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스스로 판단하라 (2021년 2월 7일 주일 설교)
2021-02-0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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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2~16, 스스로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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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23) 본문 13절의 ‘스스로 판단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그 내용과 메시지가 모두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좀 애매하고 복잡해서 이해가 쉽지 않고, 또 이해한다고 해도 그 맥락을 놓치면 본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소지가 많은, 그래서 매우 어려운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일단 본문의 내용을 fact만 추려서 정리를 먼저 하고, 이어서 그 사실 안에 담겨진 행간의 의미(truth)가 뭔가 살펴본 후,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적용을 하는 식으로, 차례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선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예배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역할을 함께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남자와 여자 모두에 대해 똑같이, 기도와 예언을 할 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데요, 기도와 예언을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남녀 간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 사실 여기 예언이라는 말은, 단순히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지요. 성령의 영감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해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신앙적인 권면의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로 하면, 설교와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러니까 여기 예언과 묶여 같이 나오는 ‘기도’ 역시 어떤 개인적인 기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지요. 공동체를 대표하여 공적으로 드리는 기도나, 또 회중 전체의 기도를 인도하는 그런 성격의 기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예배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언과 기도에 있어서, 고린도교회는 어떤 성적인 차이나 차별 없이, 남녀가 동일한 역할을 감당한 것인데요, 여전히 여성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는 지금의 교회 현실과 비교해 봐도, 이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이 훨씬 더 큰 충격이었겠지요. 당장 유대인들의 교회라 할 수 있는 회당의 경우만 생각해봐도, 거기서는 오직 남자들만 기도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됩니다. 심지어 남녀가 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각각의 분리된 공간에서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처음 조선 땅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도 비슷했지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를 볼 수 없는 상태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당이 ‘ㄱ’자 형태로 건축된 그런 오래 전 사진을 본 기억도 납니다. 유대인 회당이 딱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당을 모델로 해서 세워진 초대교회는 그런 선례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남녀가 한 공간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심지어 여자가 기도 인도를 하고, 설교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말씀 앞에 그들은 기쁘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걸 당연하게 혹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입니다만,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입니다. … 뭐 2천 년 전, 그러면 사실 감도 잘 안 오는데요, 직접적인 비교는 좀 어렵지만, 우리나라 역사로 말하면 고구려가 막 탄생했을 때입니다. 그렇게나 오래 전에 어떻게 교회가 그런 큰 변화를 실제로 살아낼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 또 다른 특별한 요구가 일부 여성 사역자들로부터 새롭게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 여자들이 예언을 하고 기도 인도를 할 때, 평소 공적인 자리에서 당연시되던 너울, 그러니까 얇은 천으로 머리를 가리는 그 관습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도 가톨릭 미사에서는 여자들이 머리에 베일을 쓰지요. 물론 그 의미는 조금 달라졌습니다만, … 사실 어느 사회나, 거기서 통용되는 어떤 의복 예절 같은 게 존재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건 모든 문화권에서 다 있기 마련인데요,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공적인 자리에서 참석할 땐, 반드시 그 머리에 너울을 써서 머리를 가리는 것이 중요한 예법이었습니다. 그것이 여인의 기품을, 품격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고, 아울러 상대방에게도 품위 있는 태도와 존중을 요구하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 같은 것이었지요. 이건 유대인들의 전통도 마찬가지인데요, 공식석상에서 여인이 그 머리를 드러내는 것은, 남편의 큰 수치로 여겨져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보이고, 또 길게 늘어뜨리는 여성들의 경우는, 교양이 없다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남자들을 유혹하려는 게 아니냐, 간주되어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우상 신전에서 일하며 매춘을 했던 여성사제들이나 또 성매매 업소의 여성들 머리모양이 그러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교회 안에서 그렇게 너울을 벗고, 머리를 드러낸 채 예언을 하고 기도를 하겠다고 나선 여성 성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그 취지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그 자유와 새로운 정체성을 보다 온전히 드러내려는 것이지요. 성령 안에서 연합된 이 공동체가, 더 이상 세상 관습에 매이지 않는, 말 그대로 하나님나라 공동체임을 그러한 문화적 차원의 변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용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여자의 머리에 쓰는 너울 자체는, 전통적인 성(性) 구별의 표시이고, 또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문제에 대해 바울 사도에게 편지를 보내 질문했고, 오늘 본문은 여기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도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 네, 그러한 사회적 전통을 무시하지 말고, 여자는 여전히 머리에 너울을 쓰고, 또 남자는 모자를 벗고, 그렇게 지금의 관습을 고수하면서, 예배에서 예언과 기도를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내내 이 편지에서 이야기해온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누리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주님이 친히 본을 보여주신 대로, 단지 나의 유익이나 신념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좇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그럼으로써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사도는 권면합니다.
