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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6. 속건제
2021-03-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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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210310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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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5:14~6:7, 속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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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에 나오는 중요한 제사 다섯 가지 중 마지막, ‘속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속건제’라는 이름부터 생각해보면, ‘속’이라는 글자는 지난주 ‘속죄제’의 ‘속’과 같은 뜻으로, 속죄할 ‘속’(贖)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 역시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였겠지요.
그런데 이 제사가 속죄제와 다른 점이, ‘속건제’의 ‘건’ 자에 들어 있습니다. ‘건’은 ‘허물’ ‘愆’인데요, 직역하면 허물을 속죄하는 제사입니다. 허물을 속죄하는 것도 죄를 속죄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 싶은데요, 이때의 허물은 단지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sin’이 아니라 ‘guilt’라고 하지요. 속건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명사가 ‘아샴’인데요, 이것 또한 그런 뜻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니까 속건제는 단순히 ‘죄’에 대한 속죄일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속죄하는 그런 제사인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이 있어서 그것을 속죄해야 한다는 말은, 그 죄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실제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 지난주 ‘속죄제’ 말씀에서 다뤄진 ‘죄’라는 단어 ‘하타’가,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의미한다고 해서, 실수로, 부지중에, 모르고 지은 죄가 ‘하타’라고 했는데요, 속건제의 경우에는, 그 빗나간 화살이,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르는 짐승에게 맞았다거나, 그 화살이 타인의 물건을 파손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 죄는 단순히 속죄제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 죄로 인해 다른 사람이 입은 피해에 대한 책임을 배상해야만 하는 거지요. 이렇게 내가 지은 죄로 인한 누군가의 피해를 배상하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런 속건제는, 일종의 배상이 뒤따르는 특별한 속죄제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속건제를 드린다고 하니까, 남에게 입힌 그런 피해를 그냥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때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입힌 피해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해야 하고, 그 배상과 함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배상 따로 제사 따로’인 거지요. 그런데 이때의 배상은, 남이 입은 피해의 얼마로 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까? 네, 본래 물건 가치의 1/5을 더하여, 총 120%를 배상해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100만원 피해를 입혔으면, 100만원만 배상하면 되는 게 아니라, 거기에 1/5을 더해서 120만원으로 갚아줘야만 한다고 율법은 규정합니다. 6장에 보면 속건제의 예시 중에서,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서 그걸 자기가 꿀꺽한 경우가 나오는데요, 그런 경우에도 그 잃어버린 사람에게 잃어버린 물건만 주는 게 아니라, 120%로 배상해야 합니다. 단지 내가 남에게 입힌 피해만 배상하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상대방이 받았을 어떤 고통이나 심리적 피해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그에게 120%의 배상을 하면서, 하나님께는 따로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경우의 속건제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먼저 5장 뒷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속건제’에 대한 내용이고, 6장 전반부는 ‘사람에게 범한 죄에 대한 속건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에 대한 속건제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통해서 하나님께 어떤 피해를 입힌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 5장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 하였으면’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범죄’, 여기엔 어떤 게 있을까요? … 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범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나 예물에 있어서 어떤 허물이 있었을 때를 의미합니다. 제사에 관한 율법을 제대로 모르고 실수로 잘못 드렸을 때나, 반드시 드려야 하는데 아예 깜박하고 드리지 않았을 때, 또 내가 먹을 수 없는 제물인데 실수로 그걸 먹었을 때처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야 할 것을 내가 취했을 경우, 그게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범죄가 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때도 속건제와 함께 그 성물에 대한 120%의 배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요, 그 배상은 제사장에게 주도록 본문 16절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6장으로 넘어와서,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죄 중에서 사람에게 범한 죄의 경우에 대한 설명을 보면, … 여기에는 크게 서너 가지 정도의 사례로 세분화되어 있는데요, 먼저 남이 나에게 맡긴 물건인데 그걸 내가 슬쩍 취한 경우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또 남의 것을 도둑질하거나 착취해서 빼앗은 것 역시 속건제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처럼,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서 가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120%의 배상과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경우는, 사람이 부지중에, 실수로 한 거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앞의 5장 15절에 보면, ‘부지중에 범죄 하였으면’이라고 되어 있어서, 속건제 역시 속죄제처럼, 내가 모르고 한 죄에 대한 속죄의 제사임을 알 수 있는데요, 지금 말씀드린 이런 일들, 남의 것을 속여 빼앗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는 것은 사실 부지중에 일어나기 힘들지요. 앞서 5장에서 하나님의 소유를 내가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취하는 경우는, 이미 다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체 하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이런 경우도 속건제로 분류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죄가 드러나기 전에 먼저 그가 뉘우쳤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물질 앞에서 순간 정신이 이상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 내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버스에 지갑을 놓고 내렸는데, 거기 승객이 나밖에 없어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 시간도 너무 늦어서 어디 가져다주기도 어려울 때, 그럴 땐 견물생심이라고 잠깐 정신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슬쩍 가방에 넣고 집으로 온 거지요.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건 아닌 겁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 경찰서를 찾아가서, 이 물건, 내가 주운 거라고 신고를 한 겁니다. 자기가 쓴 게 있다면 그 얼마를 다 채워서 가지고 갔겠지요. 이렇게 죄가 나를 드러내기 전에, 내가 죄를 먼저 드러내면, 그것이 엄밀히 말해서 모르고 지은 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일종의 부지중에 지은 죄로서 참작해주는 것이고, 이제 속건제를 드리면 그 죄가 해결이 되는 겁니다.
