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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합하라' 2020년 7월 19일 주일 설교

2020-07-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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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 메시지 -------------------------------------------------------- 고린도전서 1:10~17, 온전히 합하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강해 2) 본문 10절의 ‘온전히 합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지난주에는 고린도전서의 인사말 부분을 통해서, ‘성도’라는 말 속에 담긴 구원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해봤는데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오자마자 바울은 교회 내의 어떤 문제를 언급하면서, 매우 강한 호소의 어조로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10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권하노니’라는 이 동사[파라칼레오]는 정말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간청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탕자의 형이 동생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태도에 격분하여,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마당에 서서 씩씩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나아가 그 마음을 풀어주며 그만 들어가고 할 때 사용됐던 바로 그 단어(눅 15:28)입니다. 내 뜻을 헤아려 제발 그 마음을 돌이켜 주기를 사랑으로 간청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간청 앞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길게 덧붙여져 있습니다. 바울이 누군가에게 뭔가를 권면할 때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표현인데요, 이것이 단순히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문제이며, 그를 주로 믿는 우리의 신앙, 곧 ‘성도 됨’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으로 뭔가를 권면하는 그런 편지를 받았다면, 아마 누구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그 간절한 호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네, 그만 분쟁을 멈추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분쟁’이라는 헬라어 단어 ‘스키스마’는 본래 ‘찢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옷이나 천, 또 그물 같은 것이 찢어져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데요, 고린도에서 사역하며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바울의 직업적 용어이기도 했습니다. 천막이 찢어져 비가 새고, 더는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 혹은 어부들의 그물이 찢어져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된 그런 상황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오직 고린도전서에서만 사용하는데요, 본문만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여러 곳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 찢어짐의 이유가 다 조금씩 다릅니다. 여러 이유로 고린도교회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의 지역적 특성 상 이러한 분열의 문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결집된 국제적 항구도시입니다. 유대인들도 있고, 로마인도 있고, 헬라인도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좋았을 리 없습니다. 물론 빈부의 격차도 컸습니다. 아테네만큼은 아니지만 고린도 역시 풍부하고 다양한 철학적,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이런 다양성을 기반으로 세워진 도시이고, 고린도교회 역시 그러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다양성인데, 다른 한 편으로는 분쟁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사실 분열은 보통 어떤 대단한 가치나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게 아니지요. 그냥 사소한 이유, 아주 현실적인 이유들로 공동체는 갈라집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수많은 교단들로 분열될 때도 무슨 엄청난 신학적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겉으로야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는 바울에게, 누구는 아볼로에게, 누구는 게바, 곧 베드로에게, 누구는 또 그리스도에 속했다고 주장하며 사사건건 대립했다고 나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식으로 분파가 생겨났겠습니까? … 얼핏 생각하면 뭔가 특별한 영적인 명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실제로 어떤 신학적 차이나 사역의 방향성의 차이, 또 세 사람의 설교의 스타일 차이, 뭐 이런 것들이 아주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배경으로 인한 문제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바울은 로마 시민입니다. 아볼로는 거의 헬라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리스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전통적인 유대인, 곧 히브리인이지요. 그걸 강조하기 위해 굳이 아람어 이름 ‘게바’를 써서 말했을 겁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 세 부류가 절대 다수였을 겁니다.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나 로마 출신의 사람들은 바울을 좋아했고, 그리스 사람들은 아볼로를, 많은 유대인들은 베드로를 더 친근하게 느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파는 뭐겠습니까? 나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그 세 부류 외에 소수 이방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어서 우리는 그리스도파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의 이 분열 문제는 어떻게 보면, 뭐랄까 참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양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다른 깊은 신앙적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호불호에 따라 이미 처음부터 그런 여러 그룹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사도들의 개인적인 역량이나 신앙적 카리스마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겠습니다만, 실상 그것은 하나의 기폭제 같은 것이었고, 이미 고린도교회 안에는 분열과 분쟁의 에너지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초대교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처음 예루살렘 교회도 비슷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건 더 자세하게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다만 거기서는 고린도교회처럼 여러 분파로 나뉜 것이 아니라 헬라파와 히브리파 둘로 나뉘어 갈등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배경이 크게 그 두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예루살렘 교회는 그 갈등을 무사히 봉합하게 됩니다. … 다수파였던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는 최초의 일곱 집사를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로만 가려 뽑았기 때문인데요, 분열의 문제는 거기 있는 기득권을, 누가 얼마나 내려놓느냐에 달려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분쟁의 구도가 훨씬 복잡했고, 그 둘이 일종의 경쟁 구도를 이루면서 어느 한 쪽이 뭘 좀 양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그 상황 자체가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상식적이라고 생각될만한 그런 문제였다는 것, 그래서 누가 옆에서 그게 문제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문제라고 느끼기조차 어려울 만큼 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아마 그렇게 출신지가 명확히 다른 세 부류가 모여 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 어디라도 십중팔구 비슷한 결과였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것을 지적합니다. 그러한 분열의 상황을 누구도 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고, 그냥 고린도라는 도시의 축소판에 불과하다는 것, 그 문제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바울은 그것을 책망합니다. 바울은 지금 어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린도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의 차원에서, 그들이 경험한 구원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라는 것입니다. 