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2020년 5월 31일 주일 설교
2020-05-3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200531 성령 강림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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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1~15,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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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66) 본문 15절의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마가복음도 이제 15장과 16장, 두 장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새벽에’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번 15장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날이 밝았고, 이른 아침 빌라도에게로 주님은 넘겨집니다. 십자가로 가는 마지막 과정이고, 빌라도는 로마의 형벌인 십자가 사형을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 빌라도 앞에 서 계십니다.
산헤드린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여기서도 거의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하신 유일한 말씀은 2절에 나오는 “네 말이 옳도다.”뿐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오늘 이 번역으로는 주님께서 긍정의 대답을 하신 것 같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을 문자대로 직역하면, “네가 그렇게 말했다.”(You have said so.)입니다. (공동번역이 옮기는 것처럼) “그것은 네 말이다.”이니 실은 긍정도 부정도 아닙니다. 더 긴 대답을 회피하는 말씀인데요, 예수님의 ‘왕 되심’이 빌라도가 생각하는 이 세상 나라의 그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호한 대답 외에는 주님은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본문의 이 장면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에는 빌라도와 주님이 나눈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마가는 의도적으로 그 내용을 생략합니다. 다만 그런 예수님의 침묵에 빌라도가 놀랐다는 이야기를 5절에 덧붙일 뿐입니다. 말은 주님이 아니라, 본문 속 다른 사람들의 몫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이 이야기하고, 많은 무리가 소리 지르며, 또 그 모든 것을 빌라도의 말이 이끌어갑니다.
빌라도는 본문 앞부분, 1~5절까지에서는 주로 묻습니다. 예수님께 묻는다는 표현이 2절에도, 또 4절에도 나옵니다. 그런 빌라도가 6절 이하의 뒷부분에서는 주로 대답합니다. 9절에도, 12절에도, 14절에도, 빌라도가 대답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질문은 예수님께 하고, 답은 무리에게서 듣습니다. 물론 주님의 침묵 때문이지만, 결국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가는 빌라도의 판단에 심각한 문제가 있겠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 사람의 생사를 판단함에 있어, 양심과 진실, 그리고 정의가 아닌, ‘어떤 사람들의 만족’이라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기준을 사용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자체로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과 빌라도의 오늘 이 대화는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결국 빌라도의 질문으로 애매하게 끝납니다. 그때 빌라도의 마지막 질문이, “진리가 무엇이냐?”입니다(요 18:38). 그 엄청난 질문을 던져놓고도, 그는 주님의 답을 듣지도 않은 채 곧장 무리에게도 갑니다. 도대체 왜 물어본 것인지 …, 예수님과는 소통이 된 게 아니지요. 그저 묻는 척만 한 것이고, 그의 관심은 실은 계속 무리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저와 여러분 역시, 어떤 말을 누구와 어떻게 섞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볼 일입니다. 여러분은 삶에 대한 여러 문제와 답들을 누구와 나누고 계십니까? 혹시 오늘 빌라도와 같이, 질문은 하나님께 하고, 답은 다른 데서 찾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 질문도 하지 않으십니까? …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인생의 중요한 문제 앞에서, 때로 다른 누군가의 이익이나 삶이 걸려 있는 그런 문제 앞에서도, 우리는 양심과 진실과 정의의 기준이 아닌, 그저 다른 사람의 기분이라는 것이 기준 되는, 그런 선택을 반복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묻고 사람에게 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지만, 우리는 그 어리석은 일을 참 많이 반복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 그렇게 된 원인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의 침묵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인터넷 검색처럼, 하나님은 곧바로 답을 주시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다려야 하고, 또 성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질문을 시험하십니다. 우리의 질문이 정말 주님의 뜻을 듣고자 하는 질문인지, 아니면 오늘 빌라도의 질문처럼, 그저 형식상 그냥 한 번 해 보는 질문인지, 그 진정성을 확인하십니다.
