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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기다리라 (2021년 2월 14일 주일 설교)

2021-02-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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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메시지 ---------------------------------- 고린도전서 11:17~34, 서로 기다리라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시스템 문제로 인해 전반부는 생략되었습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세요. ​ 첨부파일 cor24 .mp3 파일 다운로드 ​ (고린도전서 강해 24) 본문 33절의 ‘서로 기다리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날 밤, 그 긴박했던 시간에, 주님은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것인데요, 주님은 거기서 중요한 한 가지 예식(禮式)을 친히 제정하심으로써,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십니다. 주님의 죽음이 무엇을 위함인지, 또 그 죽음 이후 찾아올 주님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지, 또 어떤 소망을 가지고 무엇을 준비하며 우리는 살아가야할지, … 주님은 어떤 말이나 설명을 하시는 대신에, 성만찬이라는 하나의 예식을 제정하시고, 그 안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담아서 제자들에게 남겨주고 가셨습니다. 듣고 이해하는 어떤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몸으로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을 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성만찬은 주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유일한 유품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예식 안에서 이제는 볼 수 없는 주님의 몸을 직접 경험하기도 하고, 또 우리에게 친히 찾아와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다시 오실 주님, 그 임마누엘의 주님을 우리가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과의 그 마지막 만찬을 오늘 우리와도 나누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 지금은 이 성찬식이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 간략히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사실 성찬식은 본래 예배의 일부라기보다는 식사의 일부였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그 성만찬 자체가, 본래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의 일부였지요. 보통 유대인 가정에서 유월절 만찬이 시작되면, 그 집의 가장이 기도를 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 세상의 왕이시여. 땅으로부터 이 떡을 소출하게 하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감사기도를 하고, 떡을 떼어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한 조각을 먹는 겁니다. 그렇게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는데요, 양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함께 먹습니다. 이후에 동일하게 가장이 기도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 세상의 왕이시여, 포도나무의 열매를 창조하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포도주 잔도 축복하고, 같이 나누어 마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밤에 있었던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가장으로 계시는 새로운 가족의 저녁 만찬이었습니다. 새로운 출애굽 사건을 앞두고 열린 한 가정의 식사였고, 하나님나라의 새 공동체가 함께 하는, 새로운 유월절 식사였던 것입니다. ​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와 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서도, 이런 전통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성도들이 모여 나누는 공동의 식사와 성만찬 예식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는데요, 1년에 한 번, 혹은 1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가능하면 최대한 자주 모여서 식사를 함께 했고, 또 그 가운에 성만찬의 예식도 함께 나눴습니다. … 보통은 성도들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 중간에, 특정한 빵과 포도주로 성찬식을 진행했는데요, 그런데 한 가지 난처한 것이,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다 똑같은 시간에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이 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 시간의 편차가 크다보니, 먼저 퇴근한 사람들은 좀 일찍 모여서 식사도 먼저 하기 시작했고, 그보다 늦게 온 사람들은 뒤늦게 식사에 참여하거나, 아예 따로 늦은 식사와 성찬식을 나눴습니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그림입니다만, 사실 여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숨어 있었지요. ​ 여러분, 상대적으로 일찍 모여서 식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누구였겠습니까? 또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 네, 이런 시간적 차이는 대체로 사회적 계층 간의 차이에서 비롯됐습니다. 비교적 넉넉한 형편의 사람들, 또 사회적으로 좀 더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부터 일찍 모여서 여유 있게 식사를 하고 교제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일이 다 끝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요. 노예나 일꾼처럼, 누군가의 허락이 떨어져야 겨우 모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이 가끔 바빠서 서로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형편으로 인해 늘 그런 모습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성찬식이 포함된 이 공동의 식사 자체가, 일종의 계층 간 차이와 분열의 표지처럼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이는 시간의 차이가 그들이 나누는 식사의 질적인 차이로 고스란히 이어진 것입니다. 일찍 도착한 성도들, 비교적 넉넉한 형편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기름진 음식으로 화려한 저녁 만찬을 즐겼습니다. 먹을 걸 챙겨오기는커녕 몸만 빠져나오기도 바쁜 성도들, 빈궁한 성도들, … 그저 남은 음식으로 허겁지겁 허기를 달래야 했던 성도들의 마음이 좋을 리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먹는 걸로 인해 받는 서러움이 큰 법이지요. 