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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2020년 6월 21일 주일 설교

2020-06-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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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1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5:42~47,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으로 인해 음성에는 설교 전반부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리며,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강해 69) 본문 43절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셨지만, 주님을 따르고 섬기던 이들은(41절), 오래 슬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를 마지막 일, 너무나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른다는 것 자체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다 흩어지고 없었지만,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외지인이었기에, 예루살렘 근처에 적당한 무덤을 구하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것부터가 큰일입니다. 함부로 나섰다가는 로마에 대한 반역의 죄로 죽은 예수와 한 패로 몰려, 로마는 물론 유대인 사회로부터도 심각한 해 받을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정승 댁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문상을 오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문상을 오지 않는다는 옛말도 있습니다만, 이제 주님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마당에, 장례는 말 그대로 언감생심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족조차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날은 안식일이 시작되는 준비일(금요일 저녁)입니다. 그것도 유월절 명절이 시작되는 안식일이지요. 어떤 일이나 노동도 할 수 없는 안식일이 이제 곧 시작되면, 주님의 시신은 결국, 십자가에서 죽은 죄인들이 으레 그렇듯,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결국 짐승에 의해 훼손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어두워지기 전에 장례 절차가 진행되어야 합니다. 시간은 부족하고 사람은 없는데, 남아 있는 일은 너무나 크고 무겁습니다. 이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이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경에 언급되는 이 사람, 정말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람,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하룻길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한 오래 된 도시의 지명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새 무덤을 예루살렘 근처에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는데요, 바로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게 됩니다. 43절에 보면, 그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주님의 시신을 달라 했다고 나옵니다. ‘당돌히’라고 번역된 ‘톨마오’는 ‘감히 … 하다’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여러 어려운 질문을 했음에도, 주님께서 지혜 있게 대답하시자,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34)고 했을 때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어떤 권세나 힘에 눌려 뭔가 사람이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을, 용기 내어 나서서 감당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시신을 얻기 위해, 빌라도를 찾아갑니다. 일반 병사들이나 백부장이 아니라, 최고 책임자를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해 시신을 얻을 요량이 아니라, 정식 절차를 밟아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45절에, 빌라도가 시체를 ‘내주었다’에 사용된 동사 역시 그냥 ‘내주다’는 보통의 단어 ‘디도미’가 아니라, 훨씬 격식을 갖춘 ‘도레오마이’(‘승인하여 수여하다’)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서 운명하셨고, 제대로 된 장례가 치러진 후 무덤에 매장됐다는 것을 확증해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확인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라도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저 당돌한 용기만으로 될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요셉은 그럴만한 지위와 자격을 갖춘 자였습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였던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자, 사람들의 존경도 받았다고 43절은 기록합니다. 다른 복음서를 좀 더 참고한다면, 그는 부자였고(마 27:57), 선하고 의로운 사람(눅 23:50)이었습니다. 빌라도를 찾아가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졌습니다. 물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됐든 십자가 죄인의 시신을 달라 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자칫 그가 가진 모든 지지와 존경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지킬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이런 일에 더욱 몸조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5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빌라도 행전’이라는 문서에 따르면, 주님의 시체가 무덤에서 사라진 후, 아리마대 요셉이 그 시체를 훔친 자로 오인되어 무려 40년 형을 언도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요셉은, 실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요셉을 보면서 문득, 지난 10장에서 주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어떤 부자가 영생에 대해 물으러 왔다가, 가진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돌아간 후, 주님이 말씀하시지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크게 놀란 제자들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수군댑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뭐라고 하시지요? 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고 말씀합니다. 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단지 어떤 하나의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예수를 따르는 일은 분명 부자에게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으로는,’ 그러니까 도를 닦든, 인격을 수양하든, 그런 걸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님은 이야기하십니다. 다만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그 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바로 그 일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어떤 부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장면을 직접 보고 있는 셈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도 이왕이면 이런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아무 부족한 것이 없으나, 그럼에도 하나님나라의 존귀한 자로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기를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오늘 이 요셉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는지, 주목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본래 이 요셉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나옵니다(요 19:38). 당연히 열두 제자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 다음 그룹인 70인 제자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눅 10:1). 혹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백이십 명의 제자(행 1:15)나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그룹으로 묘사된 오백여 제자들(고전 15:6)처럼, 조금 더 큰 제자 그룹에 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긴 했지만, 스스로 그걸 드러내지는 못했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미국에 ‘샤이 트럼프’가 있다고 하는 것처럼, 당시 유대 사회에는 ‘샤이 지저스’가 있었던 게지요. 그만큼 예수의 제자 됨을 드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실 때조차도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주님의 장례를 함께 치른 또 다른 한 명의 ‘샤이 지저스’가 있는데요, 여러분 잘 아시는 니고데모입니다. 일찍이 늦은 밤 홀로 주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었던 사람으로, 그 또한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과 침향을 백 리트라, 약 30kg이나 가지고 왔습니다(요 19:39). 이것은 거의 왕의 장례 때나 사용되는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는 숨진 예수님을 한 나라의 왕에게나 합당한 예법으로 장사지낼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마찬가지로 니고데모 역시, 더 이상 ‘샤이 지저스’가 아닙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분명 새로워진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일찍이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내가 땅에서 들리면, 곧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요 12:31~32). 