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없는 자 같이 (2020년 12월 20일 주일 설교)
2020-12-2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대림절 네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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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25~40, 없는 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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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16) 본문 29절의 ‘없는 자 같이’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고린도교회의 질문에 답하면서, 결혼과 할례의 예를 들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이, 우리 삶의 현실을 바꾸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며 거기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살펴봤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 모습 그대로,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 여러분, 한 주 동안 고민해보고 또 실천해보셨습니까? … 저도 나름대로 교회와 목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보낸 한 주였는데요,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주신 조건대로, 그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결혼이라는 이 소재는 계속해서 중요하게 다뤄지는데요, 특별히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녀에 대해 다루면서, 지난주에 이어 사도는 이번에도, 표면적으로는 결혼과 재혼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은 성도의 삶의 본질에 대해 강하게 다시 한 번 도전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모습 그대로 살아가라’는 지난주 메시지에서도 조금 더 깊이 들어간, 그런 말씀입니다.
우선 사도는 처녀, 총각의 결혼 문제를 언급합니다. 본문 25절인데요, 여기 나오는 ‘처녀’[파르테노스, marriageable, 혼기가 찬]라는 표현은, 36절 이하에서 ‘약혼녀’라는 표현으로도 언급되듯이, 그냥 일반적인 미혼 여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미 약혼을 해서 결혼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그런 여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이고요. 지금은 약혼 자체가 그리 일반적이지 않습니다만, 당시에는 아주 어린 나이에 중매로 약혼을 하고, 사춘기가 지나자마자 곧바로 결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혼할 사람이 정해져 있고, 또 사회 관습대로라면 이제 결혼을 앞둔 상황에 있는 남녀에게, 오늘 바울 사도는 뜻밖의 권면을 합니다. 이것이 직접적인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히면서(25~26절),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그냥 처녀와 총각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약혼까지 했고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혼기가 다 됐는데도, 그냥 지금의 모습대로 지내라는 이유에 대해 바울 사도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 네, 26절에 보면,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그게 좋겠다고 말합니다. ‘임박한 환난’ …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중요할 텐데요, … ‘임박한 환난’이라고 하면, 보통은 예수님의 재림을 앞두고 교회와 성도에게 일어나는 환난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본문 역시 그런 측면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만, 다만 26절이 말하는 이 ‘임박한 환난’은, 시간적으로 볼 때, 앞으로 곧 일어날 환난이라기보다 이미 지금 겪고 있는 환난을 의미한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임박한’이라고 번역된 단어[에니스테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현재의,’ ‘지금의’라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거의 다 ‘present’라는 표현을 써서 ‘현재의 고난(재닌)’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다른 한글 성경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재난을 생각한다면’(공동번역) 그냥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옮긴 겁니다. 이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고난이 있고,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굳이 관습에 따라 결혼하지 말고, 그냥 지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현재의 고난’이 무엇인지, 사도와 고린도교회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그저 추측해볼 따름입니다. 다만 고린도전후서의 말씀으로 비추어볼 때, 이것이 말씀드린 그런 신앙적 박해까지는 아직 아닐 거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고난은 당시 근동 지역을 휩쓸었던 극심한 가뭄과 기근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되기 얼마 전, 주후 약50년 전후로 그리스 세계 주변에는 대규모 곡물 부족 현상이 발생하는데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많은 지역에서 양식이 고갈되는 문제가 발생했고 고린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그보다 5년 정도 전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사도행전 11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성경은 ‘천하의 큰 흉년’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만, 그것이 본문의 고난과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고린도에도 이 기근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 나중에 11장에 가서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몸이 약한 자,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도 적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어서(11:30), 이러한 기근의 영향이 특별히 가난한 성도들의 가정에 더욱 큰 고통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28절 끝에서 말합니다. 가뭄과 기근처럼, 생존이 걸린 고난이 이미 그들의 삶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독립이 어려운, 지금 막 사춘기가 지난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면, 그 삶이 어떠할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배우자가 될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더 많을 테니, 상황은 더 심각하지요. 28절에 언급된 것처럼, ‘육신의 고난’이 분명히 뒤따를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 형편만 생각해봐도 금방 이해가 되지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금 상황에서 무턱대로 결혼했다가는 피차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을 수 있음을 알기에,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청년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이해하고 또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좀 삼가는 것이 옳겠지요. 오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바울의 권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릴 때 약혼해서 때가 됐으니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게 아니라, 지금이 큰 고난의 시기임을 염두에 두고, 정말 아끼는 마음으로, 그냥 지내며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그 일에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을 읽으면서 제 마음이 오래 머물렀던 것이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는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 오늘 교회 안에서도 꼭 필요한 마음이지요. 힘든 시기에는, 어떤 사회적 관습이나 종교적 규율보다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일 겁니다. 누구나 다 힘든 이 시기에,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께 구해야 할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직 나만, 내 가족만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돌보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이 어둠의 때를 지내면서도, 우리는 분명 또 하나의 빛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서로를 아끼는 마음, 또 우리의 어려운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주님의 마음을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에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삶의 환경이 이렇게 어려워지면, 누구나 죽음과 종말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마련이지요. 