학연이나 지연, 또 이념과 경제적 차이 등등, 세상이 갈등하는 이유들이 교회 안에서도 똑같이 힘을 발휘하고, 그래서 그것이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신 성도들을 나뉘게 하고, 결국은 나는 누구에게 속했고, 너는 누구에게 속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을, … 그저 상식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복음과 우리가 얻은 구원의 차원에서 고민해보라고 바울은 간절히 권면합니다. 그러한 상식적 상황 이면에 놓인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병들게 하고, 그것이 주의 몸 된 교회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 일인지 이제는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니까요. 그래서 나중에 3장에 가서는 여기에 대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어린아이들’ 같이 미숙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신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저 성숙하지 못한, 유치한 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그래서 ‘밥을 먹을 수 없어 젖만 먹을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라고 책망합니다. 달을 보라고 했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본다는 식의 고상한 비유를 쓰지 않습니다. 정말 원초적으로 그 신앙의 초보 됨을 지적합니다. 내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누구에게 속하여 구원을 얻었는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이가 누구이며, 왜 그 방법이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데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런 부분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바울은 뭔가 더 어려운 이야기, 죽이 아니라 밥이 되는 그런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냥 예수 믿고 복 받아 천국가면 끝이다, 교회는 그저 집처럼 편안하고 익숙하면 된다, 아직 그런 믿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아 사는 그런 삶, …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이 되어 섬기는 그런 삶, 내 의로움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 지금 당장 여기서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오는 주님의 나라에서 존귀함을 인정받는 그런 삶, …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예수를 믿는 것 같고, 사람이 모이고 부흥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교회로서, 여전히 세상의 기준이나 흐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그냥 세상의 축소판에 불과한 교회, 그것이 고린도교회였다고 바울은 진단합니다. 여러분, 교회 오면 뭔가 세상과는 다른 느낌이어야지요. 상식이 통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상식에 머무르면 안 되지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어떤 성품이나 삶의 방식이 인정받고, 세상에서 존중받지 못했던 이들이 크게 존중받고, 또 세상에서 자랑할 게 많은 사람들이 도리어 몸가짐을 조심해야만 하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카리스’ 곧 은혜에 기준은 두는, 그런 낯선 뭔가가 경험되어야만 합니다. ‘아, 세상에서는 이렇게 일이 결정되고,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는 건데, 여기서는 다르구나. 전혀 다른 원리와 질서가 있는 세상이구나.’ 세상과의 이런 강한 거리감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게 바로 하나님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우리고백교회가 그리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오늘 ‘세례’의 문제를 강조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세례를 누구한테 받았느냐, 그것이 분열의 한 이유가 됐기에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도 있습니다만, 12절 말씀에서처럼,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라는 그 소속의 문제가 바로 이 세례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곧 침례는, 아시는 것처럼, 내가 단지 예수를 주로 고백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다거나, 죄를 씻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 바울이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것은 가장 심오한 영적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합을 통해 예수의 운명이 곧 우리의 운명이 됨을 우리는 세례를 통해 확증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받는’다고 합니다(롬 6:3 등). 한 번 저를 따라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때, 사망의 종노릇 하며 죄의 품삯을 받던 나의 옛 사람이 예수와 연합하여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비록 십자가는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이지만, 시간의 순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믿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 일이 영적으로 우리의 현실이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땅에 묻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거듭나 성도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중에 고린도전서 10장에 가서 출애굽을 또 하나의 세례로 빗대어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접 한 번 찾아보실까요? 10장 1절부터 4절까지, 합독합시다.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아멘. 여기 1절 끝부분부터 2절에 보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거기서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여러분 이것이 무슨 사건을 묘사한 것이겠습니까? 네, 홍해가 갈라져 건넌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홍해를 건너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그 사건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홍해에서 그들의 옛 자아, 파라오의 백성이던 옛 정체성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일이 누구에게 ‘속하여’ 일어났다는 중요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어떤 누구에게 속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합니까? 네, 모세에게 속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모세는 당시 애굽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속하여 세례를 받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백성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나이 마흔에 애굽에서 나와 40년 간 광야에서 살다가 나이 80에, 출애굽의 소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는 애굽 백성이 아니었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다시 애굽으로 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의 세례를 통해 광야로 나왔다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강조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더는 애굽의 백성이요, 노예가 아니라, 그것은 다 홍해의 세례를 통해 죽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세와 같은 운명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성경은 출애굽과 홍해 사건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본래 노예는 죽어야 그 노예 됨에서 비로소 벗어납니다. 물론 다시 살아날 수 없으니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이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것입니다. 노예의 생활을 끝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딸로 새롭게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의 의미인 것입니다.) 세례는 그런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받는 예수에 속하여, 그와 연합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주중에 저희 교회 성도가 아닌 다른 어떤 분한테서 전화가 와서는 대뜸 그분이 “목사님, 저 세례를 다시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목사님께 세례를 받고 싶습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20대 초반에 세례를 받았는데, 그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받은 거라서, 이제 뭔가 새로운 마음으로 결단하고 세례를 받고자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니라고, 세례는 한 번만 받으시는 거라고, 그 의미를 늘 잊지 않고 항상 내가 누구 백성이며 누구와 연합한 사람인지 잊지 않고 사시면 된다고, 그렇게 설명을 드렸는데요, 그래도 뭔가 아쉬워하는 듯 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분의 잘못이 아니지요. 