그 말씀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와 회심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숨지심을 보고 로마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저 죽음과 실패와 절망처럼 보이는 그 십자가가 도리어 생명의 능력으로 그들 가운데 강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십자가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을 오늘 이곳에 있게 했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함을 믿습니다. 백부장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직접 예수의 숨지심을 바라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참으로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며,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충만한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구원 얻는 참 된 믿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그래서 그 어떤 조건이나 환경 앞에서도 담대하며, 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세상 그 누구에게나 십자가 예수를 자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아리마대 요셉을 설명하면서, 본문이 특별한 한 가지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43절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는 것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된 다른 이름을 우리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매우 특별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고 주관하는 세상, 그 질서, 그런 삶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가 요셉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오직 이 요셉만 하나님나라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43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또한’이라고 하는 ‘카이 아우토스’라는 표현이 이 문장에 포함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영어 성경 가운데는 유명한 KJV 성경(과 ESV)이 이 부분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데요(which also waited for the kingdom of God), 요셉 역시도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과연 누가 또 하나님나라를 기다렸을까, 궁금해집니다. 여러분은 누가 생각나십니까? 비록 지금은 실족한 상태이지만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관점은 좀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던 경건한 유대인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또 이 복음서를 가장 먼저 읽었을 마가의 공동체, 로마의 성도들일 수도 있습니다. ‘황제의 세상’에서 하나님나라를 기다리고 또 살아내고자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 큰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 말씀을 통해 위로와 은혜를 받았을 바로 그 성도들도, 오늘 요셉처럼 하나님나라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가가 다른 어떤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나라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음에 주목하게 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을 가장 자주, 가장 공들여 드러내신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그런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 하나님나라가 있다고 처음부터 분명히 밝혀 놓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말하면서, 그때 주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였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할렐루야! 그런데 주님 말씀하신 그 하나님나라를,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나라의 현실 그 자체였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되,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그 사랑으로 다스리고 책임지고 계심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가까이 왔다던 그 나라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이제 자신의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요셉은 분명하게 경험했고, 그제야 그는 돌이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온 세상에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가 십자가 아래서 경험한 그 하나님나라, 요셉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에게 임했던 그 하나님나라가 부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삶이 온전히 돌아서고, 또 그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오늘 우리에게 가까이 와 있는 그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삶의 현실로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울러 그 하나님나라를 요셉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그 삶이, 오늘 요셉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것’에 결정적으로 잇대어 있음을 조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을 기다리는 삶을 통해 누려진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림으로 누려지는 나라입니다.” 네, 그것이 오늘 아리마대 요셉을 통해 성경이 교훈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어떤 나라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는 나라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예수 믿으면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만 이야기하지 않고,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그리고 이미 왔다고도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기다리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천국에 가는 그 날도 우리는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죽음을 사모하고 기다린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혹시 여러분은 빨리 죽고 싶고, 그래서 빨리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지만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쁘고 평안하며 의롭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네, 요셉은 그런 삶을 기다렸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기다림으로, 이 땅에, 자신의 삶에 다가오고 있는 그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이 부분이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6.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7.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이렇게 기도하라고 일부러 가르쳐주신 것만 봐도,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이며, 그것을 이 땅에서 누리고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특권이자 책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아직 ‘하나님나라’라는 말이 뭔가 추상적이고, 아무래도 실감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하는데, 그런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 아닌 겁니다. 더 나아가 내 마음과 내 삶 역시도 하나님의 세상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나라를 기다리고 사모해야 할 현실적 이유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죽음 앞에서야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저 손 놓고 기다릴 뿐이지만, 하나님나라는 다릅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우리 쪽에서도 뭔가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하다못해 기도라도 말이지요. 하나님나라는 그 기다림 가운데 임하고 누려지는 나라입니다. 저를 다시 한 번 따라해 보십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림으로 누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내가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가, 스스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며 사십니까? 아무것도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까?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그게 뭔지를 모르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삶은 아닌가요? 