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 (2021년 1월 24일 주일 설교)
2021-01-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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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4~11: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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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21) 본문 31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 원합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 살면서 어떠셨습니까? 주신 말씀을 따라, 넘어질까 조심하며 살아보셨습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좀 더 말씀을 가까이 하고, 거기에 순종하면서, 그렇게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고자 애써보셨는지요? 사도의 권면처럼, 스스로 몸을 연단하고, 절제하면서, 하나님과 조금 더 깊이 교제하는 데 힘을 기울여보셨습니까? … 만약 아니시라면, 또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말씀이 잊히지 않고, 부디 우리의 삶에 오래 머물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 하나님 말씀을 가리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의 등불이라 하지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실족하지 않도록, 우리의 발밑을 비추는 등불, … 넘어질까 조심하라, 부디 저와 여러분의 그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 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더 조심하면서 늘 절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십시다.
아울러 여러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조금 더 실제적으로 반응했으면 하는, 설교자로서의 바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잘 들었다, 좋다, 은혜가 된다, 여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고이 간직하고 도전해보고, 결국 인내로 결실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지난 한 주 묵상한 누가복음 말씀 중에는, 유독 마음에 남는 말씀이 많았는데요, 그 중에서도 네 가지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 그 유명한 비유가 생각납니다. 다 아시지요? 길가와 돌 밭, 또 가시떨기와 좋은 밭, 이렇게 네 가지 밭이지요. 저는 특별히 길 가에 뿌려진 씨앗 부분이 마음에 오래 남는데요, 여러분 그 비유의 의미가 뭐라고 주님이 설명하십니까? 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마귀가 와서 그 마음에서 그 말씀을 곧장 빼앗아가는, 그런 마음을 ‘길 가’라고 하셨습니다. … 여러분, 말씀이 뿌려질 땐 마귀도 덩달아 바빠집니다. 아마 지금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주시는 말씀을 빼앗아 가기 위해 애쓰고 있겠지요. 그러니 여러분, 부디 깨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마귀에게 빼앗기지 말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것을 간직하여, 지켜 행하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가 되십시오.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나 듣는 여러분 모두의 마음을, 성령께서 그렇게 좋은 밭으로 일구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0장 후반부에는, 8장부터 이어져 온 고린도교회의 질문, 곧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에 대한, 바울 사도의 두 가지 결론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다 설명이 되었던 내용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실 겁니다. 저도 각 절을 따로 강해하지는 않고, 오늘과 다음 주에 걸쳐, 그 두 가지 내용을 각각 큰 틀에서 전체적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 앞쪽이지요, 22절까지는, 우상숭배와 그로 인한 식탁의 교제에 참여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 우상은 별 것이 아니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것, 또 거기 참여하는 것은 별 거라고 했던 말씀, 기억나시는지요? 네, 우상 자체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귀가 그 우상을 통해 인간에게 역사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상 제물을 먹을 때 먹더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만큼은 반드시 분별하여 피하라, 그것을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신다, 질투하신다, 이야기합니다.
이어지는 23절 이하의 뒷부분에는, 그럼 우상의 제물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그 기준들을 정리해놓고 있는데요, 사실 그리스도인은 뭐든 다 먹고 마실 수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행위를 통해 심각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는 선한 영향을 끼쳐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준은, 단지 나의 자유나 내 유익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이어야 한다고 사도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런 책임감 있는 삶을 살도록 구원을 받았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문제의 결론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 또 복음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 자리를 피해라, 또 이웃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라, 하는 말씀이 결국 그 뜻이지요. 그런데 본문에서 중요한 건 그 사랑이 어떤 대단한 일이나 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또 가장 일상적인 문제인, 먹고 마시는 행위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먹고 마시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복음의 직접적인 통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는, 결코 사소한 것이 없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지요. … 31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고,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기 이전에, 다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이 더욱 깊어지는 일이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목적이 되고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성도의 모습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16절), 주님의 식탁에 참여한다(20절), 하는 말로 표현합니다. 참여한다, 본문(16절, 17절, 18절, 21절 등)에 여러 번 반복되는 말인데요, 이 ‘참여하다’라는 말은, 여러분이 한 번쯤 들어보셨을 헬라어 단어인데,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깊고 친밀한 교제를 뜻하는 말이지요.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코이노니아’
네, 그런데 본래 ‘사귐,’ ‘나눔,’ ‘교제’를 뜻하는 이 단어가, 그럼 왜 본문에서는 ‘참여’라는 말로 조금 바뀌게 됐는가, … 여기에는 설명이 조금 필요한데요, 여러분,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둘째 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였지요. 맞습니까? 네, 거룩함을 잃어버린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
여러분,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이 어떻게 끝나지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완성하지요. 그리고 그 성막 가운데, 시내 산 위에 임했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히 임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성막을 향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모세조차도 성막에 접근할 수 없었는데요, 출애굽기가 바로 거기서 그렇게 끝납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보다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지만, 가까이 오셔서 인간 가운데 거하셨지만, 그 하나님을 향해 인간은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과 사귈 수 없었다, 도저히 하나님과 코이노니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모세조차도 불가능했다, 그것이 출애굽기의 결론입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느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 하나님 안에서 교제하며, 만족하고 즐거워할 수 있느냐, … 그 방법을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시고, 가르쳐주시기 위해 기록한 책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그리고 그 레위기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완성된 곳이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는 그래서 오직 한 가지 방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마련해주신 유일한 길,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께서 주신 살과 피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것을 기념하는 식탁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지요. 