세례의 의미를 바르게 설명하지 못해 온 저희 목사들의 잘못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에게 속하여 받은 세례, 여러분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과 다시 태어남의 그 새로움으로 성도는 자신의 삶을 바라봐야 하며, 우리는 그 새로운 삶을, 다름 아닌 교회를 통해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이 성령을 통해 다시 연합되어 이루어진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결코 세상의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의 분열과 같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고 찢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며, 단지 사람들 간의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나뉘었다면 하나님과도 온전한 관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과 먼저 화목하고 주님께 나오라고 말씀함을 기억하실 겁니다.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있으면,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그와 화해하고 다시 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단지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때 역시 해를 가한 사람에게 먼저 가서 120%의 보상을 한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율법이 규정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고 나중에 사람에게서가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도 화목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성경의 메시지이며, 이것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들이 먼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분열이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분열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이것을 정말 온전히 이해한 성도가 먼저 참고 섬겨야 합니다. 정말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아닌 한, 주의 몸을 찢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 의를 내려놓고 스스로 물러서야 합니다. 내가 내 주장을 끝내 고집해서 얻는 교회의 유익이, 교회가 찢어져 얻는 상처보다 크고 본질적이라고 생각될 때에만, 분쟁을 하더라도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깨닫고 이해가 되신 분, 이것이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분들이 먼저 그렇게 하십시오. … 엊그제 금요일 QT 말씀이었는데요, 이사야 선지자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른바 ‘소명’ 장(章)에 해당하는 이사야 6장 말씀이었는데요, 어느 날 이사야가 환상을 보지요.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게 임재해 계시는데, 천사들이 왕래하며 외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때 이사야가 탄식하며 말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서 살며 하나님을 만나 뵈었으니, 나는 이제 죽겠구나.” 그때 천사 중 하나가 제단(분향단)에서 타고 있던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에 대며 말합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혼자 하시는 말씀 같은 그런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사야가 대답하지요.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 여러분, 사실 이 장면은 어떤 면에서 참 재밌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재미있다고 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저는 하나님 참 짓궂다,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냥 이사야를 콕 집어서, 네가 가라, 이렇게 말하시면 될 텐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보게 하시고, 이사야가 하는 혼잣말을 들으신 후에는 천사를 통해 그의 입술을 정결하게 하시고, 그런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나를 위해 갈 것인가?” 이렇게 이사야가 다 들리도록 말씀하시면, 도대체 이사야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그래, 나더러 가라는 뜻이구나, 내가 가야지 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이사야를 불러 보내십니다. 네가 참아라, 네가 순종해라, 네가 충성해라, 그렇게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때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셔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내가 해야 하느냐, 왜 내가 참고, 내가 양보하고 져야 하느냐, … 그건 다름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내 몸 된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 누구를 보내야 할까,’ 탄식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말씀이 들렸다면, 그러면 그게 곧 나의 소명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 듣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것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부르심으로 인정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온전히 합하라고 말씀합니다. ‘온전히 합하라!’ 그저 싸우지 말아라, 화해해라, 파당을 깨뜨려라, 분쟁을 멈춰라, 이게 아닙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온전히 연합하라, 말씀합니다. 온전히, 그게 어디까지입니까? … 우리는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유명한 기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신 것처럼, 성령을 통해 그렇게 서로 온전히 연합하여 계신 것처럼, 그렇게 저와 여러분도 하나가 될 때, 그게 성경이 말씀하는 ‘온전히 합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통해 사랑을 배워야 하고 성경이 말하는 연합에 힘껏 순종해야 합니다. … 그렇게 하나가 되면 세상이 예수님을 알게 될 거라고 주님은 또한 말씀합니다. 네, 세상이 예수를 아는 중요한 방법이, 성도의 온전한 연합이며, 거기서 누려지는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거기까지 저와 여러분이 온전히 연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절 끝에 보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말씀합니다. 저는 이것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인 통일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나눈 것처럼, 주의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주님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는 다른 질서와 기준으로 연합하는 그 모습으로 복음을 전하는 그 하나의 뜻으로 연합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대로 온전히 합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예수와 그 말씀을 중심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어내십시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오직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그렇게 하십시다. 오늘 이 말씀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분열은 최초의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있었던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또는 교회의 보편적인 분열됨을 개탄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 자신의 신앙적 일상임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셔서 오늘 이 말씀을 거뜬히 먹고, 더 단단한 음식도 먹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온전히 연합하는 것이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십시다. 성령이 우리를 평화의 띠로 단단히 묶어서, 이미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믿고, 그것을 힘써 지키는(엡 4:3)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우리고백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죽고 살아난 예수의 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온전히 증언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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