요즘에 묵상하고 있는 하박국 말씀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 역시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합니다. 질문의 방식도, 표현도 매우 감정적입니다. 하박국 1장 전체가 그런 선지자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2장으로 넘어오자마자 선지자는 우리에 뜻밖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성루 위로 올라가 파수하는 곳, 망대에 서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고 있겠노라고 고백합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질문을 했다면 답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하고, 그 답을 정말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파수꾼과 같이 더 예민한 자세로 그분의 말씀 앞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마다 반드시 얻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침묵의 시간을 인내로. 깨어 있음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부디 하나님께 묻고 듣는 그 과정을 깨어 인내함으로, 삶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바르고 온전한 길을 찾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 오늘 본문에는 결국 두 명의 왕, 두 명의 심판자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의 왕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나, 현재 예수님의 생사여탈권을 쥔 건 오히려 빌라도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빌라도는 당시 그곳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황제를 대신하는 자이고, 사형집행도, 사면도, 모두 그의 권한 아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제사장을 결정하고 임명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 모두에 있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마가는 그런 빌라도와, 또 다른 왕 예수님의 모습을 같은 화면에 두고, 참된 힘과 자유, 그리고 책임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오늘은 이 두 왕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왕 같은 제사장’으로의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권한을 가집니다.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권한도 커집니다. 이 권한에는 누군가에게 끼치는 영향력과 스스로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부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힘을 추구하지요. 돈이라는 힘, 권력이라는 힘, 인맥이라는 힘, 그것은 결국 더 많은 선택의 자유와 더 큰 영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 자체가 분명 행복일 겁니다. 하지만 자유와 영향력이 증가하는 만큼, 우리의 만족과 행복도 비례적으로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런 힘을 충분히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고, 또 내가 실제로 과거보다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영향력을 끼치고 살아보면 직접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생각만큼 많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얻은 힘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소소한 행복들을 희생해야 합니다. 가족과의 시간이나 일상의 여유, 쉼들을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되지요.
돈이나 힘이 주는 자유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그 자유는 선택의 폭을 넓히는 자유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나와 우리의 행복의 폭을 넓히는 자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 한계로부터 기인합니다. 인간은 주어진 자유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바르고 좋은 선택을 내리는 일 앞에서 매번 흔들리고 실패합니다. 본문 속에서 가장 많은 자유와 힘을 가진 빌라도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극한의 자유와 영향력을 누렸습니다. 그는 그곳의 실질적인 왕이었고,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하나, 선악과만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선악과라는 마지막 남은 자유를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자유와 행복을 잃어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그 마지막 자유까지 있으면 완전해진다고 유혹한 뱀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왕 같은 존재일 수 없게 됐습니다. 왕이 아닌 종, … 뭔가의 종, 누군가의 종,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실존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물론 이것은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빌라도는 그 믿음의 영역을 잠시나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른바 하나님 없는 자의 왕 됨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 사실 본문 속 빌라도는 그리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단히 좋은 사람, 좋은 권력자가 되려고, 자신이 가진 권한을 바르게 사용하려고 애씁니다. 본문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 역시 빌라도를 결코 엄청난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본래 역사가 증언하는 빌라도는 그런 인물은 아닙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철저하게 정치적인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도 아주 잠시 언급이 됩니다만, 한 번은 예루살렘에 제물을 가지고 온 갈릴리 사람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시신을 다른 짐승의 제물과 섞어서 버리라고 명령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정말 끔찍하고 잔인한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던 열네 명의 총독 중 가장 길게 통치했습니다. 그만큼 계산이 빠르고 정치적 수완이 좋았지요. (그런 그를 최대한 무난하게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가 뭘까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어떻게든 로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에서도 빌라도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놓아주려 애쓰는 자로 묘사됩니다. 최대한 바른 선택을 내리고자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진지하게 심문하고, 백성들의 의견도 묻습니다. 누가 봐도 우리가 아는 네로 황제 같은 말도 안 되는 폭군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확신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 넘긴 이유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유대인의 왕’ 예수는 열심당의 지도자인 바라바보다 훨씬 덜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는 그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왕일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바로 그 시각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서 말을 전하지요.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오늘 꿈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자신이 애를 많이 태웠다는 이야기까지 전해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결국 대제사장들에게 매수된 군중의 말을 따릅니다. 본문에는 그 군중을 ‘무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8, 11, 15절). 여러분 ‘무리’가 누구입니까? 