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2020년 11월 8일 주일 설교)
2020-11-0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오순절 후 스물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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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1~7,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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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강해 14) 본문 4절의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본문 6장까지에는 고린도교회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바울 사도의 책망과 권면이 주로 담겨 있었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7장부터는 조금 그 결이 다른 내용입니다. 1절 맨 앞에서,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본문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 사도에게 보냈던 어떤 편지에 담겨 있던 질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변입니다.
사실 6장까지의 내용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의 분열 문제, 또 계모와 깊은 관계를 맺은 근친상간의 문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소송 문제, 또 음행의 문제까지,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다뤄왔는데요, 이러한 문제들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에게 질문해서 답한 내용이 아니라, 바울이 다른 사람들의 전언(傳言)을 통해 따로 확인한 바였습니다. 1장에 보면 그 메신저 역할을 한 이가 ‘글로에’라는 사람의 가족이라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1절에 언급된 편지, 일찍이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썼다는 그 편지에는, 이런 심각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공동체 내부에 있는 당혹스러운 문제들은 숨긴 채, 그보다 훨씬 덜 무거운 문제들만, 사도에게 오픈하려고 했던 건데요, 여기 7장부터 10장까지는 그렇게 고린도교회가 질문한 내용들에 대한 사도의 답변이 나옵니다.
그 질문 내용을 좀 살펴보면, … 신앙이나 경건을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은가, 홀아비와 과부는 다시 결혼해야 하는가, 이혼은 해도 되는가, 이혼했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신으로 사는 것은 어떤가, 배우자가 먼저 죽었을 때 재혼해도 되는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 이런 문제들인데요, 이 중 일부는 저희에게 시의적절한 것이, 22일부터 듣게 될 심경미 목사님의 말씀이 다루는 주제와도 연관이 있어서, 단지 예, 아니오, 뭐 이런 대답을 듣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 속에, 또 대답 속에 녹아 있는 신앙적 원리를 이해해서, 누구나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좀 더 본질적인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런 측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맞다, 틀리다, 해도 된다, 안 된다, 이런 단답식 대답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신앙의 원리에 대해 사도는 깊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직접적인 대상은 비록 결혼한 부부이겠습니다만, 그 핵심적인 원리는 모든 성도의 신앙과 삶에 잇대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오늘 본문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사도에게 던진 질문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에게 있어서, (성적인) 부부관계를 삼가는 것이 영적으로 더 좋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 뭐 이런 것까지 질문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 질문의 배경을 먼저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다 이른바 ‘초대교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 자신이 신앙의 첫 세대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와 그 문화에 적응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한, 말 그대로 기독교 역사의 ‘최초의 성도들’입니다. 지금처럼 성경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됐을 당시는 사복음서 전부를 포함한 신약성경 거의 대부분이 아예 쓰이지도 않았던 때입니다. 신앙적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뭔가가 너무 없었습니다.
대신 그런 그들에게는, 아시는 것처럼,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전이어서 더욱 그랬는데요, 하나님을 몸으로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 그만큼 비중이 컸습니다. 오늘날에도 물론 성령의 권능이 실제적으로 역사하시지만, 그래서 많은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만, 초대교회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성령의 놀라운 은사와 기적으로 강력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이해하기 쉽게, 방언 같은 은사만 하더라도 그렇지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방언과는 달리, 그땐 정말 하나의 분명한 언어 형태로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어디 저 먼 나라의 원주민 언어로 추정되는 그런 아주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누가 들어도 명확한 언어, 특히 그 언어를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저건 어느 나라 말이다, 딱 알 수 있을 만큼 분명한 하나의 언어로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한 번 배워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외국어로 서로 말하는 장면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가히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그런 은사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언은 시작에 불과했지요. 병든 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이걸 직접 내 몸으로 경험한다면 여러분 어떤 느낌이겠습니까? … 강한 성령의 권능을 직접 경험한다면, 누구나 정말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야만 될 것 같은 강한 부르심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처음 그런 은사를 접하게 되면, 내가 정말 하나님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구나, 하는 확인이 듭니다. 저도 목사를 해야겠다고 스스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가, 부흥회 새벽예배에서 처음으로 성령을 체험하면서부터였습니다. 갑자기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눈물콧물을 다 흘리면서 데굴데굴 구르며 기도했다고, 주변 사람들이 나중에 말해줬습니다. 저는 그때 그런 경험하면 다 목사가 되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뒤로 교회 친구들과 함께 교회 옥상에 자주 올라가서, 멀리 동네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 예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얼마나 많겠냐? 공부가 중요하냐, 생명이 중요하냐? 우리가 뭔가 잘못 사는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얼른 선교 훈련을 받고 아프리카든 어디든 가야 하는 것 아니냐?”(결국 그 중에 저만 목사가 됐습니다만 ….) … 제가 다니던 교회 옥상에는 옥탑방 하나가 있었는데요, 방학이 되면 여러 교회 친구들과 함께 방학 내내 거기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놀고 이러면서, 아예 교회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성적은 떨어졌고, 저희 어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권사님들이 저를 원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땐 어느 정도 진심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을 학생 혹은 청년 시절에 겪어보셨을 겁니다. 수련회 같은 데 가서 은혜를 받으면, 정말 세상을 등지고 주님만을 위해 살 것처럼 결심하고 돌아오지요. “하나님, 이제 오직 복음을 위해 살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이 명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 여러분, 은혜가 충만했을 때, 다 그런 기도 한 번쯤 해보셨지요?
