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2021년 5월 9일 주일 설교)
2021-05-0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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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6:13~2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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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36) 본문 13절의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는 부분인데요, 그런데 바울 사도는 여기서도 그냥 평범하게 좋은 말로 인사하며 적당히 끝낼 마음은 없어 보입니다. 여러 가지 명령형 동사들이 잇달아 보이고, 거기에 담겨 있는 바울의 간절한 심정도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본문 말미(22절)에서는, ‘저주’라는 단어를 친필로 써가면서까지, 계속 긴장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귀담아 들을 것을 강조하기도 하는데요,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그래서 어떻게든 영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도의 마음이, 오늘 여기까지 잘 느껴집니다.
본문을 시작하는 13절과 14절에는, 총 다섯 개의 명령형 동사가 나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조금 애매해져서 네 개로 나오는데요, 사실은 다섯 가지 명령입니다. 13절에 네 개의 동사가 있는데, 깨어라, 믿음 안에 굳게 서라, … 그리고 ‘남자답게’ 역시 동사입니다. ‘용기 있게, 어른답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표현은, 본래 두 개의 동사인데, 그걸 마치 하나처럼 옮긴, 다소 의역이 많이 된 표현입니다. 원래는 ‘용기 있게 어른답게 행동하라’는 동사 하나와, ‘강건해라’는 또 하나의 동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하나의 동사가 추가되어서, 이렇게 13, 14절에 걸쳐 다섯 개의 명령형이 연이어 등장하는데요, 중간에 접속사도 없이 계속 이어져 나오면서, 이렇게 고린도교회를 향한 마지막 권면이 숨 가쁘게 진행됩니다.
사실 제가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만 해도, 저는 그냥 여러 가지 당부를 이렇게 나열한 보였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것이 단순한 열거가 아니라, 고린도교회의 신앙적 회복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순서이고,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많은 권면들이 이 편지에 기록되어 있었지요. 13, 14절은 바로 그런 권면들을 정리하는, 일종의 결론적인 당부인 셈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지금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견고해지기 위해서(1:8), 그들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사도는 이 다섯 가지 명령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하는 데 있어서, 이 말씀을 꼭 기억하고 적용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나 우리의 신앙이 어떤 위기를 맞게 되거나, 또 이유 없이 침체를 겪게 됐을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혹은 뭔가 새로운 신앙의 전기를 마련해서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자 할 때, 특별히 그럴 때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와 메시지를 잘 기억하고, 삶으로 고백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제일 먼저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13절은, ‘깨어’라는 말로 시작하지요.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사실 ‘깨어 있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잠자지 않고, 술 취하지 않고, 온전히 깨어 있는 삶, 정신을 차리고 지금 내 모습과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는 삶, 또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내 삶 가까이 다가 와 있는 종말과 하나님나라를 의식하는 삶, … 네, 그런 게 깨어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결국 모든 신앙의 변화가 여기서부터, 깨어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깨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어떤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고, 당연히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지금 깨어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만 그런 노력을 하는 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다 깨어 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습관대로, 삶의 관성대로 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계발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있고, “내가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면 계란 프라이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늘 깨어 있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그렇게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성도의 깨어 있음은 이런 것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단순히 깨어 있어야지, 하는 그런 인식과 어떤 노력만으로는, 우리가 결코 깨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성도들이 스스로 깨어 있다고 착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하거니와, 또 깨어 있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깨어 있어야지!’ 하는 생각과 결단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걸 모르고, 그런 상태가 이미 깨어 있는 거라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정말 평생 잠자는 성도로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기 어려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인내 때문인데요, … 부모가 잠자는 자녀를 깨우듯,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일깨워주시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어떤 이상한 두려움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요, 그건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하거나, 또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곧바로 벌을 내리시고, 그래서 나를 정신 차리게 만드실 거라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전혀 근거 없는, 잘못된 두려움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더디게 징계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못 했을 때, 또 잘못된 길로 계속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곧바로 징계하시던가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 전에 수많은 말씀과 권면으로, 사람을 통해서나 다른 통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권면해 주시지요. 곧장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뭐 만신창이가 됐을 것입니다. 내가 징계를 받았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참다못해 그리 하신 것으로 아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너무나 무서운 일이지요. 자칫 계속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징계하실까봐 두려운 게 아닙니다. 징계하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셔서, 깨어 있지 못하고, 결국 그 죄의 결과로 스스로 멸망하게 되는, 그것이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고린도교회도 결국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강하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습니다만, 이걸로도 안 돼서 직접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지요. 사실 그들은 스스로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놀라운 은사가 나타나고, 뭔가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은 매우 안일했습니다. 