사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여전히 여자 성도들의 역할 자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새로운 질서, 곧 남녀의 동등한 역할이라는 원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계속해서 남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설교와 기도 인도도 동일하게 감당합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비본질적인 이런 예법이나 관습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성령의 은사대로 교회와 성도를 섬기고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지, 그 일을 함에 있어서 머리에 너울을 썼느냐, 쓰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이 너울을 벗는 문제가 정말 본질적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문화적 현상을 하나 바꾸는 것이, 생각과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때가 많지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어떤 의식의 변화를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남녀평등의 원칙을 전하기 위해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입니다. 중요한 건 그 문화적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변화가 무엇으로부터 이루어졌느냐, 그 변화 속에 어떤 근본적인 메시지가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고, 그걸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성도의 소명인 것이지요. 사도는 염려합니다. 머리에 쓴 너울을 벗음으로써 그 복음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을, 마치 전통을 무시하는 그것이 성도의 정체성인 양 그렇게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스스로 판단해보라,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당시 교회가 이런 문화적 전통이나 사회적 관습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교회 안팎으로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 또한 쉽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상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남녀가 하나의 공간에 모여 긴 시간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가 어디에서도 해보지 못한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을 텐데요, 거기에 갑자기 여자들이 너울까지 벗어서, 얼굴과 머리를 노출하게 된다면, 사실 당시 남자 성도들에게는 그것조차 대단히 큰 자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톰 라이트 같은) 어떤 유력한 신약학자는 이때의 상황에 대해서 비유하기를, 오늘날 여성들이 교회 올 때 비키니를 입는 것과 같은 그런 자극이었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남자들로서는 아마 제대로 예배에 집중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밖에서 일어납니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지요. 가뜩이나 교회의 여러 모습들이 사회적인 의혹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에 대한 오해로, 교회가 인육을 먹는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며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을 두고는,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도모하는 급진적인 반체제집단으로 의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1세기 말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 편지의 일부분을 제가 읽어드릴 텐데요, 로마의 총독(플리니)이 황제(트라야누스)에게 쓴 편지인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저에게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왔습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자에게 찬송을 하고 자기들끼리 예배하고 종교의식을 갖는데, 제게 잡혀 온 그들의 죄목은, 이들이 남녀 혼음(混淫)을 하고, 아이들을 제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들을 문초해보니 고발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 황제께서 제게 지침을 내려주십시오.”
여러분, 이 편지에는 당시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남녀가 모여서 혼음을 한다고, 그러니까 집단적인 성행위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아이들을 제사하는 끔찍한 사이비집단으로 의심했습니다. … 상황이 이렇다고 한다면, 남녀가 한 장소에 같이 들어가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여자들은 너울도 쓰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그런 오해를 확신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겠지요. 당연히 복음의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는, 여인들이 계속 너울을 쓰고, 예언도 하고 기도도 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드러내서 남자 성도들의 마음을 굳이 산란하게 하지도 말고, 그 남편에게 수치가 되게 하지도 말고, 세상으로부터 불필요한 비난의 빌미도 주지 말라는 것이지요. … 만약 굳이 그렇게 머리에 쓰던 것을 벗음으로써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과 자유를 드러내고 싶다면, 사도는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요, 그럴 거면 차라리 머리카락을 다 밀고, 그러고 너울을 벗으면 어떻겠느냐고 반문합니다(5~6절). 그러면 교회 안팎으로 괜한 문제의 빌미를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오히려 수치가 되지 않느냐 하는 일종의 수사법이지요. 지금의 그런 주장들이 결국 여인들은 물론 교회의 수치가 될 거라는 반어법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도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배는 주님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나라의 축소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참 인간의 모습이, 예배를 통해 반드시 경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단지 하나의 종교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주님이 완성하실 창조 세계의 회복을 미리 맛보는 자리이지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겨야 하고, 으뜸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가 어떤 차별도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참 된 자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성령의 은사대로 서로를 섬기며, 주님의 몸을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에 녹아져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런 구원의 본 모습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인정되기도 전에, 심각한 오해의 빌미를 만들어 큰 걸림돌을 만들면 안 될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체를 보려고 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판단해버리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복음 자체가 아니라,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는 그런 외적인 모습에 쏠리게 된다면, 그래서 그것이 마치 성도가 추구하는 삶의 본질인 것처럼 오해된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도 전에 마음의 문을 닫을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분명하게 보고 있지요.
