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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 (2021년 3월 28일 주일 설교)

2021-03-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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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려 주일 메시지 --------------------- 고린도전서 14:1~19,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 ​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cor30 .mp3 파일 다운로드 ​ ​ (고린도전서 강해 30) 본문 19절의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 사랑이 다른 모든 은사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말씀했던 사도는, 이제 고린도교회의 현실로 되돌아와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그 사랑을 추구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는 오늘 이 본문의 내용을 말하기 위해서, 사랑에 관한 긴 서론을 13장에서 이야기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13장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로 시작됐었지요. 고린도교회 안에 은사로 인해서 생긴 문제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방언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했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랑에 관한 메시지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을 매우 중요한 은사로 생각했습니다. 신령한 언어요, 천사의 말이라고 불렀는데요, 비단 고린도교회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초대교회가 다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시는 것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바로 이 방언의 은사와 함께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말세에 대해 예언했던 구약의 예언자들도 똑같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했던 칼날이 여전히 서슬 푸르게 그들을 노리고 있던 때에 말입니다. …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때 드디어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충만히 임하셨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갑자기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의 언어로, 한 번 들어보지도 못한 언어로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하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방언이라는 구체적인 현상과 함께 이루어졌고, 최초의 교회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 그러니 초대교회에서 방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 구원을 받았다,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방언이었습니다. 실제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나, 또 그것을 직접 옆에서 보고 들었던 사람들은, 성령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성령 받았다, 구원 받았다, 하는 확신이 부족했던 사람도, 방언을 하게 되면 일단 그런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방언은 참으로 귀한 은사이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너도나도 방언 받는 일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 성도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저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성령이 임재 하여 계신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그 분명한 외적 실체가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공적인 예배에서도 성도들이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오늘 저희는 이규복 집사님께서 기도를 인도해주셨는데요, 그런 기도도 방언으로 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향한 축복의 말이나 권면의 말, 또 찬송과 감사도 방언으로 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분명 그 어떤 예배보다도 성령의 임재에 대한 확신과 감격 속에 예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여기에는 불가피한 문제가 뒤따르게 되지요. 어떤 문제이겠습니까? … 네, 일단 무엇보다 답답한 거지요. 말을 알아들어야 은혜가 되든지 할 텐데, 그러질 못하니까, 다들 그냥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의 어느 교회나 성당의 예배에 참석한 느낌인 겁니다. 방언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방언은, 방언을 하는 사람도 그 뜻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방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은사인, 통역의 은사를 별도로 구해야 한다고 본문에서도 이야기합니다만 …, 이 말은 그런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그리 많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답답합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바울 사도가 16절에서 이야기하듯, 기도를 하고, 축복을 하는데 도대체 언제 ‘아멘’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멍 하니 있는 겁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고, 그래서 뭔가 신령한 것 같은 느낌은 있는데, 그게 그냥 느낌뿐이고, 실은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는 답답하고 소외된 상태가 되고 만 것입니다. ​ 그런데도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방언을 하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방언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방언을 구했습니다. 제가 청소년, 청년 시절을 모두 보냈던 교회에서도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방언을 받는 것이 목적인 그런 수련회를 가는 경우도 많았고, 소위 산기도도 정말 자주 갔습니다. 그런 데 다녀오면 꼭 몇 명이 방언을 받았느냐 하는 걸로 평가를 갈무리했습니다. 한 번 방언을 받은 사람들도 거기에 만족을 못하고, 새로운 방언을, 더 유창하게 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방언도 하나의 언어인지라, 계속 하다보면 말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유창해집니다. 그것이 나름의 성취감을 주고, 또 다른 사람들의 방언하는 모습도 계속 지켜보고 하면서, 다들 점점 더 방언을 잘하려고 애를 쓰게 된 겁니다. 물론 잘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요. 하지만 그러면서 점점 더 은사를 주신 목적에서 멀어지게 되고, 동시에 예배는 점점 더 무질서해져 갔다는 게 문제입니다. ​ 더구나 모든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한다고 다 주시는 게 아니지요. 방언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당연히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많은 성도들이 있었고, 그들은 필요 없는 소외감과 위축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남보다 어디가 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신앙이 잘못된 건 아닌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지요. …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저희 아버지의 방언을 들으며 자랐는데요, 처음엔 그런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듣는 게 신기하고 좋아서, 일부러 방언을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은사를 구해도 잘 안 주시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의 그 방언도 듣기 싫어지더라고요. 남도 다 알아듣게 그냥 우리말로 기도하시지 뭘 굳이 방언으로 하시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천사의 말이라고 했던 게 방언인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꽹과리 소리가 되고 마는 겁니다. ​ 고린도교회도 동일한 문제를 경험합니다. 단지 방언을 하는 사람만 기분이 좋을 뿐, 다른 사람들이나 전체 공동체에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은사가 풍성해질수록 분열과 반목이 더 심해지는 그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 사실 방언을 하면 좋은 점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긴 시간, 깊게 할 수 있습니다. 