만약 이렇게 자복하지 않고, 나중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죄가 밝혀지게 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이땐 절대로 모르고 한 죄가 될 수 없는 거지요. 이럴 땐 120%가 아니라, 갑절로 배상하라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고(출애굽기 22장), 만약 소나 양을 도둑질했는데 아예 그것을 잡아서 먹거나 팔아버렸다면, 소는 다섯 배, 양은 네 배로, 원래 주인에게 갚으라고 말씀합니다. 엄청난 차이지요. 하나님의 것을 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입니다만, 여호수아서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고의로 하나님의 물건을 취하고, 끝까지 죄를 고백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그 죄가 밝혀져 집안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그런 사례도 있었지요. 죄가 자기를 드러내기 전에, 스스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백 번, 천 번 나은 것입니다. 120%의 배상을 하고 속건제를 드리면, 6장 7절에 있는 말씀처럼,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소유를 실수로 취했거나 빼앗은 것이지만, 오늘 본문 6장 2절에 보면, 이것이 결국 누구에게 신실하지 못했던 것이냐, … 네,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 한 것이라고 나옵니다. 비록 사람에게 한 잘못이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에 대한 배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수평적인 죄도 다 수직적인 관계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지은 모든 죄가 실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단지 성소의 물건만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성소에 드려진 예물에 대한 배상이나 이웃의 소유에 대한 배상이, 서로 동일한 크기로, 120%로 정해져 있지요. 양쪽이 다르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여 발생한 죄라는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다면,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태도가 실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꼭 기억해두어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럼 여러분, 이러한 속건제의 제물로는 무엇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까? … 네, 속건제 제물은 한 가지로만 정해져 있어서, ‘흠 없는 숫양’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속건제만의 중요한 특징이지요. 다른 제사처럼 여러 가지 종류의 제물이 드려질 수 없고, 오직 한 종류의 제물만 가능한, 유일한 제사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동일합니다. 또 내가 얼마를 배상해야 하든 상관없습니다. 그 어느 때나 모두 흠 없는 숫양으로 속건제를 드려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무거운 제물이었을 텐데요,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속건제가 일종의 속죄제라고 했습니다만, 그 제사 과정을 잘 살펴보면, 여기에도 속건제만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바쳐진 숫양을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해야 하느냐, 그 절차를 생각해보면, 우선 본문이 이것을 매우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데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그냥 속건제를 드리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 제사 방법 자체가 아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살펴본 다른 제사들을 생각해보면 매우 충격적인데요, 나중에 7장에 가서 보면 속건제 절차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전체적으로는 속죄제와 비슷한데요, 숫양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도살한 후, 제물의 기름진 부분은 번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남은 부분은 모두 제사장에게 돌립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인데요, 이 숫양의 피는, 속죄제에서와는 달리, 그냥 번제단 사방에 뿌리기만 하라고 말씀합니다. 속죄제에서는 피를 어떻게 했지요? 네, 제물의 피를 성소 곳곳에 뿌리고 바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더럽혀진 하나님의 성소를 피로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번제나 화목제처럼, 피는 제단 아래에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죄로 인한 제사인데 왜 이렇게 할까요? 나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배상을 하는 그것이, 곧 죄로 인해 더럽혀진 것을 정결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라는 뜻입니다. 120%의 배상을 함으로써, 그 죄로 인해 끼친 피해를 원상 복구하는 것, 그럼으로써 피해자의 마음을 온전히 풀어주는 것에 속건제의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와 관련해서, 오늘 5장과 6장의 이 두 가지 속건제 절차를 비교해서 살펴보면, 한 가지 신기한 차이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 제사를 드리는 시점에 있어서 양쪽이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범죄로 속건제를 드릴 땐, 먼저 숫양으로 드리는 속건 제사에 대한 설명이 15절에 먼저 나오고, 그러고 난 후에 그것에 대한 배상 이야기가 16절에 이어집니다. 하지만 6장으로 넘어와서, 사람에 대한 범죄로 인해 속건제를 드릴 땐, 이 순서가 역전됩니다. 먼저 제사를 드리는 게 아니라, 일단 남의 것을 120% 배상하고, 그리고 난 이후에 하나님 앞에 나와, 속건제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순서의 차이이지요.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혔고, 그래서 원망을 들을 일이 생겼다면,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려는데 그 일이 생각나서 양심에 가책이 됐다면, 그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우선 그 사람에게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배상을 먼저 해야 합니다. 