그들은 깊은 굴욕감과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결국 주님의 만찬이 이상해진 겁니다.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모든 성도가 온전히 한 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또 그런 삶의 진면목이 실제로 경험되어야 하는 그 거룩한 식탁이, 도리어 차별과 분열을 조장하고 경험하는, 귀신의 식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사도는 이러한 식사는 더 이상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고 단호히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주님께 받아서 고린도교회에 전해준 성만찬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도 성찬식 때마다 반복하는 말씀이지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아멘. ​ 사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성경 본문인 오늘 이 말씀이, 다름 아니라 고린도교회를 책망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었으니 말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처럼 정확한 성만찬 전승을 찾아보기가 어렵지요. 당연히 사복음서에도 이런 내용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인 것이, 그렇게 전해진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만찬의 중요한 의미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 오늘 본문에는 그런 성만찬의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념하고,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 … 뭐라고요 여러분? 네, 주님을 기념하는 것, 그리고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먼저 좀 생각해보십시다. ​ 주님은 우선, 이 성만찬 예식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기념하는 것, … 여기 ‘기념하다’라는 말을 우리말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어떤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억하고 우리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념하다’라고 번역된 본래 이 헬라어 단어[아남네시스]의 의미로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이 단어도 사실 지난주에 잠깐 언급했던 플라톤이라는 철학자의 중요한 용어인데요, 우리 인간이 ‘이데아’라고 하는 절대적인 실체, 시간 너머에 있는 영원한 본질을 실제로 마주하는 그 잠깐의 경험을 뜻하는 말이 바로 이 ‘기념하다’, ‘아남네시스’라는 말입니다. ​ 그러니까 성찬식에서 주님을 기념한다는 말 역시, 단지 우리가 주님을 기억한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함께 성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그때 그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직접 임재하셔서, 우리가 그 주님을 경험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경험의 방식에 대해서는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도 믿기도 하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떡과 포도주 안에 주님의 몸이 결합되어 존재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 밖의 또 어떤 사람들은, 비록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변하지 않지만, 여전히 떡이고, 포도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을 통해 주님의 몸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된다고 믿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 예식 가운데 주님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우리가 직접 그 몸을 마주하고 경험하게 하신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바로 주님을 기념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 또한 사도는,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 단지 주님을 기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26절이었지요, 우리가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 먹고 마시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결국)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념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전하는 행위’를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 여기 ‘전하다’라는 동사[카타겔로]도 사전에서 찾아보면, ‘발표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등의 뜻이 있다고 오는데요, 그냥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게 아니라, 훨씬 더 공적이고, formal한 의미지요. 그러니까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나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지금 기념하고 있는 이 죽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받아 죽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며,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다, … 또한 우리는 지금 이 죽음이,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이어서, 내가 더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고,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임을 천명하고자 한다, … 그렇게 우리는 성찬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 그러니 이 식탁에 참여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함부로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기 현존하는 주님의 몸에 죄를 짓는 것이고, 자기의 죄와 그 심판을 먹고 마시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사도는 권면합니다. 나의 지금 모습과 마음가짐이 과연 이 식사에 걸맞은 상태인가,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기에 부끄러운 모습은 아닌가, 스스로 돌아보고 점검하며 성찬에 참여하라고 강조합니다. ​ 그저 만족스런 한 끼 식사를 한다는 차원이나, 함께 모여 즐거운 친교를 나누는 차원으로 우리는 성찬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각자 자신의 집에서 하고 오라고 사도는 말하지요.