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내 상이 무엇이냐 (2021년 1월 3일 주일 설교)
2021-01-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성탄절 후 두 번째 주일 메시지
----------------------------------
고린도전서 9:1~18, 내 상이 무엇이냐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파일
cor18
.mp3
파일 다운로드
(고린도전서 강해 18) 본문 18절의 ‘내 상이 무엇이냐’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바울 사도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처음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가,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이후에는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평생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했고 결국 복음 때문에 순교한 위대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를 통해 복음이 유대 땅을 벗어나,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됐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가장 많은 성경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체계를 정립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물론 성경을 기록한 분들이 계십니다만, 바울 사도에 비할 바는 못 됩니다.
하지만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이런 바울을 다 인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평생 외로움이라는 적과 싸우며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제자들에 의해 처음 세워진 교회를 가장 열심히 박해한 사람이었다는 이유가 컸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이른바 사도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과연 바울이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래 ‘사도’라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을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위임을 받아 보내진 사람들, 그들이 사도입니다. 그렇게만 보면 바울은 사도가 맞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친히 그를 택하여 따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행 9:15).
하지만 성경에는 그보다 훨씬 축소된 범위의 ‘사도’ 그룹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생각해보면, 바울의 사도성에는 약간 애매한 부분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 따르면(행 1:21~26), 사도는,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와 함께 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의 목격자여야만 하고, 그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여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열두 사도’라는 특정한 사도 그룹이 형성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열두 제자’로 한정된 그룹입니다. 나중에 가룟 유다가 여기서 빠지고, 맛디아라는 제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데요, 이 맛디아 역시, 말씀드린 이 협소한 의미의 사도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조건에 맞는 사람을 따로 뽑아서라도, 그 ‘열둘’을 채우는 이유는, 그 열두 사도 그룹이, 구약의 열두 지파와 같이, 전체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21장)에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과 함께,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요, 그 예루살렘 성의 열두 개 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또 열두 개의 주춧돌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후의 모든 하나님나라 백성 전체가 그렇게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이름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그런 사도의 기준에는 들지 못합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그가 들었을 뿐이라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고(행 9:1~9), 바울은 이때 주님을 ‘보았다’고 이야기하지만(고전 15:8) 실상 그것이 눈으로 직접 주님을 본 것이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바울을 사도라 칭합니다. 말씀드린 바로 그 기준을 이야기했던 누가조차도, 바울을 직접 ‘사도’라 부르고(행 14:14) 있고,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라는 뜻의 사도행전의 절반 이상이 바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바울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사역했던 바나바나, 예수님의 친동생으로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야고보 역시도 사도라 부릅니다. ‘열두 사도’라는 특정한 그룹에는 속하지 않지만,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는, 이런 바울의 ‘사도 됨’에 대하여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영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당시에는 ‘열두 사도’의 권위가 그만큼 견고했기 때문이고, 바울은 분명, 교회 박해라는 원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 교회 안에는, 이른바 ‘자칭 사도라 하는’(계 2:2) 거짓 사도들까지 많이 활동하고 있어서,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검증 역시, 덩달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을 스스로 항변하는 내용을 성경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후 15:9) 하고 겸손하게 말하다가도,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한다.”(고후 11:5)고 하거나,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전 15:10)고, 조금은 민망할 수 있는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조차,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딤전 2:7)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것을 빌미로 바울을 공격하는 일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평생 안고 살아야 했는데요, 심지어 바울이 직접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고린도 같은 곳에서조차 이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속 바울 사도의 어조가 매우 격앙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라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라면, 다시 말해 바울이 가진 사도직의 결실이요, (그래서 2절 말씀처럼) 바울이 사도라는 것을 보증하는 일종의 인장(印)같은 존재가 그들이라면, 적어도 고린도교회만큼은 자신의 ‘사도 됨’을 부정하는 식의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바울 사도는 매우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일부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의심한 근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 네, 앞서 제기한 기준 외에도 다른 부분을 문제 삼았는데요, 그것은 바울이 사도로서 마땅히 교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생계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어가며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 안에도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가 화두입니다만, 바울을 비판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런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고, 또 그가 진정한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직에 있어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교회에 어떤 경제적인 요구를 감히 하지 못한 채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거라고 오해하기도 쉬웠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답답한 일이지요. 