그러니 복음의 첫 회심자이자 전도자요, 수많은 은사와 기적들을 경험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떠했겠습니까? … 지금 당장 모든 일을 그만두고 주님만 위해 살겠다는 사람들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일상을 포기하겠다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그런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지요. 인자가 곧 올 것이다(마 10:23),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지 못한 때에 올 것이다(마 24:44),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심지어 그 남은 시간이 단축되었다고, 다시 말해 주님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오실 것이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까지 썼습니다. 그 내용이 다름 아닌 오늘 본문 7장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7:29).
그러니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혼란 아닌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곧 오신다는데 약혼한 사람과 결혼식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음 달에 선 보기로 했는데 그게 괜찮은가, 남은 삶 주님 위해 살고자 독신으로 살면 어떤가, 나는 예수를 영접했는데 남편은 계속 핍박을 하니, 갈라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뭐 이런 고민부터 시작해서, 이제 영적인 것만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살기도 아까운 삶인데, 기도하고 금식해야 하는데 부부관계를 좀 절제하고 멈춰야 하는 게 아닌가, 등등 … 이런 것들은 실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신앙적 고민이었습니다.
여기에 조금 다른 이야기를 덧붙이면, … 사실 고린도가 속해 있는 그리스 지역에는 스토아 철학 같은, 금욕을 강조하는 문화가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적으로 매우 개방적이었던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요, 한쪽에서는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자유를 핵심가치로 삼았던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정반대로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철학자가 결혼해야 하는가, 하는 이슈로 많은 논쟁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에 있어서 너무나 개방된 문화였던 고린도였기에, 교회든 세상이든 다른 한쪽에서는 보다 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이런 질문들은 당시로서는 결코 가볍지도, 또 이상하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야 ‘뭐, 이런 걸 질문하나,’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고린도교회에는 경건을 이유로 부부관계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6장에 언급됐던 그런 음행 문제의 배경에 이런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은혜 받고 오더니 배우자가 갑자기 부부관계를 피하는 겁니다. 졸지에 성적인 파트너를 잃어버린 상대방은 어떻게 합니까? 그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매춘부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 과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이냐, 하는 질문이 그래서 던져진 것입니다.
배경 설명이 좀 길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어떤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까? … 그런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결혼과 부부생활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2절에서 먼저 언급하지요. …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면, 1절의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다’의 이 ‘가까이 하다’라는 동사, 또 2절에서 ‘아내를 두다, 남편을 두다,’ 하는 말 속에 나오는 ‘두다’라는 표현은 본래 모두 다 ‘성관계를 맺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2절의 내용은, ‘음행 때문에 결혼해라’는 의미보다는,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음행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으니, 남편과 아내로서 성적인 관계를 지속하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지요.
부부관계를 지속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아내는 그 남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의무를 ‘다하다’라는 표현의 동사 ‘다하다’에 붙은 아래 주석에 보면, ‘갚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무를 다하다’의 문자적 의미는, ‘빚을 갚다’입니다. 다시 말해 부부는 결혼과 함께 서로에게 이런 빚을 지고 시작합니다. 육체적 만족을 주어야 하는 빚이지요. 그만큼 그 육체적 관계가 인간에겐 중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신앙은 성(性)을 터부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자, 축복인데, 단 부부는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그런 육체적 의무를 다하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빚을 갚으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의무를 회피하면서, 그것을 마치 신앙이나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영성을 위해 절제하고 금욕한다, 부부관계에 있어서는 어불성설입니다. 사실 금욕 자체는 영성을 고양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든 말씀을 묵상하든, 금식과 함께 실제적인 신앙훈련이 필요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초대교회에서는 기도는 늘 금식과 한 세트였습니다. 일정 기간 작정하고 기도할 땐 주로 금식이 병행됐습니다. 그냥 기도만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많은 절제가 뒤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남편이 기도를 이유로 아내와 함께 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했고, 아내에게는 그저 통보만 하고 분방을 하라고 랍비들은 가르쳤습니다. 물론 아내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도와 금식을 이유로도 분방은 제한된다. 부부가 서로 합의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정해진 얼마의 기간 동안만 잠시 그리 하라고 말하지요. 심지어 6절에서 바울은, 이것조차도 허락이지 명령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원칙은 부부로서 가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게 먼저입니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정말 급하고, 중요한 일로 인해, 서로가 한마음이 되는 그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일시적인 분방마저도 삼가라고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왜요? 말씀드린 것처럼, 혹 그 시간을 틈타 사탄이 그를 얼마든지 미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실 바울은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지요. 물론 학자들마다 그 독신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좀 이견이 있습니다만, 그는 평생 예수님의 신부로서 복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보통 우리는 바울이 아예 결혼을 안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의견도 많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 같은 유력한 학자는, 바울이 결혼 후 상처(喪妻)한 홀아비였을 거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회심한 후 일방적으로 유대인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것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이, 바울은 자신이 독신의 은사를 받았다고 스스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이지요. 그러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기를 바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게 좋으니, 다 독신으로 살면 좋겠다, 이런 말이 아니라, 독신으로 살면서도 성적인 절제가 가능해서 결혼하지 않고 전심으로, 아무 문제없이 주님만 섬기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독신으로 살지만 바울은 성적인 욕망에 있어서 절제가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사실 이래야 실제적인 독신의 은사이지요.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고, 음욕을 주체할 수 없다면, 어떻게 독신으로 살겠습니까? 그러니 은사대로 해야 한다고 바울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고자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 19:12, 공동번역)고 하셨습니다. 본능적인 욕망을 금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받을 수 있는 사람만 받는 겁니다. 아무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그랬다가는 더 심각한 음행에 노출되기 십상이니, 본인이 정말 은사가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르니 독신이든, 결혼을 하든, 그건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했다면 그때는 말씀드린 것처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는 일종의 사랑의 빚을 지게 되고, 그 빚을 배우자에게 갚아야만 합니다. 내 욕구보다 배우자의 욕구를 먼저 생각하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한 신앙적 원칙입니다. 결혼이 단지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데요, 본문 4절입니다.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아멘.
