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유익하게 하려 하심 (2021년 2월 21일 주일 설교)
2021-02-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사순절 첫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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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11, 유익하게 하려 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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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25) 본문 7절의 ‘유익하게 하려 하심’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선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은사’(恩賜)라는 말이 ‘은혜로 주다’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신령한 선물, 그게 은사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그럼 은사인가, … 우선 본문 8절 이하에 나오는 은사들부터 간단히 정리해보면, …
먼저 ‘지혜의 말씀’이라는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영감을 따라 지혜로운 말로 누군가에게 적절한 신앙적 권면을 하는 영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지식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는 탁월한 능력을 말합니다. ‘믿음’도 은사 중 하나라고 9절에 나오는데요, 이 믿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이런 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나 또 견고한 믿음이 필요한 상황, 그러니까 어떤 고난이나 큰 도전이 앞에 있을 때, 그때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래서 다른 성도들에게까지 그 믿음의 영향을 끼치는 그런 은사를 말합니다.
계속해서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의 은사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또 10절에 ‘능력 행함’이라는 은사는, 어떤 기적적인 일들을 일으키는 영적 능력을 뜻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사람의 질병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 능력 행함은, 사물이나 자연, 환경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데요, 귀신을 내쫓는 것도 이 은사에 포함됩니다. … ‘예언’의 은사는 몇 번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해석하고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공동체,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능력이지요. 또 ‘영들 분별함’이라고 나오는 은사는, 어떤 영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예컨대 은사처럼 보이는 그런 영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그냥 그런 흉내를 내는 것인지, 혹 다른 영에 의한, 귀신이나 악령에 의한 역사는 아닌지, 그것을 분별해내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또 ‘방언’과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도 있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나 어떤 신비로운 말들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방언인데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본인도 모르거든요. 그걸 이해하고 전달하는 건 별개의 은사, 곧 통역의 은사라고 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은사들은 이렇게 아홉 가지 정도 되는데요, 하나 같이 다 정말 신령하다, 영적이다, 할 만한 그런 은사들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른 은사들도 나옵니다. 본문의 아홉 가지 은사처럼, 어떤 ‘능력’을 위주로 은사를 말할 수도 있지만,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실제로 섬기는 어떤 직분이나 역할에 대해서도 성경은 은사라 부르기도 합니다. 나중에 12장 28절 보면 이하에 보면 이런 식의 은사 분류가 나오는데요,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사람, 또 남을 도와주는 사람, 또 남을 이끌고 지도하는 사람(leadership) 등이 다 은사로 나옵니다. 이와 비슷하게 로마서 12장에도 보면, 섬기는 일, 곧 봉사도 은사로 언급되고, 또 위로하는 일이나 구제하고 긍휼을 베푸는 것 또한 은사로 불립니다. 그밖에도 전도나 선교를 은사로 보는 에베소서 4장 말씀도 있고, 바울이 7장에서 언급했던, 주님을 위해 독신으로 사는 삶도 하나의 은사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어떤 몇 가지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성경에 언급된 것 외에도, 얼마든지 은사로 분류될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은사는 누가, 왜 주시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가봅시다. 오늘 본문은 사실 이것에 대해 말씀하기 위해 기록된 것인데요, 은사는 누가 주십니까? 네, 성령께서 주십니다. 11절이지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주십니다. 그럼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절이지요.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 여러분, 여기의 ‘유익’이 누구의 유익이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헬라어 성경의 명확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요, ‘유익’이라고 번역된 단어 ‘심페론’은, 그 말 자체가 ‘공공의 이익,’ ‘여러 사람의 이익’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도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은사를 통한 섬김으로 타인과 공동체가 유익을 얻도록, 그렇게 성령께서 주신 영적 선물이 은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은사를 받은 본인 자신에게도 당연히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특별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더구나 그것으로 남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은 본인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내가 가진 능력으로 누군가에게 유익이 될 때, 우리는 다른 어떤 때보다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분명 은사는 자기 자신에게도 큰 유익입니다. …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유익은 …, 본문 7절을 다시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이라고 되어 있지요.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이라고 말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은사는 그를 향한 성령의 나타나심이라는 겁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은사를 통해 결정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은사 자체가 바로 성령의 존재와 역사하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보증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바로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서도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 받았음을 믿습니다. 어떻게요? … 지금 이렇게 부족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훗날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또 영화롭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요? 오직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그 모든 것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은사를 확인하고, 그것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여, 성령의 나타나심을 내가 경험하는 것은 성도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 뭐 그런 말을 하지만, 이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1절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이러한 ‘신령한 것,’ ‘영적인 것,’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은사로 인한 여러 문제가 발생해서 이 편지를 쓰고는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령한 것을 알고 또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요,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에게 은사가 없다면,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은사에 대해 성도가 무지하거나, 실제로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나 답답한 일입니다. 