헛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결국 부활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까? 고난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부활과 승리는 더 분명한 우리의 현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망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면, 생명은 더 온전히 역사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죽음을 깨뜨리신 하나님, 고난을 통해 더 큰 위로와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남자답게 강건하게 하셔서 넉넉히 이기는 자로 세우시는 하나님, 그가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주 되심을 믿으시고, 부디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극심한 고난을 통해 바울이 깨달은 두 번째 진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적 차원에 있어서 고난이 가진 의미에 대한 것인데요, 오늘 본문 4절 말씀, 함께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아멘.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겪는 고난이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유의미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그저 나만의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위로로, ‘우리 모두’의 위로로 충만해진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우리’입니다. 심지어 6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바로 고린도교회를 위해서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고, 자신이 먼저 그런 고난을 당하는 거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왜 이렇게 큰 고난이 있는가, 알고 봤더니, 자신이 받은 위로와 은혜로, 여러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참 놀라운 고백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이 겪어본 만큼만 남을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감내한 고난만큼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남을 위로할 수 없고, 심지어 남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노숙자나 어떤 중독에 빠진 분들을 볼 때, 우리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판단하지요.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의문을 가질 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직접 겪어보고, 그 상황이 되어봐야만 우리는 그제야 ‘이해’라는 걸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 이래서 그랬던 거구나. … 그 마음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한 거구나.’ 우리는 뒤늦게 이해하게 됩니다. … 예수님께서 왜 굳이 인간의 육체로 이 땅에 오셔야 했을까, 생각해보면 거기에 답이 있지요. 정말 우리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고 체휼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이, 주님의 성육신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직접 만드신 하나님이신데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겠지요. 우리의 고난, 아픔, 다 아실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온전한 위로는 거기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아는 것과,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어, 우리의 연약함을 실제로 ‘경험’하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체휼하시기 원하셨고, 우리를 이해하셔서, 온전히 위로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신의 고난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지를 보게 됐습니다. 자신이 받은 고난과 위로를 통해, 비슷한 고난을 겪고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이 의도하거나 노력해서 그리 된 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자신을 고난당하는 사람들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하나님의 위로로 그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셨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고난 받는 자의 삶에서 샘솟아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는, 그런 물결 같은 것이라고 사도는 고백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 같은 처지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이, 여러분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분명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10년, 100년 공부한다고 남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걸로 위로가 되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많이 겪고, 많이 아파본 사람을 찾아갑니다. 스스로 겪어본 고난만큼 위로할 수 있고, 내가 감당해본 아픔만큼 우리는 남을 이해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 신학교를 함께 다니며 늘 함께 공부했던 제 친구 목사님 한 분이 주중에 너무나 힘든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둘째 딸이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간 겁니다. 그런데 여러 검사 끝에 나온 진단이, ‘루프스 병’이었고, 의사는 당장 입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프스’라는 이름이 낯설어 찾아보니까, 면역계에 문제가 생겨서, 몸의 여러 장기에 면역 반응이 일어나 염증이 생기는, 그런 질병이라고 합니다. 완치는 어렵지만, 약물을 사용하여 잘 관리하면, 10년 생존율이 90% 이상은 되는, 그런 병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입원하여 치료를 계속 받는데도, 도무지 차도가 없는 겁니다.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고, 아이의 여러 장기에 다발적으로 염증이 생기더니, 그냥 그렇게 속절없이, 주님 품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증상이 나타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이 저희 동기 목사들 단톡방에 전해졌는데, 그 누구도,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작은 일에도 서로 나누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동기 목사들이지만, 이번엔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다 침묵이고, 눈물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도대체 누가 감히 ‘위로’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녀를 낳아서 길러본 적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은 위로는커녕, 죽었다 깨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일이지요. 저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위로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목사라 해도, 제가 하는 여러 권면의 말이나 위로의 말이 여러분에게 별로 공감되지 않으실 때가 있을 겁니다. 스스로 겪어보지도 않은 걸 주제넘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보나마나겠지요. 고난을 겪고, 그걸 견뎌낸 경험이 없다면, 거기서 마주한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목사인 저의 위로도 여러분에게 별로 힘이 없을 것입니다. … 그래서 제가 아는 많은 목사님들이, 당신들이 겪은 질병이나 고난을 그토록 하나님께 감사히 여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께서 그런 말 하신 게 기억납니다. 이분은 오래 전에 대장암 판정을 받아서 대장의 상당부분을 잘라내고, 힘든 항암치료 끝에 겨우 완치 판정을 받아 지금도 사역을 이어가고 계신데요, 그때 받은 은혜와 위로가 지금 사역하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늘 고백합니다. 아픈 성도들, 암에 걸린 성도들 찾아가서, 뭐 다른 이야기 없이, 그냥 손만 잡아도,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없다는 거지요. 그 어떤 설교나 기도보다 그냥 그 목사님의 존재 자체가 위로이고 소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농담 삼아 늘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나는 정말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고 말이지요. … 여러분, 우리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실제적인 위로로 다가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겪고 이겨낸 고난이 그만큼 일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명을 위로하고, 그 생명을 다시 일으키는 힘은, 오직 고난을 이겨낸 생명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또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7절 말씀인데요, 너희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한데, 그것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참여하는 자 될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겪는 고난과 위로는 어쩌면 숙명 같은 것이어서, 우리가 주님과 무관한 자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역시 주님이 걸었던 그 길을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물론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고난을 기쁘게 반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받은 고난을 통해 남을 위로하는, 제사장의 이 부르심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소명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섬기는 목사로서, 저는 솔직히 우리 성도들이, 그냥 다른 사람 위로하지 않고 살아도 좋으니, 아무 고난 없이,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 평안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매일 정말 기도합니다. 하나님 고난을 통해서가 아니라, 축복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게 우리 뜻대로, 우리 생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주님 말씀하시지요. 주님께 해당됐던 일들이, 사도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주님께 보냄 받은 오늘 저와 여러분만 피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 그러니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단지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일 수만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신다고 하셨으니까, 비록 고난을 당하더라도, 견디고 이기게 하셔서, 정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하고, 주의 복음이 증언되는 그런 승리의 고난이 되게 하시기를, 우리는 함께 바라고, 함께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서로를 위해 늘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강건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위로’를 뜻하는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본래 성령을 가리키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뜻일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부디 우리가 마주한 고난과 아픔 가운데, 성령의 위로가 충만하시기를, 그래서 그 고난을 능히 이겨내고, 더욱 견고한 소망에 이르게 되시기를 다시 한 번 간절히 축복합니다. … 바울 사도는,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중에 매스컴을 통해 그런 발표를 봤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OECD 국가 국민들보다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나 행복하다고 느끼냐?’는 질문에 한국인들은 10점 만점에 5.8점을 줬다고 합니다. 전체 OECD 서른일곱개 국가 중에 서른두 번째입니다(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왜 행복하지 않은가 봤더니, 돈이 없어서는 아니랍니다. 경제 규모도 세계 10위이고, 1인당 GDP는, 구매력 기준으로만 본다면 일본보다도 더 우위에 있답니다. 돈을 더 벌고, 더 많이 소비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난과 어려움은 많은데, 위로는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그런 ‘아픈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이를 위로하는 제사장의 삶, 성도의 삶을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내사, 세상을 위로하고, 그들이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귀한 일들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저 고난을 두려워하고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답게, 남자답게 강건하여,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더 많은 이들을 능히 위로하는, 그런 복 된 삶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