그들 안에 존재하는 죄들을 죄라고 인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음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책망하거나 쫓아내지 않았고, 공동체는 사분오열되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기 바빴습니다. 성도 간의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세상 법정까지 끌고 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다투었습니다. 성만찬 식사 자리에서조차, 다들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상황이 그러한데도 그들은 깨어 있다고 스스로 착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게 인간이고, 우리의 연약함이지요. 사람은, 자기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연약함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스스로 더 착각합니다. 내가 깨어 있다고 오해하지요. 남의 잘못을 분별하여 정죄하는 일은, 내가 깨어 있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보통 그 일을 통해 나는 괜찮고, 내가 온전히 깨어 있다는 착각을 합니다. 참 무서운 일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역시 같은 조건에서,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내가 내 힘으로는 절대 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부터가, 성도가 잠에서 깨는 길입니다. 수시로 잠들어 있다고 여기면 그나마 안전합니다. … 물론 그런 ‘생각’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자각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온전히 분별할 수 없고, 내 모습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단독으로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과 늘 짝을 이루어 함께 나오는 권면이 무엇입니까? 네, ‘기도하라’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지요. … 성도가 깨어 있다는 것은, 깨어 있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그렇게 깨어 있으셨습니다. 기도로, 습관적인 기도로, 깨어 있으셨지요. 그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가 우리를 일깨워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도, 어떤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다거나, 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에는, 그건 사실 별로 깨어 있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의 계기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은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의 관심이 오직 그 문제 해결에만 매몰되어 있지, 우리의 영혼과 신앙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우리는 잠깐 정신을 차리나 싶지만, 실은 그게 더 위험하지요. 스스로는 내가 깨어 있었다고 착각할 것인데, 그 문제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기도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더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 골로새서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 기도에 힘을 쓰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지요. 기도를 하되,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감사로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하다는 고백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정신을 차리게 되고, 뭔가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에 항상 힘쓰되, 감사하는 기도로, 깨어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감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에게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 어떤 다른 방법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좋은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무슨 신앙의 교제를 통해서 여러분이 깨어 있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셔야 합니다. 단 1분이라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여러분 자신이 감사의 기도를 하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그것이 여러분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도록, 결단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우리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결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깨어 있어야, 뭐가 됐든 그 다음의 것들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감사의 기도로 늘 깨어서,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온전히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복 된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사도가 권면하는 것은,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믿음에 굳게 서라.” 사실 바울은 평소에도, 이렇게 굳게 서는 것에 대해 많이 강조합니다. 15장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요, 15장 마지막 절(58절)에 보면,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즉) 믿음에 굳게 서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합니다. …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성경에서 굳게 선다는 것은, 그 다음 어떤 중요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삶에서도 뭔가를 하려면 일단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하고, 그 다음엔 일어나, 서는 게 먼저지요. 일단 자기 발로 서야, 자립이 되어야, 무슨 일이든 시작하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불러 어떤 사명을 맡기실 때, 항상 먼저 하시는 말씀이, 똑바로 서라는 명령이지요. 파라오 앞에 서라(출 8:20 등), 반석 위에 서라(출 33:21), 너의 발로 일어서라(단 10:11), 명령하시고, 그 후에 어떤 일을 맡기십니다. 일단 자신이 똑바로 서 있어야 뭐든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대로 서지도 못한 상태에서 남을 세우려 하다가는, 자칫 둘 다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굳게 선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이제 뭔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스스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내가 감사의 기도로 깨어 있게 됐다면, 그가 바라봐야 할 새로운 신앙적 목표는, 굳게 서는 것입니다. 비록 깨어 있다 하더라도 굳게 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꾸만 흔들리고, 다시 주저앉게 되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 굳게 서는, 그 믿음의 목표를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주 흔들리고, 비틀거리다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살아갈 때도 많습니다. … 그런데 사실 이건 어떻게 보면,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 우리가 정말 제대로 깨어 있고,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직면하게 됐다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인지, 그에 비해 죄와 사망의 권세는 얼마나 강력한 권세인지,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자신을 온전히 발견한 사람은, 그렇게 함부로 용기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그냥 굳게 서는 게 아니라, ‘믿음에’ 굳게 서라고 말씀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 이 부분은 원문을 읽어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엔 “믿음 ‘안에’ 굳게 서라.”고 나옵니다. ‘믿음 안에’, 마치 땅속 깊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서 있는 나무처럼, 그렇게 믿음 안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면, ‘믿음’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테]가 붙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테 피스테이].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믿음 안에 굳게 서라.”가 됩니다.