그래서 본문에도 그런 심정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과 같은 과격한 표현이 나오고, 또 저는 원문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학자들은 본문의 헬라어 문장 일부가 불완전한 형태라고 하는데요, 그만큼 바울의 감정이 격해져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으로(고전 7:28),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놓고, 스스로 힘들게 일하면서 사역하고 있는데, 그것을 오히려 비난의 빌미로 삼아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자발적인 권리 포기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지난주 8장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 권리, 힘, 곧 ‘엑수시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랑하는 지체가 실족하지 않도록, 그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겠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상식의 기준으로 보나, 로마법의 기준으로 보나, 구약의 율법의 기준으로 보나, 예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보나, 바울은 사도로서, 사역자로서 마땅히 가진 권리들이 있습니다. 먹고 마실 권리, 가정을 꾸리고 가족의 지지와 지원 속에 일할 권리, 사역을 위해 교회에 물질적 지원을 요구할 권리, 등등의 수많은 ‘엑수시아’들이 있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스스로 내려놓은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너무 유난을 떠는 건 아닌가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당연한 권리조차 스스로 포기한다고 이야기합니까? …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와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큰 기근으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굳이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또 가장 중요한 이유도 아니지요. 비록 부담은 좀 되겠지만, 고린도교회가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해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울은 이른바 1인 가구이니까 상대적으로 교회의 부담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모인 고린도교회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스스로 일하여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은, 12절 끝에서 밝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다. … 이러한 장애가 어떤 것들인지는 본문 15절부터 18절 내용 가운데 설명되어 있는데요, 직접적인 서술 형태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하는 일은, 먹고살기 위한 어떤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위임된 일입니다. 당연히 다른 어떤 것도 그 일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라는 부르심과 맡겨진 사명만이 그가 그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당연히 그 일에 대한 물질적 보상이나 사례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그 일 자체가, 얼마간의 보수로 값이 매겨질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을 가진 일이라고 그는 여기고 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일에 대한 사례로는, 오직 그 일 자체뿐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 사도라는 직책이 가진 권위와 그가 하는 일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려고 한다면, 여러분 매달 얼마씩 바울에게 사례비를 줘야 합리적이겠습니까?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 죽음의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줬을 때, 그에게 얼마의 사례를 하면 적당하겠느냐는 질문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형편에 맞게 일정 부분 사례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되겠습니까? 그냥 말 그대로 감사와 존경의 작은 표시일 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자신의 일에 대한 사례는 빈 칸으로 내버려둡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영광과, 값으로 매겨질 수 없는 가치가, 그 사도의 부르심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고 믿기에,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가 받는 얼마의 생활비를 그 사명의 목적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는 역설적으로 그 일에 대한 어떤 보수나 사례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다 이 부분을 이해하고 인정해준다면, 사실 바울 역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복음을 처음으로 접하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사도가 무엇인지, 부르심의 영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복음의 가치와 영광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례비는, 그것을 받지 않는 것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모습이 자칫 당시 유행하던 철학자나 종교인의 행태와 구별되지 않음으로써, 복음에 장애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많은 철학자나 강연자들이 그렇게 보수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처음엔 값없이 진리를 가르쳐주는 듯싶다가, 나중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생기면, 상당한 사례를 받고 개인교습을 해줬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예수의 복음도, 자신의 ‘사도 됨’도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사도직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내부에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이 받을 보상은 오직 보상을 받지 않는 것이며,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자신의 사도 됨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 참 힘들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여러분,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과도 통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음이란 은혜로, 곧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소식이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그 복음의 본질을,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값없이 받아 누린 십자가의 은혜가, 아주 작은 오해도 없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스스로 고된 길을 자처합니다. 그에겐 그렇게라도 전해져야 할 진리가 있고, 그렇게라도 고백되어야 할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은 더 더욱 아니지요. 