제사는, 예배는 그 다음 문제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부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죄가 다른 사람과 관련된 문제라면, 그에게 해를 끼친 죄라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전에 먼저 사람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단지 말이 아니라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배상이어야 합니다. … 이 순서를 바꾼다거나, 혹은 아예 하나님께만 용서받으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영화 ‘밀양’에 보면,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나는 이미 하나님께 회개를 해서, 내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자기를 찾아온 피해자에게 이야기합니다만, 그런 건 성경 어디에도 없는 개떡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구원도 모르고 하는 어리석은 짓거리지요.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회개는, 반드시 사람에게 먼저 해야 하는 것이고, 그가 용서를 해야만, 비로소 하나님께도 용서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라는 세리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신이 나서,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니, 그가 주님께 스스로 이야기하지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네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했습니다. … 삭개오는, 자기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배상을 하는 것임에도, 그러니 일종의 속건제의 배상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120%가 아니라, 마치 죄를 숨기다가 드러나서 처벌을 받는 것처럼, 가장 큰 배상의 범위로 타인에게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기준을 훌쩍 뛰어 넘어, 정말 타인을 위한 그런 배상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 19:9)라고 하십니다. … 여러분, 구원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되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서 영접하고, 정말 실존적으로 그의 주 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그 관계 속에서 이미 생명을 누리고 맛본 사람들이 타인에게 행하는 평화의 삶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줄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주님을 통해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회개의 행위를 기쁘게 행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가 영접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내 집에 들어오심으로써, 내가 이미 의롭고 존귀하며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았기에, 더는 물질을 통해 나의 의를 드러내거나 나의 나 됨을 자랑하거나, 나의 생명을 스스로 추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목숨보다 귀한 물질에 대하여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실존적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그를 믿으면 내가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간다, 이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예수를 온전히 믿고 실존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나 자신의 가치와 운명이 전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온전히 믿고, 기쁘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그래서 다른 사람과 온전한 샬롬을 누리게 되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속건제물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 말씀, 자막을 보면서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아멘.
고난당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여기 이사야 53장의 10절에는, 예수님을 향해 특별히 ‘속건제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양 예수께서 다름 아닌 모든 백성의 속건 제물이라는 말씀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것을 스스로의 것인 양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영광과 주권을 갈취하여, 내가 주인인 양 살아가고, 또한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속건제의 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께로 드려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몸으로 드려진 그 제사를 받으시고, 이 땅의 모든 죄인이 드려야 할 속건제를 이미 다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더는 속건제사가 필요 없다. 내가 받아야 할 것을 이미 받았고, 그 이상을 다 받았다.”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부족함이 없는 속건의 제물로 예수님의 몸이 드려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끝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네, 우리에겐 여전히 타인을 향한 배상의 책임이 남아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속건제는 완성됩니다. 삭개오에게 구원이 임한 것처럼,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넉넉히 갚아줄 때, 비로소 구원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단지 마음으로 뉘우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충분히 돌려주고, 그가 용서할 때까지 계속 사죄를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속건제가 이루어지고, 온전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이지요. 6장 7절 끝에 보면,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속건 제물이신 예수로 드려진 속건제와, 그 예수를 통해 의롭다하심을 얻은 우리의 회개와 그 열매를 통해, 우리는 무슨 허물이든지 그렇게 사함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오늘 이 속건제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잘 기억하셔서,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신 그 참된 구원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기를, 그래서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과 용서로, 그 구원을 온전히 누리고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