전 세계적인 기근이나 경제적 불황이 찾아왔을 때 종말을 생각하는 건, 비단 종교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본문에서 주님의 재림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표현, 예컨대 29절의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나 31절의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라’ 등과 같은, 그런 종말론적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생존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사도는, 인간의 유한한 삶, 다가올 성도에 대한 박해, 또 주님의 재림에 대한 문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면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종말론적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종말론적 삶에 대한 오늘 사도의 메시지는, 본문 29절에서부터 31절까지의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어떤 구절 가운데 잘 드러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아내가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노니’라고 운을 떼는 것은, ‘내가 진짜 말하려고 하는 게 이거다, 내 이 말을 명심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내용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아내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도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물론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을 다 부정하며 살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결코 우리의 근본적인 삶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결정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들, 지금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일들, 그래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는 무언가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결코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놓치지 말고, 거기 얽매이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충분한 내적 거리를 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요? 산속에 들어가 사는 ‘자연인’도 아니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는 왜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크게는 두 가지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요, 우선 … 29절 앞부분과 31절 뒷부분에서 마치 중간에 있는 말씀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이 표현에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은,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그러하며,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가는 것, 소멸해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여기 이 ‘그 때’를 분명 주님의 재림과 종말의 때로 이야기하고 있겠습니다만, 꼭 그렇게만 보지 않아도, 이 말씀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종말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그 때가 단축하여졌다는 말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간다는 말은 사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지나가기에, 여기 계속 머물지 못하고, 다음에 오는 무언가에 그 자리를 내어줘야 하기에,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늘 죽음을 전제로만 존재합니다. 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남아 있는 시간은 계속해서 단축되어지고 있지요. 모든 생명이 다가오는 종말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온 세상을 뒤져 겨우 찾은 궁극적인 지혜가, 오늘 본문 말씀과도 비슷한,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2020년 한 해가 이렇게 흘러지나가는 걸 무심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12월, 요즘에는 더 실감나는 이야기입니다. 네, 모든 것이 지나갑니다. 우리가 감각하는 모든 것, 우리 눈에 보이는 총체적 현실이 결국은 다 지나갑니다. 그렇게 소멸을 향하여 우리를 지나쳐가기에,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성도의 삶을 근본적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하신 하나님에 잇대어, 그분을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여긴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기서 길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사도는 경고합니다. 비록 소멸을 향해 지나가는 것임에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하는 성도들에게, 사도는 염려의 문제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것에 대한 염려로 인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고, 정말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을 염려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이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이것만은 반드시 지켜내야만 될 것 같던 것들, 너무나 중요해서 세상의 전부처럼 여겨졌던 것들, 없으면 죽을 것 같던 것들마저, 지금은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어린아이에게 절대적인 가치요, 구원과도 같았던 그때 그 구슬과 딱지들이 어느새 아무 가치도 없게 되고 만 것처럼, 여러분의 아파트와 자동차와 주식 같은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그 순간도 곧 다가올 것입니다. 혹시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십니까? 우리는 결코 그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그 순간이 이미 현실이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맛보았고, 그 구원의 경험을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지나가는 것들에 다시 마음을 쏟고, 그것에 대한 염려에 빠져서, 정작 우리가 처한 영적인 현실과 그 영원한 구원의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들기 위해,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미달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삶의 모든 에너지를 그 지나가는 것들에 다 쏟아 붓고 살아갑니다. 그래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자괴감에 빠지고, 어쩌다 그 기준에 드는 삶을 살게 되면 교만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쳐지나가 버리지 않는 것, 영원한 것, 참 된 것에 마음을 써야 신앙도 유익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안에 있고, 그 하나님이 참으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단히 붙잡고 살아갈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신앙이 주는 진정한 만족을,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에 대해 고민하고 염려하라고, 그러면 세상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염려가 사라질 것이라고 담대히 권면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매우 중요한 선제공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결산하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헛된 염려에서 벗어나,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35절).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거룩한 고민이 있습니까? ……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의 어떤 염려로 채워져 있다면, 그 일은 주님께서 염려하시도록 주님께 맡겨드리고, 여러분은 비록 그 염려의 상황 속에서도, 부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염려해보라고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삶의 목적은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The purpose of life is the life of purpose).”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을 좌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영원한 생명 가운데 나를 붙잡고, 나를 보존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여러분 깨어 있어 보십시오. 소멸해가는 지금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그 주님 나라의 가치에, 여러분의 생각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보십시오. 흐트러진 우리의 삶이 품격을 갖출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이건 삶의 문제이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알고 있고 또 여러분에게 설교하고 있다고 해서 제 삶도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늘 믿음의 문제이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하는 지혜를 깨달았을지는 모르지만, 솔로몬은 그 염려 없는 삶에 실패했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삶도 살지 못했습니다. 지혜보다 중요한 것이 순종임을 기억하시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크게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그런 생활방식을 조금씩 더 발전시켜 가셔야 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에게 억지로 떠맡기는 일이나, 세상이 우리에게 억지로 소유하라고 하는 것들을 분별하여 가급적 삼가며 사십시오. 헬라어로는 ‘염려하다’[메림나]라는 말과 ‘나뉘다’[메리조]라는 말의 어원이 같습니다. 마음이 나뉘고 갈라지는 것, 어떤 하나에 온전히 마음을 쏟지 못하는 것이 염려의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내 가족이나 내 소유, 나의 일에 대한 염려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그 모든 것을 친히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먼저, 그리고 온전히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선다는 말씀(사 40:8)을 기억하시고, 다 지나가 소멸하는 세상 속에서, 다시 영원한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착념하십시오. 그러면 ‘마치 없는 것처럼’까지는 어려워도, 적어도 남들처럼 죽을 둥 살 둥 그렇게 세상에 매여 살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요한 사도는 말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지나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살며,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보증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모든 지나가는 것들과 함께 휩쓸리지 않도록, 부디 가진 것, 쓰는 것, 경험하는 것들을, 마치 그것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단순하고 소박하게 누리며, … 서로를 아끼는 일에 힘쓰며 살아가십시다. 우리의 그 모든 결단과 실천에 대해 심판하실 주께서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