하지만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에서와 같이 여러 내용을 길게 이야기합니다. 7절부터 15절까지 이어지는 논의가 그런 것이지요. … 그런데 사실 이 구절 속에는,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는 다소 무리한 논리도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의 제한이 있어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간단히만 말씀드리자면, 7절부터 9절까지에는 마치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다시 11절에서는 ‘그러나’라고 해서, 그 논리를 뒤집어서, 남자와 여자가 동일하게 상호의존적이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또 중간에 있는 10절에서는 ‘천사들’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더해지기도 하지요.
또 13절 이하에는 사람의 본능이나 본성에 관한, 다소 철학적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남자의 긴 머리는 수치고, 여자의 긴 머리는 영광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판단이다, 하는 건데요, 이것도 일면 무리가 있어 보이는 논리입니다만, 당시 2천 년 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 역시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사도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 여자들은 동일하게 예배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라, 다만 머리에 쓴 너울은 벗지 말고 해라, … 머리에서 너울을 벗는 그것이,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을 거부하는 본질적 변화가 아니다. 그와 같은 문화적 관습 속에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다. 더구나 그런 비본질적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인해, 어렵게 회복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세상에서 오해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미 7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누구나 주님이 부르신 그 조건 속에 머물며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 그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앙적 과제다. … 사도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여러분, 여기까지가 본문의 fact이고, 또 그 fact에 담긴 의미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인데요, 여러분 충분히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면 이제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좀 돌아와 봅시다. 과연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 여러분 우선,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중요한 변화, 세상과 구별되고, 또 역사를 앞서 가는 그런 교회만의 변화된 모습이 있는지를 한 번 자문해 보십시다. … 마치 교회가 세상의 섬처럼 느껴질 정도의 그런 구별된 가치관, 그리고 그에 따른 예배나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 남녀가 한 곳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더 나아가 여자가 예언을 하고 기도 인도를 하는,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당시 고린도교회처럼, 우리는 오늘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믿음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까?
오늘의 예배는 과연 다가오는 주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서 미리 보여주는 그런 거울, 그런 모델 하우스 같은 모습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에 모이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반복해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고, 주님이 완성하실 그 나라의 이상적인 모습들이, 과연 언뜻언뜻이라도 드러나고, 그래서 정말 누군가 바라볼 때, 여기 참 낯설다, 이상하다, 놀랍다, 할 만한 그런 모습이 있는지요? … 이젠 교회가 세상의 상식만큼만 해도 다행스러운 지경이 됐지만 말입니다.