한 덩어리의 소리,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무리’는 힘에 의해, 돈에 의해 매수된 소리이며, 스스로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여, 자유를 잃어버린 소리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빌라도는 시종일관 그 소리를 두려워하고, 결국 참 된 소리, 참 된 말씀을 십자가에 넘겨줍니다. 누가 총독이고, 누가 다스리는 자인지조차 헷갈리는 결과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손을 씻습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이 대목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 없음을, 그리고 그 피의 대가가 자신과 무관함을 최종적으로 선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손을 씻는다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까지 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결국 그 결정은 오롯이 빌라도의 것으로 남습니다.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신앙고백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어 왔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라는 그의 풀네임으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빌라도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사람이 기억할 것입니다. 손을 씻는다고 그 책임까지 씻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럴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결국 빌라도를 가장 무책임한 자로 결론내립니다. 분명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나, 그는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좋은 왕의 흉내는 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도 했고, 여러 질문을 하고 답도 들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소통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스스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책임지지 않는 선택, 그 한 가지로 그의 모든 노력들은 그저 이기적이고 비겁한 허영심에 불과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여러분, 리더는, 왕은 책임지는 자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한과 자유의 양만큼,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소통했다는 사실이나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그 책임까지 면제해주지는 않습니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 힘, 책임지지 않는 자유는 결국 누군가에게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의 자유는 더 이상 자유라 할 수 없습니다. 자유는 그 책임의 크기만큼, 정확히 그만큼만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당신의 백성을 책임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늘 빌라도 앞에 서 계십니다. 실패한 당신의 백성과 죄인 된 당신의 자녀들을 끝까지 주님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문제이고, 우리의 죽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당신의 책임이라고, 하나님은 십자가로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는 참다운 왕이며, 인자(人子)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종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진리와 자유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왕처럼 책임 있게 섬기는 자로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왕처럼 책임 있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자,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이 빌라도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감춰진 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무척 괴로웠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내가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실제로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소통하려 노력하고, 질문하고, 그런 행위들 자체가 책임은 아니기에, 그것이 단지 비겁한 허영심에 불과할 수도 있기에, … 정말 성도들의 신앙과 교회의 안녕에 대해 얼마나, 나는 어디까지 책임지려는 목사인가, 깊이 고민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 결국 무거운 책임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나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타인과 이웃까지, 왕의 책임감으로 섬기는 자, 그것이 성도의 부르심입니다.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왕의 책임감으로 섬기는 제사장’(*) 네, 교회도, 직장의 일도, 가정도, 또 여러분 자신의 인생도, 우리는 온전히 책임지는 자로 서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임과 자유를 우리 힘으로는 지켜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오늘 성경이, 빌라도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그 능력으로부터도 멀어졌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철저하게 하와를 탓합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손을 씻고자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모습으로 타락했고, 그렇게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죽음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가지고 있는 자유만큼 책임 있는 선택을 내리지 못합니다. 특별히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실존을 두려움이 채우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속 모든 인간들이 보여줍니다. 빌라도도, 대제사장들도, 그리고 그 많은 ‘무리’도 결국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시기심으로 예수를 고발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사라질까 그 두려움에 생긴 시기심입니다. 많은 무리는 그런 대제사장들에 의해 매수됐습니다. 돈에 의해, 돈에 대한 두려움에 스스로 불의의 도구가 됐습니다. 빌라도 역시 결과적으로는 무리가 가진 힘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힘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롭고자 하고, 양심대로 살고자 하나, 그러질 못합니다. 참 된 자유는 두려움을 이겨야 가질 수 있는데, 그 담대함은 오직 만물을 사랑으로 다스리고, 죽음을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진리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 진리에 대해 빌라도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 사전에서 찾아보면 참된 이치요, 참된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전혀 이해에 도움이 안 됩니다. ‘참되다’는 하는 것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나 ‘거룩’이나, ‘사랑’ 이러한 것들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것은 결국 완전함에 관한 단어이고, 죽음이 다스리는 것 같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도덕경’ 첫 줄에서 말했지요.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 참 된 이름이 아니다.” 