여러분, 그냥 ‘믿음 안에 굳게 서라’가 아니라 ‘그 믿음 안에 굳게 서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그냥 막연한 어떤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앞에서 이미 한 번 언급된, 그래서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그런 믿음이라는 뜻이겠지요. 고린도전서에 ‘믿음’이라는 말이 어떤 맥락,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저는 다시 일일이 찾아봤습니다만(고전 2:1~5, 15:14~17 등),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알고 있습니다.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주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가 우리의 주로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사도는 바로 ‘그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말합니다. 깨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거나 또는 교만해지지지 말고, 또 주변 세상을 돌아보며 그 검은 파도에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굳게 서라는 이 말을 처음 들어보신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참 뻔하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렇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 우리의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금방 알게 됩니다.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감당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가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우리의 삶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언제나 내 힘과 내 능력에 집중하여 살아가고,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위에 세워져가고 있다고 느껴지시는지요?
어떤 관계에 근거해 있는 삶을, 우리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관계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에 들 때까지, 모든 삶이 그 관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렇게 해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상대방에 대한 관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 관계를 기초로, 그의 삶이 새롭게 세워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성도의 삶은 결국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그 관심이 집중된 삶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덧붙인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렇게 주님께 온전히 붙어있는 삶입니다.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 내 능력으로 내 열매를 맺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붙어 있고자, 주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고자, 거기에 마음을 쏟고,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내 삶을 온전히 그분에게 내어맡기는 것, 그것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신 분은 그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어떻게 그분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가, 질문하실 텐데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7, 10)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 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풀어서 설명해주십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여, 주님에 대한 믿음 위에 굳게 선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의 삶에 머물러 계시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지금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신지를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지금 우리가 과연 믿음에 굳게 서 있는지, 확인이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십니까? … 혹시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고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세상의 다른 가치관이나 가르침이나, 사람들의 여론이나, 혹은 여러분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은 아닙니까? … 여러분이 요즘 마음에 품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혹시 지난주 우리에게 주셨던 말씀이 지금도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 아마 생각처럼 그런 일들은 잘 안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 또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시지요(마 7:24). 단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믿음 안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문제는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할 말씀이 우리 안에 없다는 사실이지요. 말씀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은데,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 그저 세상의 소리뿐인데, 어떤 말씀에 순종을 하겠습니까? … 바울 사도는 다른 서신에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골 2:8). 그걸 다 무시하라는 게 아니라,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온 모든 학문과 지식이, 마치 배설물과 같다고 사도는 이야기하지요(빌 3:8). 여러분, 여러분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세상의 이야기들, 수많은 담론과 주장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면, 그것들은 그저 세상의 초등학문에 불과하다고 여러분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조금 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서,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그렇게 해도 흔들릴 일이 세상엔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일은 여러분보다 잘 모르는 목사이지만, 여러분이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가기에, 이 세상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 지는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 며칠 전 사모가 회사에서 퇴근하여 들어오면서, 눈물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정말 너무 힘들다. 도대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지?” 그러고는 한참을 제게 기대어 울었습니다. … 그런 세상살이를 우리의 신앙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말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말고, 거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채우게 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말씀도 우리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우리로 불필요한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도록 붙잡아주시고, 다시 일어서 골리앗 앞에 설 수 있는 그런 용기와 힘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을 오랜 시간 묵상하고, 꾸준히 공부해온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아는 말씀은 너무나 파편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직 우리가 깨닫고 간직해야 할 하나님 말씀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많이 바쁘시겠지만, 다시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여러분의 삶에 담아내시기 바랍니다. … 저는 요즘 순장님들과 함께 잠언 QT 본문을 필사하면서 읽고 있습니다만, 무슨 방법이든 꼭 다시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쓰든, 암송을 하든, 스터디를 만들어 함께 성경공부를 하든, 뭐라도 해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물게 되어, 믿음에 굳게 서서, 순종하고 열매 맺는 데까지 이르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말씀을 드리다 보니, 결국은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너무나 평범한 메시지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이 고린도전서의 결론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여기에 사도의 모든 권면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저랑 한 번 암송해 보십시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해봅시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번에는 한 번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할렐루야! 아멘. … 오늘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에 마음을 쏟아야 하는지 생각해봤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해서 남은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 한 주 꼭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가시기를,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담대히 행할 수 있는 그런 준비 태세를 갖추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