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고, 서로 즐기는 것 역시 별도의 모임을 가질 일입니다. … 이 식탁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식탁이 아니라, 주님을 기념하고,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식탁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먼저 자기를 살피고, 주님이 본을 보이신 대로, 다른 이들과 함께, 진심으로 그들을 용납하며 이 식탁에, 이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 그래서 사도는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기다리라’, ‘서로 기다리라’ 이것이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한 사도의 결론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권면입니다. 먼저 먹지 말고, 따로 먹지 말고, 뒤늦게 오는 사람들을 다 기다려서, 함께 먹으라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다. “서로 기다리라.” … 사실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먼저 온 사람들이 먹기 전에 일단 나중에 올 사람들을 위한 음식을 따로 떼어놓고 그러고 나서 먼저 먹는 것 또한 좋은 대안이 될 텐데, 사도는 그러지 말고 기다리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지요. 다 같이 기다려 함께 식사하고, 함께 주를 기념해야 합니다. 다름 아닌 그 기다림과 서로를 향한 환대의 모습 그 자체가, 이 거룩한 식탁의 중요한 목적이자, 이 식사의 한 부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여함에 있어서 꼭 기대하고 기억해야 할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렇게 서로 기다리며, 주를 기념하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오늘 이 예배와 성찬의 본질임을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 (기다림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과 가장 닮은 말이 있다면 기다림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경험해봤겠습니다만, 어떤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렇게 나를 환대하며 함께 먹는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 괜찮아, 우리 별로 배 안 고파. 기다릴 테니까, 조심히, 천천히 와.”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내가 정말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단지 식사 자체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목적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이고도, 가장 온전한 섬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다리는 그 자체로 이미 나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그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이지요. 내 유한한 생명의 한 토막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준다는 뜻이고, 또 그 시간만큼 나의 배고픔을, 내 욕망을 채우는 일을 유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굳이 식사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그보다 더 가슴 따뜻한 일이 또 있을까요? 누군가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주는 것보다 더 큰 환대가 없습니다. … 운전하다 잠시 멈칫하는 나를 기다려줄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잠시 열림 버튼을 눌러 달려오는 나를 기다려줄 때, … 부족한 내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다려줄 때, … 우리는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결국 가족도 우리를 기다려주는 사람들 아닙니까?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 나를 기다려주는 반려묘, 반려견, 그들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살아 숨 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온전한 정신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헨리 나우웬은 이야기했습니다(‘상처 입은 치유자’). … 하지만 보통은 그런 기다림을 경험하기가 쉽지 않지요. 회사도, 학교도, 우리를, 우리의 성장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운전할 때 보면, 신호가 바뀌고 단 1, 2초도 기다리지 못한 채 ‘빵빵’ 울려대는 경적 소리를 듣게 됩니다. 기다려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섬김인지,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렇게 먼저 섬기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 자기 시간 아까워 난리인 세상이지요.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제 모습이 그렇습니다.) ​ 저는, 서로 기다리라, 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기다림을 많이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주시던 주님의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요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마지막 모습 하나가 먼저 생각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지요.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들을 바닷가에서 부르십니다. 놀란 제자들이 뭍으로 올라와 보게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 네, 주님께서 차려놓은 아침식사였습니다. 바닷가 한 켠에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생선과 떡이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무 소득 없이 지친 모습으로 돌아올 제자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며, 주님은 언젠가부터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 그렇게 식사를 다 마치고 주님과 베드로가 나눈 대화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그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나의 어린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이 부탁 속에는 단지 ‘먹이라’는 명령만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그 행간에는 분명 서로를 인내로 기다리고, 용납하고, 환대하라는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시고, 그들을 기다려 함께 식사하신 것처럼, 주께서 제자들의 배신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 기다리신 것처럼, 그렇게 제자들 또한 서로를 기다리며, 용납하며 함께 먹이라고, 그렇게 주의 말씀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 여러분,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만찬의 식탁을 준비하며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성만찬의 장면에 보면 그런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아직은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오게 될 그 완성된 하나님나라의 만찬에 우리가 참여할 때까지, 주님은 승리의 축배를 잠시 미뤄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 그러니 ‘서로 기다리라,’ 이 짧은 한 마디 안에 성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셈입니다. 