그래서 예배는 성찬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님과 사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속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와 깊이 교제하기를, 그토록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간절히 원하시느냐, 그 하나님의 갈망이 십자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십자가,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하는 그것이, 하나님께는 그토록 큰 기쁨이요, 그렇게나 큰 영광인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우리에게도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이지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우리의 생명이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 … 그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시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의 기쁨을 위해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깊이 교제를 나눌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충만한 만족을 누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결정적으로 이 부분이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분 안에서 교제하며 쉼과 만족을 누리는 것이 참 많이 부족하고 서툴지요. 어떤 다른 목적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또 내 이야기를 하고, 그러는 것이, 우리에겐 정말 큰일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단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저 같은 목사조차도, 어떤 이유 없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일이 늘 어렵습니다. 저는 성도들 때문에,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생각해보면 그냥 이유 없이 하나님을 찾는 때가 저도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시간을 좀 허비하고 낭비하질 못합니다. 하나님께는 많은 게 인색합니다. 이 부분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실은 그 다음의 거룩한 일들, 영적인 일들이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즐거워해서, 그 힘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데, 그 일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본문을 시작하면서, 14절에서, 그런즉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 저는 이 말씀이,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여러분, 어떤 게 우상입니까? … 다른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사귐에 힘쓰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우상’ 아닙니까? 우상이 어떤 거라고요? 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 깊이 사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이 실상 우상입니다. 우상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구체적인 어떤 신(神)의 형상, 어떤 우상의 형상 안에서 역사하던 마귀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는 다른 전략으로 역사합니다. 어디 무서운 영적 존재로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랬듯, 어디 다른 우상 신전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를 주의 식탁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삶의 모든 올무 가운데 사탄이 역사합니다. 우리를 주님과의 사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 사귐을 무슨 어려운 신앙적 숙제처럼 만드는, 모든 환경 속에 우상이 존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단지 바쁘고 피곤해서가 아닙니다. 사탄의 현저한 권능이, 사탄의 가장 큰 에너지가, 그 일을 방해하는 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인간이 하나님과도 코이노니아 하지만, 또한 귀신과도 코이노니아 할 수 있다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20절과 21절이지요.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한다, …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양자택일밖에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 그래서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여기 ‘피하다’고 옮겨진 동사[퓨고]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리를 두다’ 이런 게 아니라, ‘냅다 도망가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도 대부분 ‘급히 도망가다’로 옮겼는데, 우리말 번역은 너무 약하게 된 셈이지요. … 여러분, 우상은, 우리가 적당히 컨트롤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존재이고, 시한폭탄 같은 그런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거기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달아나야 하는, 그런 대상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들이 무엇인지, 어떤 우상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지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질서를 상실하고 그저 이유 없이 분주한 일상이나, 늘 손에서 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이나, (저의 경우처럼) 의미 없이 쳐다보는 TV나, 또 현대인들이 쉼 없이 쳐다보는 주식 현황이나 … 그 어떤 것이든 귀신의 식탁이 될 수 있습니다. … 마귀는 마치 우리가 그것들을 지금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걸 멈출 수 있다, 절제할 수 있다, 그래서 결심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을, 우리 삶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상은,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이 그걸 우상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위험성이 있습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귀신의 식탁에 앉아,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코이노니아가 삶의 중심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정돈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우리는 우리의 힘과 시간을 다시 분배해야 합니다. ‘거룩한 코이노니아’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 하고, 또 성도들과 교제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그 습관 속에 역사하는 마귀의 일들을 분별하고, 거기서 단호히 도망쳐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이제 고기가 아닙니다. 고기를 제공하여 우리를 주님의 식탁에서 멀어지게 유혹하는 대신, 주님의 사랑을 넉넉히 누리고,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그 시간들을 낭비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무슨 시간과 효율성의 전문가처럼 느끼게 만드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 여기 이러고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게 만들고, 주님 안에서 희희낙락 하고 있다가는 세상에서 뒤쳐질 것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주일에 적당히 예배나 드리면서, ‘뭐, 이걸로 충분해. 나는 이렇게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나를 인도해주실 거야. 이 정도면 나는 어느 정도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 착각하게 만들고, 또 다시 습관에 젖어 살아가게 합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그러면서 우리가 행하는 일들을 한 번 보십시오. 과연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을 나누는 일들이 가능합니까? 스스로 생명으로 충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됩니까? …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코이노니아가 삶의 중심이 되도록, 일상을 정돈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부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영화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 나누는 교제의 식탁은 단지 나와 주님, 두 사람만 나누는 그런 코이노니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들과의 교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오늘 이 예배이지요. 우리는 홀로 예배하지 않습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그게 도저히 안 되면 이렇게 온라인으로 서로 얼굴을 보면서라도 반드시 함께 예배합니다(유튜브 예배의 어려움이 그런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제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식탁에 함께 앉아 성령 안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영적인 식구들의 만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코이노니아 안에서,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어떤 것인지, 더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을 더욱 풍성하게 공유하게 됩니다.
