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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2020년 5월 3일 주일 설교
2020-05-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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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200503 부활절 넷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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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32~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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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62) 본문 42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으로 온전히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눈 제자들과 주님이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올리브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작은 동산인데, 그 이름 ‘가트 쉐마니’는 ‘(올리브) 기름을 짜내는 틀’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산에서 거둔 올리브 열매를 모아 압착기를 이용하여 기름을 짜내는 곳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거기서 당신의 모든 걸 짜내는 마지막 기도의 씨름을 시작합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세 번에 걸쳐 가진 힘과 진액을 다 뽑아내는 씨름입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기도하시던 주님의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하지요. 피와 땀을 짜내는 기도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런 기도에서, 문득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밤새 홀로 천사와 씨름했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때 야곱은 결국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의 씨름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기 위한 씨름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내려놓고, 내가 감당해야 할 고난을 받아들이기 위한 기도이지요.
여러분도 이와 같은 기도 해보셨을 겁니다. 금방 생각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의 기도 상당 부분이 그런 내용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기 위한 기도, 이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지기 위한 기도이지요. 하나님의 뜻이고 내게 주어진 길인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 내 의지를 무릎 꿇리기 위한 기도, … 성도는 그런 기도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우리의 삶의 방향이, 늘 우리의 본성이 원하는 쪽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표현은 좀 다를지 몰라도, 그래서 우리에게도 늘 이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고, 또 그를 믿는 이들의 기도입니다.
지기 위한 기도, 말이야 멋있지만, 그런 기도의 씨름이 쉽고 유쾌할 리 없습니다. 오늘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지요. 사실 주님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심한 고민과 갈등으로 괴로워하십니다. 33절과 34절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주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했고, 심히 고민하여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심정을 묘사하기 위해 여기 사용된 단어들은 모두 성경에서 잘 사용하지 않은 그런 표현들입니다. 주님이 느끼는 고통스런 감정의 깊이가 어떠한지 잘 말해줍니다.
한편으로는 주님의 이런 말씀들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채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 죽음에 넘겨져야 합니다. 육체와 마음과 영혼 전부가 극도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런 반응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당혹감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힘들어 죽겠다, 사실 이런 말은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알고 있고, 아무리 힘들어도 가능하면 말로는 감사를 고백해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이런 모습은, 교회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순교자들의 의연한 죽음과 비교해도, 정확히는 그런 기록들과 비교해도, 무척이나 의외입니다. 더구나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앞에서 하시는 고백인데, 주님은 너무 노골적으로 당신의 감정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아들의 권위나 스승의 체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정말 가장 편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님은 당신의 마음과 형편을 제자들에게 다 말씀하시고,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기도에서 더욱 뚜렷해집니다. 겟세마네의 이 기도는 진실하다 못해 자칫 유혹에 넘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시고, 또 내 원하는 바가 있다고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비록 그 결말은 순종이고, 십자가이지요. 하지만 그 과정은 끊임없는 유혹과 흔들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주님은 당신의 밑바닥을 모두 드러내 보이셨고, 그 내면을 다른 무엇으로 꾸미거나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런 의미입니다. 내 마음을 그대로 토해내겠다, 하는 뜻이지요. 물론 여기 ‘아빠’라는 표현이 우리말 ‘아빠’는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표현 ‘압바’를 그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아버지’에 해당하는 ‘아브’의 특별한 강조 형태가 ‘압바’입니다. 자녀가 존경과 사랑을 담아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말 ‘아빠’와 뉘앙스가 많이 비슷한데, ‘아빠’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격식을 차린 말입니다.
사실 우리말 ‘아빠’도 그 뉘앙스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서 1960년대까지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유대인들에게 ‘압바’도 그랬을 겁니다. 더구나 하나님께는 더 더욱 사용하지 않았지요. 예수님 당시 랍비들의 문헌에 보면, 하나님을 ‘압바’라 부른 기록이 아예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만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기독교 용어였던 셈이지요.
갈라디아서 말씀에 보면, 바울이 이 표현의 의미를 강조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들(자녀)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자녀)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하나님을 ‘압바’라 부르는 그 자체가, 우리 안에 자녀의 영이 있어 생긴 결과라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주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지요?
어쨌든 주님은,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앞에 다시 ‘아빠’라는 호칭을 더하셔서(‘아빠 호 파테르’), 주님이 하나님과 맺고 누리는 그 관계를 분명히 표현하십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존경하고 인정하며 그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그 앞에 토해낼 수 있는, … 힘들고 어려운 속마음을 정말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관계라는 것이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이처럼 주님은, 비록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서 버림받아 죽음에 이르는 십자가 앞에서조차, 끝까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셨고, 당연히 감추거나 꾸미지도 않으십니다. 있는 그대로 다 고백하고 진실하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본문 전체에서 말하는 사람, 발화하는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도 다 침묵하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 또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 혼자 말씀하시고, 주님 혼자 기도하십니다. 십자가의 여정 그 자체가 너무나 고독한 싸움인데,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것을 결코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홀로 지셔야 합니다. 그걸 남이 대신 감당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그 길을 나와 함께 가자고, 내 곁에서 함께 기도해달라고, 나를 좀 도와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면서도,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진실하며 그 내면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것이지요.