아내든 남편이든,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몸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합니다. 여기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 주권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 이제 그 주권이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이지요. 결혼한 성도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그것은 주님의 것이고, 오늘은 다시 내 배우자의 것이기도 합니다. 몸에 대한 소유권 순위에 있어서, 나 자신은 세 번째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남편과 아내 분들, 아멘이십니까?(*) (그러니까 장기기증 같은 거 하실 때도, 다 물어보고 허락을 받고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또 아내나 남편에게 …)
부부는 서로를 돕는 자로서 상대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의 몸에 대한 권위마저 상대에게 내어주는 그런 관계에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여 결혼했고, 또 사랑하기로 서약하고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은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내가 가진 ‘자기 결정권’을 상대방에게 기쁘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 몸에 대한 주권을 아내와 남편에게 철저하게 내주어야 합니다. 당연히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단지 일시적 감정이고,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소유하고, 다스리며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한 사람들의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권리가 더는 우리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리는 상대에게 있습니다. … 5절에 나오는 ‘분방하지 말라’는 문장에는 사실 ‘방’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말로 의역한 것인데요, 직역하면, “서로의 권리를 ‘빼앗지’ 말라.”입니다. 이 ‘빼앗다’라는 단어가 앞에 6장 8절과 10절에서, ‘속이다,’ ‘속여 빼앗다’라고 번역된 바로 그 단어[아포스테레이테]입니다. 내 권리가 아닌데, 상대방의 것인데, 그걸 속여서 빼앗는 것이 바로 부부에게 있어서 ‘분방’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에는 신앙도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가 합의되지 않는다면, 그 권리를 결코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뭐 그런 핑계 대지 말고, 먼저 아내와 남편에게 넘겨진 그 주권을 인정하고, 온전히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물론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배우자를 착취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문제의 근거가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만약 그런 폭력을 당하고 있다면 결코 참지 마셔야 하고, 견디기 어렵다면 이혼을 고려해보셔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성경은 남자나 여자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남편과 아내 모두가 서로에 대한 주권을 넘겨받습니다. 이것이 2천 년 전의 이야기이니 참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극히 가부장적이었던 당시 고대사회에서, 또 여성의 성욕이나 성적 권리에 대한 논의가 아예 전무했던 당시 사회에서, 성경은 오늘날 21세기에나 겨우 가능한 그런 상호성의 원리를 이야기합니다. 비단 성적인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피차 복종하라.”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고 말씀합니다.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성도의 자부심을 가지고, 겸손히 상대방을 섬기고, 복종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필요가 우선이기에,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바, 또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방이 원할 것 같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상대가 원하는 것, 그것으로 섬기십시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과 배려를 원할 것이고 남편은 아내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바랄 것입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물론 예외도 간혹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남편에게는 존경이, 아내에게는 사랑이 최우선의 필요입니다.
내가 원하는 걸 상대방도 원할 거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서로 대화가 필요합니다. … 남편은 사랑한다는 아내의 백 마디 말이 아니라, 인정하고 높여주는 말 한 마디를 더 원합니다. 아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른 그 어떤 사람, 어떤 여자에게도 주지 않는 배타적인 감정,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친밀한 배려와 표현이 필요합니다.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 그러기 위해 내 몸에 대한 주권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부의 사랑이며, 성도가 가정에서 복음을 삶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의 몸으로, 또 삶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비단 성적인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서로를 온전히 섬기는 자가 되어,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나라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배우자의 필요 하나도 채워주지 못한다면,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이며, 더 나아가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또 무슨 말이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내가 사랑해서 선택한 사람부터,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귀하게 섬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꿈꾸는 진정한 천국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