평소 5분, 10분 기도하는 것도 어렵던 사람이 한두 시간도 쉽게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것을 가리켜, 기도의 줄이 잡힌다고 했는데요, 기도에 온전히 집중하여 빠져들게 되면서, 보통의 기도보다, 힘은 훨씬 덜 들면서도, 뭔가 더 깊이 기도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이것이 정말 내가 기도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내 입술을 통해 기도하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간구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방언 기도를 오래 하다보면, 정말로 그 기도해야 할 것으로, 성령의 그 간구로, 지금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면 이런 유익은 결국 누구에게 좋은 것입니까? 네, 방언을 하는 본인에게 주로 유익합니다. 이상하지요. 본래 은사는 다른 이들의 유익,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 아니었습니까? 앞서 12장에서 이미 살펴본 내용입니다(12:7). “(은사를 통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이 ‘유익’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여러 사람의 이익’을 뜻하는 ‘심페론’이라는 명사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방언도 그런 유익을 위해 주신 은사임에 분명합니다. 본인은 물론, 다른 여러 사람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그곳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 가운데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느끼도록 주신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방언이라는 은사는, 쉽게 남보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게 만듭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오히려 공동체의 소통에 방해가 되고, 연합을 이루는 게 아니라 소외를 만듭니다. 결국 고린도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해져서, 사도가 편지를 써서, 공적인 예배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방언을 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받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습니다. ​ 여러분, 뭐가 문제인 것입니까? 어째서 신령한 하나님의 선물이,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까? 그 은사에 ‘사랑’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했던 말씀 그대로, 바로 그 사랑이 은사에서 빠졌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처럼, 사도는 사랑을 추구하라고 계속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권면합니다. 어떤 은사를 통해서든 사랑을 추구하되, 신령한 은사 중에서도 예언에 초점을 맞추는데요, 예언은 방언과 달리,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혹은 공동체를 향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 예언의 은사에 있어서 우리가 우선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부분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아서, 다른 사람을 위해, 그를 위로하고 권면하거나 일깨워주기 위해 대언하는, 그런 은사를 의미합니다. … ‘예언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동사가 [나바]인데요, 이 말은 본래 ‘미리 말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말을 맡았다’ 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게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예언’이라고 말할 때의 그 ‘예’ 자(字)는 실상, 미리 ‘예’(豫)자가 아니라, 맡을 ‘예’(預) 자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길 때, 예금(預金)하다, 예치(預置)하다, 그러는데요, 그때의 그 ‘예’자가 이런 의미이지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해주는 걸 뜻하고, 그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예언자라 불렀습니다. 물론 그런 말씀 중에는 미래에 대한 말씀도 있기 마련인데요, 그러나 그때 역시, 단지 점을 치듯 그렇게 미래를 알아맞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했을 때에 뒤따르는 어떤 결과를 강조하는, 그런 식의 말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이러한 예언의 은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공동체, 어느 성도에게나 무척 중요하고 꼭 필요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신앙의 열매를 맺는 거의 모든 일이, 그렇게 우리가 깨달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사실 당시 고린도교회 같은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예언의 은사가 특히 더 절실하고 중요했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어째서 그때는 이 예언의 은사가 더 더욱 필요했을까요? … 네, 분명한 예언의 말씀, 기록된 예언의 말씀, 다시 말해서 (신약)성경이 그들에게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상당 기간 동안 초대교회는 온전한 신약성경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사복음서는 물론이고 다른 신약성경 대부분이 아직 제대로 된 문서로 존재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저 성경의 기본재료가 되는 여러 말씀의 조각들이 두루마리에 필사되어 읽히거나, 사도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게 전부였습니다. 더구나 고린도교회는 이방인의 교회가 아닙니까?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도 턱없이 부족했지요.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전하는 예언의 은사가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방언이 아니라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고, 지금 그것이 이 공동체에 더 필요한 은사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 여러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예언의 은사는 방언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전제로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예언은 결국 남을 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구약의 예언자들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삶과 신앙, 또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관심이 없는, 그런 예언자를 보셨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예언자로 세워지지도 않을 겁니다. 백성들의 삶이 마치 나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고, 공동체의 운명이 마치 나의 운명인 양, 그렇게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었던 사람들, 하나님은 그들을 예언자로 부르셔서, 당신의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 예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방향이 본질상 타인을 향해 있습니다. 같은 언어의 은사, 소통의 은사이지만, 방언과는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물론 다른 모든 은사들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또 그래야만 하지요. 다만 방언이 조금 특별한 은사인데, 그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 성령이 부어질 때에 관한 구약 말씀의 성취라는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안타깝게도 그 방언에만 꽂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더욱 예언의 은사를 갈망하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아직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사랑을 어떻게 은사에 담아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기에,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또 어쩔 수 없이 사랑해야만 하고, 사랑을 담아내야만 하는 그런 은사인 예언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 물론 예언도 얼마든지 자기중심적인, 자기탐닉적인 은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려는 마음보다 내 신앙의 탁월함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는 순간, 어느 은사나 마찬가지 위험에 빠집니다. 