성령님이 정말 계신지, 내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행하시는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영감에 둔감해지면 안 됩니다. 그건 굳이 비유하자면, 예술가에게 더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성도가 그런 것입니다. 더 이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예술가, 더는 그 작품을 발표할 수 없는 그런 예술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런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면 본인 자신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성도는 누구나 자신의 은사를 확인하고, 그것으로 타인을 이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아납니다. 아주 작은 일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은사는 크고 작음이 없다고 계속 본문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 내가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 나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지, 또 내가 무엇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고, 고마워하고, 도움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지,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고, 그것을 열심히 활용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을 스스로 경험하셔야 합니다. … 물론 교회나 목사가 여러분의 은사대로 일할 수 있는 사역의 장을 만들어드려야 하겠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 또한 어떤 사역의 요청을 받을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내 은사가 사용될 수 있는 부분에 기꺼이 자원하고, 실제로 그 일을 감당하여 내 은사를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각자 주시는 성령의 감동을 잘 느끼고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은사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한때는 교회마다 은사를 강조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부흥기와 그 시기가 일치하는 면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고린도교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런 은사 중심의 신앙이 가진 한계가 드러나면서, 지금은 한국교회가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은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은사를 무시하고, 그래서 성령의 나타나심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져가고 있고, 당연히 그 은사로 타인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나태해져 갑니다. 우리 사회의 강한 개인주의적 경향이 이런 모습을 부추기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 분명 신앙적으로는 건강하지 않은 방향입니다. 은사를 통해 성령의 나타나심을 경험하고, 서로가 영적인 유익을 풍성하게 주고받아야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홀로 신앙생활 할 수 없다는 것을 성령께서 증언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해지지 않고, 뭔가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지려면, 다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은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울러 기존의 은사주의가 담아내지 못했던, 성령의 열매에 있어서도,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힘을 기울여서 그 좌우의 균형을 맞춰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신령한 것’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알지 못하기를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나타나심을 온전히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고백교회가 풍성한 은사를 통해 서로 깊은 영적 유익을 주고받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마치 수많은 악기가 모여, 각기 다른 음색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좋은 오케스트라와 같이, 여러 은사들이 성령의 지휘에 맞춰 조화롭게 연주돼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깊은 임재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경계해야 할 부분은, 그 은사의 본질과 목적을 늘 잊지 않는 것입니다. … 비록 많은 은사를 풍성하게 누렸던 고린도교회였지만, 이상하게 은사가 풍성해질수록 오히려 갈등과 분열이 심해졌습니다. 그 은사의 목적지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질됐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자칫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지요. 내가 뭔가 더 영적인 사람 같고, 남보다 조금 더 중요한 존재 같은, 그런 느낌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나르시시즘이라고 아시지요? 자기에게 도취되어 온통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는 겁니다. 풍성한 은사를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런 영적 나르시시즘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은사와 남의 은사를 비교하고, 어느 것이 더 신령한가 경쟁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서, 정작 은사의 목적과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남보다 도드라지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본능이지요. 여러 사람 가운데 다양한 능력들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내 능력이 좀 더 존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 그게 사람입니다. … 모든 악기가 제 몫을 감당하여 하나의 곡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빗대서 우리는 조화와 하모니를 이야기하곤 합니다만, 사실 그런 오케스트라도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일종의 차별 같은 게 존재한다고 하지요. 현악기나 관악기, 타악기, 이런 악기들이 다 같이 존재하고 똑같이 중요하지만, 대체로 현악기 연주자들이 좀 더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또 오케스트라 맨 앞줄에 앉아서, 그렇게 곡 전체의 선율을 그들이 이끌어가기 때문이겠지요. … 그런데 같은 현악기 안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현악기들 중에서도 바이올린이 대장이지요. 보통 바이올린 수석 연주자가 그 오케스트라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관악기나 타악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똑같이 중요한데 근데 누군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교회는, 우리가 함께 연주하는 이 주님의 몸은, 가장 연약하고,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악기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런 오케스트라라고 말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22절에서 사도는 이야기하지요.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덜 중요해 보이는 지체가 더욱 귀하게 여겨지고, 조금 부족한 지체가 더 아름답게 도드라지는,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가 연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합니다. 얼마 전 TV에서 전문 리코더 연주자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사실 우리에게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악기인 리코더가 주인공이 되는 그런 곡은 많지 않지요. 