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출애굽기 강해 76.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

2020-12-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 20201202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35:1~36:7,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 ​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첨부파일 exo76 .mp3 파일 다운로드 ​ 이제 출애굽기 강해도 후반부로 들어가고 있는데요, 오늘부터 살펴보게 되는 3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에는,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지시에 따라, 앞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성막을 완성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그렇게 완성된 성막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록하며 끝나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성막의 완성이 실질적인 출애굽기의 완성이 되는 셈입니다. ​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출애굽기 전체의 구조를 생각해 보면, 1장부터 18장까지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그들을 시내 산까지 인도하시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19장에서 24장까지에는 그 시내 산에서 맺어진 언약에 대해 나오지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과 그 세부적 율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5장부터 31장에는 오늘 언급되고 있는 이 성막의 자세한 설계도가 등장합니다. 또 32장에서 34장까지는 금송아지 사건과 모세의 중보기도가 나오고, 오늘부터 묵상하는 마지막 35장에서 40장까지는, 그렇게 주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완성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러한 전체적인 구조를 생각해보면, 언약과 율법에 대한 부분, 특히 성막과 관련된 내용이 출애굽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체 40장 가운데 약 절반 정도가 이 내용인데요, …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단순히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는 과정, 더 나아가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 속에 ‘함께 거하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탈출, 출애굽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성막을 통해 하나님이 그 백성 안에 거하시고 그들과 참으로 동행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 그런데 우리 신앙의 목적도 마찬가지이지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 구원의 전부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삶의 매순간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복 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성도의 신앙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출애굽기를 마저 묵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 말씀대로 성막이 지어져가는 걸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삶의 성막도 더 온전해지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도 더욱 깊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말씀드린 것처럼 사실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내용 대부분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한 번 읽고 묵상한 바가 있었습니다. 성막의 설계도와 재료들을 설명하실 때 이미 다 나왔던 내용이지요. 그럼에도 본문에는 다시 그 부분이 그대로 언급되고 있고, 그 말씀대로 백성들이 준비한 것으로 성막을 지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40장까지 계속 그런 구조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반복하고, 그대로 백성들이 성막을 완성했다, 말씀하는 거지요. ​ 이런 반복은 때로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기록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성막을 건설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성막의 세부적인 부분까지도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온전히 순종하여 성막을 만들었다, 이걸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 실제로 남아 있는 출애굽기 본문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구절 중의 하나가, 본문 36장 2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입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 듣기만 해도 참 기분 좋아지는 표현인데요, 그런데 이러한 순종은 앞서 금송아지 사건에서 보여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깊은 인상을 줍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하나의 포괄적인 명령조차 지키지 못했던 그들이, 여기서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만들기 위한 아주 세부적인 부분들까지도, 온전히 순종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이러한 변화를 통해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어떤 신이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이방인들과는 결코 같은 족속일 수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신을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공간, 곧 성막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시간도 구별해야 하지요. 오늘 본문 맨 앞에도 안식일 규례가 나옵니다만, 안식일을 비롯한 여러 절기들은 이른바 ‘시간의 성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한 시공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 이처럼 신을 만들어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오시는 하나님을 위해 지금 여기 이곳에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대림절을 지내는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정욕이 빚어낸 거짓 우상들을 우리 마음에 자꾸만 만들어내고 또 섬길 것이 아니라,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 내가 도둑처럼 오겠다 하신 주님 앞에서 늘 순종함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 깨어 있는가, 스스로 확인도 하고, … 또 깨어 있는 삶이 어떤 삶일지 고민도 하면서, 우리의 몸, 우리의 삶이라는 성막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그렇게 바른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 또 한 가지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변화된 모습을 기록하면서, 성막을 준비하는 그들의 헌신에 대해서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 보면, 성막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재료에 대해서 모세가 이렇게 말하지요.