진리도,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속한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가치이기에, 우리는 직접 다가갈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구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인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본래는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될 것이냐, 그래서 그 앞부분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능력이나 지혜가 생길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고, 우리가 부활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진리에 대해, 자유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다만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면,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따르면,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단 하나, 다름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주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진리를 알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예수를 믿되 온전히 믿어서, 그분의 말을 신뢰함으로, 그의 제자로 사는 데까지 믿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진리와 참 자유와 책임 있는 삶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님은 이야기하십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쫓아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힘이나 돈을 쫓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주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들은 조금 더 편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자유한 삶, 참으로 책임 있는 삶은, 오직 진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만 있습니다. 힘이나 돈이 아니라, 끊임없이 예수를 향해, 그의 말씀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만족과 책임 있는 삶의 열매가 있음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리로 나아감에 있어 길을 잃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오늘이 성령강림주일입니다만, 주님은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주십니다(요 16:13). 그래서 주님은 그 성령을 사모하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나라라고 말씀하시며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 성령 안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셨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하는 만족이 아니라, 지금 있는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때 느끼는 깊은 영혼의 만족을 …, 남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 안에서 얻어지는 깊은 행복과 안심을 …, 많은 것을 먹고 누려서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에서 찾아지는 그 온전한 쉼과 자유함을 …, 진정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통치에 잠겨서 누리는 그 생명의 충만한 경험들을, 여러분 부디 꼭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이미 누려지고 있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높고 존귀한 자유의 부르심에 대해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말씀드린 ‘왕 같은 제사장’의 책임 있는 삶, ‘왕의 책임감으로 타인을 섬기는 삶’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 것입니다. 단지 내 삶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까지 돌아보게 될 것이고, 단지 나의 자유에 구속된 삶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자유를 위해 스스로를 구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 성도님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존경하고, 더욱 그 삶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동물의 왕국’을 자주 봅니다만, 맹수가 어떤 무리 가운데 먹잇감을 사냥할 때, 일단 가장 약한 한 마리를 노려서 추격하지요. 물론 모든 주변 다른 동물들도 함께 도망갑니다. 그러나 결국 맹수가 그 약한 한 마리를 잡아서 입에 물고 있으면, 주변의 다른 동물들은 도망가기를 멈춥니다. 이제 자신들은 안전하다, 이 뜻이지요. 그리고 그 한 마리가 완전히 숨이 멎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멀뚱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때로 아주 가끔씩은 다른 선택을 내리는 무리를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 맹수에게 붙들렸을 때, 갑자기 주변의 가족과 이웃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맹수에게로 달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붙들린 짐승을 구해내고, 맹수를 멀찌감치 물러서게 만들지요. 그리고 비로소 그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함께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물린 것은 아니지만, 내 가족이 물린 것은 아니지만, 다 같이 함께 책임을 지려고 할 때, 우리가 사는 약육강식의 세상도 조금은 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맞서는 우리고백교회가 부디 그런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만 고통당하지 않으면 괜찮아, 이런 태도가 아니라, 결국 그것이 내 문제임을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며,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타인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 자유를 절제하고, 타인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간절히 함께 기도하는, 그런 책임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러려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삶,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끊임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먼저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정말 나는 자유로운가, 나는 책임을 지는 자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자유에 대하여는 스스로 늘 질문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 여러분, 빌라도가 손을 씻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는 자유롭지 못해. 나는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양심대로 결정하지 못한 부자유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지요. 부자유한 사람의 특징은, 본인이 부자유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반대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늘 인식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과연 자유한가, 나는 무엇에 매여 있는가, 내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두려움까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결국 내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기 전에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배를 집어삼키려는 풍랑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잠잠케 됐을 때, 제자들은 비로소 주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풍랑을 두려워하던 그것과는 다른 두려움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두려움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해지는 두려움입니다.
부디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는 자유와 담대함이 있기를, 성령이 인도하시는 참으로 자유하고, 책임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시기를, 그래서 정말 왕처럼 책임 있게 타인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