그런데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약하게 보이고, 덜 중요해 보이는 누군가가 실은 가장 중요하게 도드라지는 공동체가 다름 아닌 주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이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령의 뜻대로 은사를 사용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고린도교회는 그게 안 돼서 분열하고 반목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가 한 분 성령께서 주신 동등한 은사지만, 굳이 거기에 우열을 두고 내 것이 더 귀하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도드라지지 않는 자리, 남이 인정해주지 않는 자리에서는 그런 은사를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섬기기 위한 도구가 은사인데, 어느새 그걸로 나를 섬깁니다. … 그런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더 존귀하게 여겨지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지, … 이에 대해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역사가 무엇입니까? 본문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요? … 본문 3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펜으로 밑줄을). … 여러분은 예수가 여러분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십니까? 네, 그렇다면 여러분 안에는 지금 성령이 계시며,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 사람, 사람들의 저주 속에서 죽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주님이라고 여러분이 정말 믿으신다면,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여러분에게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신비한 일, 어떤 영적인 일의 결말이 무엇인지, 거기 정말 예수의 주 되심이 드러나는지를 보면 그것이 정말 성령의 은사인지 아닌지가 판명됩니다. 어떤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이 비단 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지요. 다른 종교에서도 영적인 일,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다만 그것이 참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의 차이인데, 그것을 분별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그것은 거기서 예수의 주 되심이 선포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정말 예수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까? … 혹시 이 질문이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에이, 또 그 이야기인가,’ ‘그건 너무 힘든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실상 우리의 신앙은 그게 전부입니다. 예수가 나의 주님이라는 고백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운명이 거기 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인가, 정말 예수가 내 모든 것의 주인인가, … 내 삶의 운명이 오직 그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신뢰하는가? … 우리는 그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가셔서 말씀하시지요. “너, 나 따라와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전부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간단 말이지요. 그게 주(主)입니다. 내 인생 전부를 그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삶을, 그리고 모든 운명을 그 한 분에게 건다는 것입니다. 그걸 회심이라고, 회개라고 합니다. 주인을 바꾸는 것! … “아니요, 잠시만요, 지금 당장은 좀 곤란합니다.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 … 요것만 해결되면 그러면 따르겠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그러면 제가 주님을 따르지요.” 그렇게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가셔서, “아무개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를 따라와라. 내가 너에게 주는 목적을 따라, 너의 모든 삶을 다시 시작해보자.”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 나서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집과 가족과 직업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 이 세상에서 이룬 것이 많고, 그래서 미련도 많은 사람은 아마 주님을 따라나서기가 그만큼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세상에 별 소망이 없는 사람들, 잃을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그보다 조금 더 쉬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누가 됐든, 이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은 오직 성령으로만 되는 일입니다.
정말 예수가 나의 주님이신가, 여러분 우리는 이 질문을 자주, 오래, 지속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바른 여정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주다, 하는 이 말이 우리에게 결코 식상해지면 안 됩니다. 매순간이 이것이 도전이고, 새로운 싸움이어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내가 내 생명에 대한 주권이 없다는 것. 나의 모든 생사여탈권이 오직 예수에게 달려 있다는 것, … 내 가족과 내 자식과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이 결코 내가 아니라는 것. 나는 오히려 종이며, 그것들을 잠시 맡아 섬기고 관리하는 주의 청지기라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고백하며 살아갈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안전하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QT 본문에 보니 그런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주인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10)
여러분도 혹시 주님 앞에 늘 이런 마음이십니까? 주께 받은 은사로, 능력으로 섬기고 수고하고, 여러분의 지혜와 물질과 시간을 드려 헌신하면서도, 여러분의 마음은 혹시, ‘주님, 그래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예수는 참으로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참으로 복 된 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어려운 일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그 일을, 이루어내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만약 그 고백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요한이 어떻게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 우리의 신앙에는, 내가 쇠하여서 주님을 흥하게 하는, 너무나 뼈아픈 지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흥하면 하나님도 흥하고,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고백은 다르지요. 내가 쇠하는 자리에서 하나님나라가 임합니다. 십자가의 종교는 그렇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데, 거기 참 생명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내가 밀알 되어 썩는데, 거기서 풍성한 생명의 결실을 얻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여정은 힘들고 고달프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여정을 경험해보신 분은 다 아실 겁니다. 예수가 주로 고백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가 참으로 내 삶의 주 되실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가 내 주인임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해지고, 인생의 근심과 생활의 염려를 내려놓게 됩니다. 나의 주 되신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나라로 다스리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그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주시는 메시지 또한 그것입니다. …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남을 유익하게 하라고 주신 은사는 결국 예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가 참으로 나의 주님인지, 여러분의 은사가 사용되는 모습을 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 성령의 은사들을 더 뜨겁게 사모하고, 풍성하게 누리시길 바라고, … 그 섬기는 곳에서 오직 예수의 주 되심을 온전히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