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 그 외의 많은 재료들을 이야기합니다. ​ 또 그 재료들로 실제 성막을 만드는 사람들의 기술과 노동력의 헌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0절 말씀처럼, “무릇 너희 중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다 만들지니”라고 합니다. 본인이 가진 능력대로, 기술대로, 성막에 필요한 여러 기구들을 만드는 일에 헌신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네, 21절 말씀처럼, 마음이 감동된 모든 사람,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성막에 필요한 재료와 기술과 노동력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기 ‘마음에 감동된 모든 자’, ‘자원하는 모든 자’라는 이 표현들은 이후로도 본문에 계속 등장하지요. 정말 많이 나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계속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여러 번 반복됩니다. 실제로 본문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하나님께 자원하여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나 ‘어쩔 수 없이’, 혹은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가 아닙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거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움직여진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각자 자기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바른 예배의 본질일 것입니다. 본문에 반복되는 이 ‘마음에 원하는 자’(36:2)라는 표현을 문자대로 옮기면, ‘마음이 그를 들어 올린 사람’입니다. 헌신을 자원하는 마음이 그 사람을 들어 올린다는 것인데요, … 그 마음이 그 사람을 들어 올려 그 사람 자체를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산 제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본래 ‘헌물’이라는 히브리어 명사 [터루마]의 기본 뜻이 ‘들어 올리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자원하여 헌신하고자 할 때, 그 마음이 우리를 들어 올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물이 되게 합니다. 예물을 드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의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고후 8:5,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 마음의 감동이, 자원하는 마음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 마음이 우리 자신을 하나의 산 제물로 승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과 그 예물을 구별하여 따로 받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창세기 말씀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는지, 왜 아벨의 것만 받으셨는지, 성경은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만, 성경은 이 대목에서 표현하기를,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기록합니다.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 자신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의 제물만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람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적어도 아벨은 그의 자원하는 마음을 담아 기쁨으로 드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 여러분, 하나님은 그 자원하는 마음을 통해 일하시고, 또 그 마음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 성막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물 처소를 짓는 중요한 일인데도, 하나님은 어떤 강요나 책임을 부과하지 않으십니다. 각 지파마다 얼마씩, 누구는 얼마씩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것에 부족함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인데, 그래서 성막을 만드는 일에 차질이 생기면 큰일인데도, 하나님은 사람의 감동에만 맡기십니다. 반대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너무 많이 가져와 남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저 자원하는 마음에 의존하십니다. 어떤 책임이나 의무로 하지 않으시지요. 그들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자유를 얻은 백성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그저 종교적 행위를 원하는 우상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했습니다. 마음의 감동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성막에 필요한 것들을 열거하고, 마음에 원하는 걸 드리라고 말하자, 서로 논의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너는 얼마, 나는 얼마, 이런 식으로 자체적인 할당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이 모세의 말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는데요, 여러분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막에 필요한 것들이 선포되자 다 각자 자신의 처소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감동된 자들이 모두 나와서 여호와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 여러분, 저는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와 “내가 이걸 헌신하겠습니다!” “내가 이 부분을 담당하겠습니다.” “저희 가문은 이걸 하겠습니다, 저걸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졌을 겁니다. 서로 눈치를 보게 됐을 것이고, 군중심리에 휘둘려, 마음에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아예 1/n로 나눠서 하자고 말하는 합리적인 제안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분명히 자원하는 사람, 마음에 원하는 사람들이 감당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각자 기도하고 생각하여 정말 마음에 감동이 된 사람들이 각자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남들 하니까 나도 해야 한다, 이게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주시는 감동만으로 결단하고 정직하게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첫 성소는 그렇게 자원하는 마음을 통해, 스스로 예물이 된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 또 한 가지, 이 드려진 예물들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부분은, 그것이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던 것, 쓰고 있던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본문 5절을 다시 보시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야기한 내용의 첫 마디는 ‘너희의 소유 중에서’입니다. ‘소유 중에서’, … 이것도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중요한 특성일 텐데요, 하나님은 그 소유 중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없는 것 만들어서가 아니라, 어디 가서 빚을 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형편대로, 내가 가진 소유 중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모세는 못 박아 말했습니다. ​ 여러분, ‘소유’(所有)라는 말의 뜻, 다 아시지요? 말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받아서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드리는 겁니다. 