사실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느냐, 그것이 오늘 우리의 행위와 삶을 규정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것에 우리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습니다. … 만약 누군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실에 대해 자포자기했거나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충분히 만족스럽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반대로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더 좋은 뭔가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믿음과 가장 가까운 단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다림은 그 자체로 우리에 관한 많은 것을 설명해줍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은 하나님나라를 기다렸습니다. 부자요, 공회원이요, 의롭고 선한 사람인데, 분명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인데, 자신과 가족의 새 무덤까지도 이미 준비가 다 끝난 사람인데, 그는 여전히 뭔가를 기다렸고,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나라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결정적인 뭔가가 결여되어 있었고, 그는 그 결핍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그것을 포기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기다리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요셉이 느끼고 있는 그 결핍을 우리 스스로 절실히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됐을 때는 그것이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다른 여러 필요와 결핍에 다시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감각이 점점 무뎌져 왔을 것입니다. (혹은 여전히 오지 않는 그 나라를 기다리다 지쳤을 수도 있지요.) 보통 우리는 요셉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부와 명예와 지위와 안전, 이런 것들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결핍을 항상 절절히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그걸 위해 기도하고, 그걸 위해 노력합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결핍을 느끼고 채우느라 요셉이 지금 가진 그 결핍,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그 하나님나라에 대한 결핍에 무뎌지고, 그것을 외면하게 됐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걸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조금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어느 말씀이 더 정확한가, 뭐 저는 예수님이 그 두 가지 말씀을 모두 하셨을 거라고 믿는 쪽입니다만, 어쨌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며,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풀기 어려운, 참 생각할 게 많은 말씀입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말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 돈 때문에 억울한 일 당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드리는 주기도문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이 기도도, 그는 정말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은 그것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여 새로운 세상을 바랄 수밖에 없는 그 삶, 하나님나라를 향한 갈망이 멈추지 않는 그 삶이 복 되며, 그가 결국 하나님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림으로 누려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문할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복이냐, 그런 것이 무슨 하나님나라냐, 얘기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기다림이 없는 신앙 자체가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은 신앙이며, 가장 불행한 신앙이라고 말씀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나라에 눈을 뜨지 못하는 성도의 삶이란, 늘 뭔가에 대한 갈증으로 허덕이는 삶이거나 허무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삶일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 또한 믿음 없는 세상과 거의 구별되지 않겠지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이 없는데 죄를 이길 힘이 어디서 올 것이며, 하나님나라를 향한 소망이 없는데 스스로 절제하며 경건에 힘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경제적으로 많이 가난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과연 내가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또한 그 나라를 기다리는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 기다림이 여러분 안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면,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다. 피폐해진 내 삶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은혜를 구해야 하고, 그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도 간구해야 합니다. 기다리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돈이 주는 편안함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돈이 주는 그 즐거움과 편안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리는 그 혜택에 금방 익숙해지며, 더 많이 가진 사람들과 쉽게 비교합니다. 결국 다시 불안해지고 불만족한 느낌에 빠집니다. 동시에 그 편안함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다림과 소망을 앗아갑니다. 일단 편안함에 익숙해지고 나면 우리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프란체스카 지노). 설렘은 사라지고 삶은 무료해집니다. 남는 시간과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조차 막막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나라를 의식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요셉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가까이 온 하나님나라를 누리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하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던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날 그 자리에서 요셉의 마음에 한 가지 말씀이 뇌리에 스쳤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고난당하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너무나 유명한 이사야 53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잠시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여기 5절부터 보시면,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아멘) 저는 그날, 요셉의 마음 가운데 이 말씀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각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당하는 메시아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더라는 이 말씀이 생각났고, ‘지금이 바로 이 때이구나. 여기 부자가 바로 나구나!’ 그런 확신 가운데 더욱 담대히 오늘 이 일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기다렸기에, 그는 그 나라의 임재 앞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했고 감당했습니다. 작년 주제 말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 32:8)는 말씀처럼,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항상 하나님나라의 일에 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냥 때가 되면 알아서 오는 것 같았던 그 하나님나라가, 예수님처럼, 오늘 아리마대 요셉처럼, 기다려야만 오는 것임을 우리는 늘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하나님나라가 그렇게 현실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저 그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갈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기다림을 통해 친히 일하시고, 모든 것을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는 이 상황 가운데 과연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기다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또한 그러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그 설렘과 기다림을 회복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나라가 우리 앞에 가까이 와 있음을 보는 눈이 다시 떠지기를 소망하고, 그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행해야 할지, 무엇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야 할지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매순간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우리의 매일의 일상을 통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주님의 세상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는, 그런 복 된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렘브란트, 1633)   그림 출처 : http://www.worshipmusic.co.kr/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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