반대로 방언 역시 다른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지체에게 방언으로 같이 기도하고, 또 방언을 하게 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믿음의 확신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깊게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거기 사랑을 담는 일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있는지, 아니면 나의 유익을 구하는 자랑이 있는지,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를 늘 살피는 것이 결국 성도의 깨어 있는 신앙입니다. 사랑과 자랑, 그냥 한 획이 있고 없고의 차이 뿐인데, 열매에 있어 그 둘은 참 커다란 차이를 만들지요. 자랑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고,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사도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예언이,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이 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은사를 서로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예배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권면하면 될 것을 굳이 그걸 방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로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깨달은 말 다섯 마디면 족합니다. 다섯 마디면 그냥 한 문장 정도 되겠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단 한 문장의 말이, 일만 마디의 유창한 방언보다 더 낫습니다. 그 한 문장이 여러분의 지체를 진정으로 위로하고, 그의 영혼을 일깨우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 사실 ‘예언’ 그러면 너무 거창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통해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한 문장이 곧 모두 예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건 굳이 목사만의 일도 아니지요. 말씀을 사모하고, 또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어떤 성도든지, 이 예언의 은사로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말씀,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말씀이어서,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내가 먼저 잘 씹고 소화해서, 문자나 카톡을 통해 그 말씀을 전하는 것도 얼마든지 귀한 예언의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디 어렵고 난해한 말씀을 하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늘 성령으로 충만하셨던 주님은, 언제나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그런 쉬운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진심으로 타인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이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사모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 사실 오늘날 예언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사람만의 은사이기 이전에, 모든 성도의 기본적인 신앙의 모습, 소통의 모습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우리는 모두가 다 성경이라고 하는 분명하고 확실한 예언의 말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과는 그 조건이 기본적으로 다르지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하고 신비한 능력이었을 이 예언이, 우리에겐 일상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고 나옵니다만, 지금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조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그 모든 예언의 말씀을 다 가졌고, 누리며 살아갑니다. 심지어 검색도 되는 세상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타인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깨달은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습니다. …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일상의 언어에 녹아들고, 여러분이 깨달은 그 다섯 마디의 말이 누군가를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귀한 예언의 말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으로 이 방언과 예언은 결국 언어의 문제, 소통의 문제에 관한 은사임을 기억하며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방언도 본래는 소통의 은사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할 것을 보여주는 은사가 방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또한 나와 너 사이에, 더는 그 어떤 소통의 장애물도 없을 거라는 표징이 바로 방언입니다. … 내가 깨달은 바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서로 주고받는 예언도 또한 소통의 은사입니다. 중요한 건 결국, 방언을 하든, 예언을 하든, 성령 안에서 함께 소통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 이러한 소통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입니다. 비단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다른 여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소통은 늘 중요하지만 항상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우리의 진실한 노력도 꾸준히 필요합니다. …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오늘 바울이, 내가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18절)에 주목하게 됩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잘 할 수 있었음에도, 오직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그 은사를 절제했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거기까지 분별하여 절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결국 그것을 해내는 것입니다. ​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의 깨달은 말이 더 낫고, 때론 그 다섯 마디의 말보다도, 그저 우리의 귀와 마음을 빌려주는 침묵의 은사가 더 귀할 때도 많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소통이 안 되는 건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말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남에게 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남의 유익을 바라는 마음이 없고, 절제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어서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요. 사랑은 그보다 더 진지하고, 더 사려 깊으며, 그래서 때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 사랑이 있기를, 그 분별 있는 절제로 진실하게 소통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은사도 사모하고, 사랑도 추구하십시다.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동사가, 추구하고, 사모하고, 갈망하라는 표현들이지요. 단순히 ‘그래야겠다’ ‘그러면 참 좋겠다’ 이게 아니라, 여러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하는 일들이 사랑에 기초한 것인가, 내가 영적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과연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늘 확인하면서, 그 사랑을 담아낼 좋은 은사의 그릇도 준비해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자 해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다면 줄 수가 없지 않습니까? …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정말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라고, 특히나 깨달은 마음으로 나누는 그 다섯 마디의 소통을 통해 우리 모두가 말씀 안에서 함께 자라고 성숙해지는, 그런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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