여전한 사랑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인내해주시고, 그 날의 만찬을 준비하시는 주님의 기다림. … 그렇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다림. … 또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하며 함께 자라가는 성도들의 기다림까지, …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수많은 기다림으로 차려진 거룩한 식탁인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그 기다림을 먹고 자랍니다. 그 기다림의 섬김을 통해 더욱 깊어져갑니다. 사실 오늘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군가의 기다림을 통해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됐을 겁니다. 목사인 저의 오늘 이 모습도, 결국 성도들의 수많은 기다림의 열매인 것이지요. 지금도 여러분의 기다림 속에서 저는 조금씩이나마 목사다워져가고 있을 겁니다. … ​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이 예배가, 우리고백교회가, 그 기다림으로 풍성한 주님의 식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 또 우리가 나누는 교제를 통해, 우리는 그런 온전한 기다림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기다림을 실제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기다림의 선물을 줘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이 귀한 시간을 다른 이에게 온전히 기쁘게 내어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 예배를 통해 그 기다림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까요? (… 이 질문에 대해 지금 여러분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 혹시 우리 또한 고린도교회처럼, 잠시도 서로를 기다려주지 못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 우리의 예배가 그저 나의 신앙, 나의 삶, 나의 운명에만 초점을 둔 그런 자기중심적 축제로 전락해버리지는 않았을까요? 서로에게 작은 시간을 내어주는 것조차 아까워하지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지는 않을까요? 오래 전 고린도교회에서 뒤늦게 만찬의 자리에 도착한 성도가 느꼈을 그 소외감, 그 수치감, 그 모멸감을, 혹시 오늘 우리 중 누군가가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요? …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그러지 않기를, 과연 우리는 어떠한지, 내 모습은 어떠한지, 스스로를 살피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 … 우리가 가장 기다려주지 못하는 존재가 혹시 우리 자신은 아닐까, 기다림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혹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어떤 소설에서 읽었던 구절인데요,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동안 바라본다고 합니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닌데요, …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자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서 그 영혼이 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야 다시 말에 올라 달리기를 시작한다고 하는데요(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 우리 자신도 그렇게 기다려주는 세상, 그렇게 나와 타인을 기다리며 함께 가자고 말할 수 있는 세상, 그게 결국 하나님나라이겠다, 싶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그 주님의 나라를 꼭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사순절은 ‘걷고, 기도하며, 사랑하자’는 주제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보냅니다. 여러분, 봄의 순례길을 걸으며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 나를 기다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묵상해보고, 또 여러분을 진정으로 기다려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보물 같은 섬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또 내가 기다려줘야 할 사람은 없는지, 잠잠히 떠올려보면서, 한 발, 한 발, 순례의 걸음을 내딛어보시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런 걸음걸음 하나가, 주님의 성찬을 우리의 삶 속에서까지 살아내는, ‘성찬의 삶’(the Eucharistic Life)일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 사순절을 통해 그런 성찬의 삶에 기다림으로 참여해보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에 있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인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고, … 한 호흡만 더 기다려보기 위해 노력해보고, … 결국 우리의 기다림이 끝나는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다림에 스스로를 내려놓고 맡기는, 그런 사순절을 보내보십시다. ​ 그러면 분명 주님을 누리는 우리의 경험도 그만큼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기다림이 다만 몇 초라도 조금 더 길어질 수 있다면, … 남을 가르치고 고치려는 대신 한 번 더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면, … 뒤늦게 따라오는 누군가를 위해 기다리는 그 시간이 곧 주님을 만나는 시간임을 깨닫게 될 수 있다면, … 미처 몰랐던 누군가의 기다림을 우리가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할 수 있게 된다면, … 우리 삶의 발걸음이, 우리 영혼의 느린 걸음과 보폭을 맞춰 걷는 그런 발걸음 될 수 있다면, …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하는 이 예배와 모든 교제도 더욱 풍성한 주님의 만찬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꼭 그렇게 되기를,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서로를 기다림으로, 주님의 그 만찬을 온전히 함께 즐기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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