어제 QT 말씀이었지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사람이 너무 많아 도저히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어떤 사람이 대신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기 위해 지금 밖에 와 서 있다.”고.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진정한 예수의 가족이 누구인가, 누구와 예수는 한 식탁에 앉는가, … 저와 여러분은 어떤 관계 안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말씀이지요. 참 된 가족,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와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눠야 하는가, 여러분, 주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극단적으로 개인주의화 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은, 이러한 거룩한 코이노니아가 진정한 의미에서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홀로 하나님을 믿고자 합니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지만, 솔직히 그게 편하고 그게 더 쉽고, 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본래 그런 게 아니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현상은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가 매주 하는 신앙고백, 사도신경을 기억해보십시오. 사도신경의 마지막 단락이지요. “…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고, 그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성도의 교제’가 뭐라고 믿음의 고백까지 해야 합니까? … 그것이 그냥 인간의 사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축복된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이 신앙의 고백이, 이제 정말 심각한 위기, 진정한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교회의 큰 숙제였습니다.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우리는 확인한 바 있었지요. 가장 온전하고 거룩했다는 초대교회에서조차, 분열과 다툼은 교회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라는 취지의 말씀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때도 잘 안 된 겁니다. 또 잘 모이고, 잘 연합한다 하는 교회는 실상 끼리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합이 아니라 분열의 역사가 교회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말씀드린 성찬식, 성도들의 연합을 그 본질로 가지고 있는 그 중요한 성찬식의 문제 때문에,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분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것이 엄연한 교회의 역사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거룩한 친교, ‘거룩한 코이노니아’의 큰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도 대부분이 아직 서먹하고 별로 친밀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만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지요. 코로나 문제도 있을 것이고, 또 비교적 다양한 연령대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삶의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또 물리적인 거리도 매우 멀지요. 더구나 작년에 처음 얼굴을 본 새가족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조건들은 실상 문제가 아니라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모르니, 그만큼 나눌 내용도 많습니다. 또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그만큼 선입견이 없지요. 정말 진실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기에 별로 부담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출발선에 선 기분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교회를 세워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몸이 좀 편하고, 마음이 편한 방향으로, 또 교회와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갈 것인가, … 아니면 때로 불편하고, 피곤하고, 또 때론 짜증도 나고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그 ‘거룩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나라를 향해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지금 놓여 있습니다.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았고, 그것만이 우리가 참으로 사는 길이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권면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지체로 부르신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식탁에 앉아 교제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정돈하십시다. 거기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지불하고, 대가를 치릅시다.(*) … 목사인 저와 성도 각 개인이 좋은 관계를 맺는 것보다, 성도 서로 간의 교제와 연합에 더 초점을 맞춰서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목사는 기본적으로 여러분을 섬기는 자로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랑 잘 지내는 게 뭐가 대수겠습니까? 교제의 지평을 더 넓히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다가가십시오.
새로 세워진 사역팀에서는 올 한 해 더 적극적으로 교제의 장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의 위협에 조심하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서로의 삶으로 더 깊이 잇대어 들어가야 합니다. 또 앞으로 세워질 순장님들께도 미리 부탁드립니다.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 주시고, 대안을 함께 모색해주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늘 예배 시작 전에 부르는 찬송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우리 모일 때, 주 이름 높이리. 우리 마음 모아 주를 경배할 때, 주님 축복하시리. 주님 축복하시리.” 사랑하는 여러분, 그 찬송의 노랫말이, 진실로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 삶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고, 힘껏 멀리하십시오. 우상은 결국 나만을 위한 신앙 속에서 자라는 괴물입니다. 그 이름이 뭐든, 그 이름이 예수든 아니든, 그저 나와 내 피붙이 가족을 위해서만 그 이름을 부른다면, 그건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 이기심에 갇힌 교제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차려진 식탁에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또 주의 지체들과 함께 거룩한 교제를 누리는 일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거기서 누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길로,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풍성이 누리는 길로 친히 우리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오늘 주신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의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