그럼 혹시 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 다른 가치관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떤 게 있습니까? … 질문을 조금 바꿔 본다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했을 때, 그때 가지게 된 가장 큰 가치관의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 혹시 최근 들어, 여러분이 가진 신앙적 관점이 세상의 상식과는 많이 다르다고 느껴진 부분이 있습니까? … 여러분,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결국 오늘 우리 신앙의 현주소 같은 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분, 사실 저는 오늘 고린도교회가 보여주는 이러한 갈등의 모습 자체도 하나의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평생 아무렇지 않게 써 온 그 너울을 벗어던져야겠다, 벗어던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그런 새로운 발상과 의식을 가지게 된 것, 그것이 가능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 그리고 그것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자체가, 여러분 너무나 놀라운 일 아닙니까? 주후 1세기 그 시절에 말입니다. … 그러고 보면, 하나님나라에 대한 바른 믿음의 내용은, 인간의 역사적 진보와 꼭 그 궤를 같이 가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법치에 대해 강조해도, 그 삶의 실상은 그 이념과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지요. 오히려 지금의 사회가, 교회가 그때보다 더 차별적이고 비민주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 속에서 현재를 향해 침투하고 있는 나라이고, 그 나라의 비전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논리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도출된 것이기에, 결국 오늘 우리와 하나님나라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우리는 지금 그 나라와 얼마나 가까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그 나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온전히 세상에 증언하고 있습니까? 혹시 그런 사명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 플라톤이라는 철학자의 유명한 이야기 중에 ‘동굴의 비유’라는 게 있습니다(‘국가’ 제 7권). 여러 죄수들이 어떤 커다란 동굴에 갇혀서 평생을 살게 됐는데요,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 그 자손들까지 대대로 그 동굴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동굴 밖으로 한 번도 나와 본 적이 없는 그 후손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경험한 동굴 속 세상이, 온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오는 길을 발견했고, 처음으로 동굴 밖 세상을 경험합니다. 전혀 다른 세상이었지요. 꽃향기와 바람을 처음 느꼈고, 강렬한 태양빛을 봤습니다. 그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젊은이는 동굴 안으로 되돌아가서, 이제 사람들에게 그 동굴 밖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겁니다. 처음부터 동굴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겠지요. 그렇게 점점 그 공동체 가운데 혼란만 늘어나자, 결국 그 부족의 원로들은 이 젊은이를 처형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그가 죽자, 동굴 속 세상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이 고린도전서 속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동굴 밖으로 나와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나라를, 다시 동굴 속 세상 가운데 증언했던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했고, 오해도 받았습니다. 많은 성도가 다치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증언을 멈추지 않았고, 기어이 세상이 그 증언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소소한 언행 속에서 진정성이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그들의 실제 삶이, 동굴 안의 질서가 아니라, 동굴 밖 세상의 질서로, 그들이 말하는 복음의 기준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세상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동굴 밖 세상에 대해 뭔가를 이야기하고, 보여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 그러려고 애를 쓰고 있는지요? 예수가 선포하고, 오게 하신 그 하나님나라, … 참 된 세상, 지금도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그 주님의 나라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얼마나 살아내고 있는지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깨어 있는 성도의 삶이란 그런 모습이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셨고, 성경이 증언하는 그 세상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늘 마음과 생각을 열어놓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언하는 세상, 2천 년 후에나 현실이 될까 말까 한 그런 세상, 결국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나 비로소 이루어질 그 세상을,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아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오늘 이 예배는 그러한 삶의 결정체여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나라의 모델 하우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우리는 교회를 통해, 예배를 통해, 그 주님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그 경험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하지요. 여기 진짜 세상이 있다고, 여기 천국이 있다고, 이게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참 인간의 모습이라고, 와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지금 교회에 대한 세상의 판단이 어떠하든지 간에, 저와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가진 이 의미를 인정하고, 그 부르심을 축소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며, 영원한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걸 잊고 산다면, 우리는 결국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말겁니다. … 극동방송이라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이 있습니다. 저도 가끔씩 듣곤 합니다만, 들으면서 가장 은혜가 되는 건, 정작 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이 담긴, 그들의 짧은 방송 멘트입니다. 어떤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아나운서들이 꼭 이 멘트를 매번 반복하는데요, 이런 겁니다. “극동 방송을 듣게 하세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지금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그런 자부심으로 방송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적어도 그렇다는 것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모인 이 예배가, 적어도 그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든,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고, 우리의 부족한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증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허락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자부심조차 없다면, 우리는 보나마나 그냥 세상을 쫓아가기에만 바쁠 것입니다. 진짜 햇빛과 바람과 진리를 누리며 사는 사람답게, 세상을 향해 책임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 책임 있는 삶은 단지 너울을 벗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싸움은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며, 복합적이며, 영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하나 더 많아지는 것을 위해, 남들이 누리는 자유를 우리도 가지기 위해, 예수를 믿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오해될 만한 행동을 삼가십시오. …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늘 우리의 언행이 조율되어야 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너울이 아니라면 어디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또 무엇을 위해 우리가 헌신해야 할지, … 성령 안에서 고민하고 판단하며, 부디 주의 나라를 온전히 살아내는, 그런 저와 여러분 되기를, … 그래서 정말 하나님나라의 모델 하우스 같은 그런 교회를 우리가 함께 세워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