자기의 수고를 알아주고, 자신의 사도 됨을 인정해 달라고 쓴 편지도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그러한 자신의 삶과 사역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왔습니다. 바울에게는 굳이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과 동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받은 인정으로 그는 이미 충분하고, 그 사명에 대한 보상과 권리를, 이미 충만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을 오해하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그 의도를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사도 됨을 변호하기 위함이고, 또한 자신이 가진 권리를 모두 행사하는 것이 힘이요, 자유인 것으로 착각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마땅히 누려도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그 자유를 누리는 것이 복음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됨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뭔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본문에서, 더 큰 목적과 가치를 위해 그것을 능히 하지 않을 때 참으로 자유롭다고 이야기합니다. 지난주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지요. 먹을 수 있는 자유보다 먹지 않는 자유가 더 강하고 온전한 자유임을 사도는 강조했습니다. 그 자유를 통해 우리는 결국 다른 누군가의 신앙과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그가 믿음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지금, 아무 이유 없이 내가 가진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일어나도록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 최소한의 마땅한 권리마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것이 나의 권리임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오늘 바울도 그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타인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내가 조금 구차해질지언정, 분명한 선을 그어줘야 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지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말씀하셨습니다(마 7:6). 권리를 찾아야 할 땐 반드시 찾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의(義)와 보상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만 하는, 어려운 믿음의 도전 앞에 서 있다는 것 또한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 권리를 알고 되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성도의 온전한 권리의 절반에 불과함을, 우리에겐 그 다음의 싸움이 남아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기도 먹지 않고, 또 자비량으로 힘들게 사역하며 끝내 고백하고 싶어 했던 그 복음의 진리, 값없이 받은 은혜와,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는 존귀한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도 어떻게든 세상 속에서 증언해야 하는 소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받을 보상(보수, 삯[미스토스])은 오직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진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그 자체라고 했습니다(18절).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이제 설명을 다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혹시 그런 포기된 권리와 값없이 행하는 헌신이 있습니까? … 여러분의 삶과 일을 통해,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든 고백되고 있는지요? … 적어도 나 자신의 어떤 모습으로 인해 복음에 장애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늘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여러분,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고민을 실제로 살아내는 모습은, 우리 각각의 삶의 모양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우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말 바울이 말하는 그 자유와 만족이 우리 안에도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일 겁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가 주신 소명 안에서 누리는 온전한 만족과 인정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삶으로 복음을 고백하는 이 어려운 도전을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사람들로부터 사도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지만, 그러나 끝내 사도로서 살다가 사도로 죽었습니다. 그의 사역들은 하나같이, 그 어떤 사도도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었습니다. 수많은 비판과 비난이 날마다 쏟아졌지만 그는 그 일들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또한 자기연민에 빠져서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습니다. 수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대답하고 변명해야 하는 그 구차한 수고를 다 감내하면서도, 그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다 마쳤고, 그 모든 사람들을 용납한 채로(딤후 4:16),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는 이미 주님 안에서 사도였고, 주님 주신 소명 안에서, 그가 받을 모든 보상과 자유를 넉넉히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 사명 안에서 이미 보상을 받은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나 존경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바울은 삶으로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는 것의 의미가 그런 거라고도 했지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고, 존귀하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심지어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뭐라고 하든,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정죄하며,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의 초점이,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고,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일에 맞춰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부족함 없이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한결 수월하게,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을 수 있는 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부디 그 온전한 자유와 의로움을 풍성히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권리를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그 권리를 내려놓기 위한 싸움에 눈을 뜨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늘 고민하며 살아가십시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받을 유일한 보상은, 오직 값없이 복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랑은, 내가 가진 권리를 다 쓰지 않았다는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 안에서, 좁고 존귀한 그 길을, 부디 좌우로 치우침 없이 끝까지, 올곧게, 만족하며 즐거워하며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