팔찌나 목걸이가 있으면 그 중에서 드리면 되고, 실이 있으면 실로, 가죽이면 가죽으로 드리면 됩니다. 27절에 보면 족장들은 호마노를 비롯한 여러 보석을 드렸다고 나오는데요, 상류층이던 그들은 그걸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그들이 가져 온 보석과 과부의 두 렙돈의 무게가, 가치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친히 애굽에서 빼앗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받은 것 중에서 드리면 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담아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 마음의 중심을 원하시고, 자원하는 물질을 받으시며, 그 사랑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성전 안에 거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물론 우리 중에 억지로 드리고 싶은 사람, 어디서 빚을 내서 드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원하여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내 마음대로 잘 안 된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앞에 인색하고 싶고, 억지로 하고 싶은 마음인 적이 있습니까? 우리도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 자원하는 마음, 마음에 원하는 자, 이런 말들과 함께 본문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 ‘마음이 감동된 자’라는 구절입니다. 21절, 26절, 34절이지요. 자원하려면 당연히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움직여져야 합니다. 사실 21, 22절의 ‘마음에 원하는’은 본래 ‘마음이 움직이는’이라는 뜻입니다. ​ 그럼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또 언제 움직입니까? 언제 우리의 마음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집니까? … 네, 이른바 ‘은혜’를 경험할 때, 은혜를 받았을 때입니다. 성도는 은혜가 있어야 마음이 움직이고, 은혜를 받아야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은혜를 받았고 또 받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끊어질 뻔 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극적으로 회복됐고, 하나님은 결국 그들과 동행하여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회복의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하마터면 정말 모든 게 끝날 뻔 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과 모세의 절절한 중보와 하나님의 용서로, 정말 어렵사리 다시 하나님과의 이 샬롬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샬롬의 실체가 되는 성막을 짓는 일에 하나님은 그들을 기꺼이 부르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오래 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대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돌보시고, 약속한 생명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그 모든 것들을, 이제 그들은 ‘은혜’라는 렌즈를 통해 다시 이해하게 됐습니다. 거기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중요한 변곡점이 됐습니다. 그 은혜 앞에 자격 없는 자임을, 은혜가 필요한 자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은혜는 이처럼 항상 좋은 일이나 축복을 통해서만 누려지는 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는 자리에서 참 된 은혜가 임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내가 은혜에 합당한 자가 아님을 인정하게 됐을 때, 또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로 인해 고통 중에 있을 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나를 회복케 하실 것을 신뢰할 수 있을 때, … 나의 생명과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하게 됐을 때, 은혜는 그렇게 우리에게 부어져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 조금은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람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별로 하나님 앞에 헌신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일에 별로 자원하는 마음도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다지 신실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은혜로 충만하기는커녕 그저 매순간 받았던 은혜를 소멸하기 바쁠 뿐이라는 사실도 인정하고, 은혜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 성도는 당연히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은혜를 소멸하지 않기 위해, 지금 내가 은혜로 충만해져 있는가를 항상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저 습관적인 종교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말 내 안에 감동이 있는가, 혹시 자원하는 마음, 헌신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사그라들고 있지는 않은가, … 혹시 하나님 주시는 은혜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넣는 족족 빠져나가는 것은 아닌가, 될 수 있으면 자주 내 믿음을 성찰하고, 또 삶 속에서 잃어버리는 은혜들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 은혜로 채워진 삶과 은혜가 소멸된 삶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건 은혜로 채워져 보면 비로소 알게 되지요. 은혜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차고 건조하며,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한지, 그것이 얼마나 성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삶인지, 은혜로 충만해지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사모하셔야 합니다. 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만드는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셔야 합니다. ​ 우리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고,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시 107:9) 그런 분이십니다. (이번에 목양 리트릿을 가면서 저도 은혜 주시기를 원하는, 그 기도 제목 한 가지만 가지고 갔습니다. 필그림하우스에 도착하여 기도실에 처음 앉아 ‘하나님, 제게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제가 은혜를 사모합니다.’ 기도하는데, 그 한 마디에 하나님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적당히 받은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은혜로 충만해지십시다. 흘러넘치는 은혜로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은혜로 적시는, 그런 은혜 위에 은혜가(요 1:16) 부어지기를 축복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고백교회가 은혜에 목마른 자들, 또 은혜로 부요한 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으로 진실하고 기쁘게 헌신하여,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하나님의 일들이, 오늘 성막을 만드는 일에서처럼,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차고 넘쳐서, 이제 그만 드리라고, 충분하다고 말해야 할 만큼 그렇게,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