우리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내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에 참 연약합니다. 힘들어도, 힘들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괜찮다고 합니다. 혼자 너무 힘들어하다가 잘못된 방법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일도 많습니다(아내를 향한 짜증). 도저히 순종할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믿습니다!’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이 그랬지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 다 배반할지언정, 나는 주를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 주님 지는 십자가 그 고난의 잔을 나도 마실 수 있다고, 일단 말부터 해놓고 봅니다. 그리고 홀로 그 말에 책임을 지려다 넘어지고 실족합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주님은 정반대입니다. 힘들다, 못하겠다, 죽을 것 같다, 입으로 다 토해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예수님에게 어떤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는 건지, 십자가 말고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건지, 도대체 ‘주님 자신의 원(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심지어 주님은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길을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 바로 그런 주님만이 결국 그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고,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정반대로 갑니다. 말로는 괜찮다, 할 수 있다,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 순종하지 못합니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꼭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때 넘어집니다. 유다처럼 혼자 끙끙거리다 주님을 팔아넘깁니다. 베드로처럼 나만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 해놓고 주님을 저주합니다. 어디서 갈등하고, 어디서 이겨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이 진짜 믿음의 능력인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의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가 첫째 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 포도원에 좀 가서 일하고 와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들이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라고 흔쾌히 말을 했다지요. 그런데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똑같이 말했는데, 이 아들은 처음에는 “싫어요,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뉘우치고, 결국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하시지요.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여러분, 우리는 결국 말이나 기도로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삶으로, 또 십자가의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이지요. 기도 가운데 뭐라 고백하느냐,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실제 행하는 순종과 비교한다면,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경건은 주로 그 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말의 경건을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중요한 건 행위의 열매요, 순종이지요. 정말 포도원에 갔느냐, 정말 십자가를 졌느냐, 오직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그 열매가 어떻게 맺어지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십니다. … 압바 하나님께, 내 형제자매 된 지체들에게, 가능한 진실하고 정직하게 내 형편과 고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허세가 아니라 진실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용기가. 또 믿음이 필요하지요. 내 밑바닥을 드러낸 채, 도움을 요청하고, 나와 함께 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믿음인 것입니다.
내 감정과 고통에 대해 진실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 앞에 놓인 고난을 피하거나, 영적인 책무를 회피하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싸움은 피할 수 없고, 그 싸움을 피하지 않기 위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싸울 힘을 얻기 위해 지금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머물며 깨어 있어달라고,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일어나서 십자가까지만이라도 나와 함께 가자고, 지체들에게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힘껏 내 애통함을 토해내는 건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서로 남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했습니다. 내 짐도 무거워 죽겠는데, 남의 짐까지 질 수는 없다, 그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길은, 나 혼자서 그저 내 짐만 져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 어려움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서로의 짐을 함께 나눠 질 때, 비로소 이뤄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법이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함께 온전함을 이루어가기 전에는,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것입니다(by 레슬리 뉴비긴).
설사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고, 내 사랑하는 지체들마저 피곤하여 잠들어 기도하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진실한 고백 자체가 우리를, 불필요한 짐에서 자유케 하며, 우리를 어둠에서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그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견디기 힘든 그 순간을, 견디고 버티는 힘이 바로 그 고백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것에서 그 힘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인생의 밤이 찾아왔을 때, 폭음이나 폭식 같은, 잠시 고통을 잊게 해 주는 많은 다른 진통제들 말고, 정말 우리를 온전히 견디고 버티게 해 주는 믿음의 관계 안에서 진실한 고백을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참 된 자유와 깊은 쉼을 허락하시고,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또 한 발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이 겟세마네의 기도와 고백을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살아내기를 축복합니다. 힘겨운 믿음의 여정을 진실한 고백으로 견뎌내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가능하려면 중요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 다름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가, 교회가, 반드시 서로의 약함을 용납하고 그 나눔을 기뻐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누군가의 약함의 고백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교회의 목사와 성도 누구나 가르치고 주장하는 자세를 멈춰야 합니다. 신앙을 마치 또 하나의 경쟁처럼 여기고, 남과 비교하는 태도 자체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면 족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강함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고후 11:30) 공동체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엄살을 부리자는 게 아닙니다. 진실하자는 겁니다.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또 자기 자신 앞에 진실하게 내려놓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허락한 참 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내 약함을 드러내면 반드시 공격을 당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약해도 강한 척 해야 하며, 힘들어도 아닌 척 해야 합니다. 이미지가 실력으로 통합니다. 그건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연약하고 또한 악하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요즘 ‘부부의 세계’ 보십니까? 거기 보면 하나의 마을 공동체가 등장하는데, 공동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누군가의 약점이 한 번 드러나면 없는 말도 지어서 남을 헐뜯습니다. 그게 세상을 사는 재미고, 그나마 내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진통제입니다.
교회마저 그리 되면 안 됩니다. 여기 모인 이유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아닌 척 해봐야 우리는 다 죄인이고 연약하다는 걸 모두가 압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스스로 노력하면 할수록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예수가 죽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처참하게 죽어야만 구원이 가능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기독교는 믿고 고백합니다. 거듭난다는 말, 실은 무서운 말입니다. 고쳐서 쓸 수 없고, 반드시 죽어서 다시 태어나든가 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하하자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단과 처방을 인정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쉼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이미 용납되었으니, 이미 자녀의 권세를 주셨으니, 비난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나 진짜 모습을 고백하는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인간의 영을 두 가지로 구별했습니다. 하나는 종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 자녀의 영입니다. 종의 영은 두려움을 특징으로 합니다. 종은 주인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고, 주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심초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의 영을 가진 채 사는 이들은 안식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내가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있다는 사실, 내 인생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처방이 십자가입니다. 가장 두려운 것, 가장 절망적인 것, 가장 피하고 싶은 그것을 예수가 친히 감당했다는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부으셨고, 하나님을 ‘압바’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이미 용납되었으며,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도록 높여졌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그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들이어서 영광만이 아니라 고난도 함께 감당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 역시 겟세마네를 피할 수 없습니다. 제대로 예수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할 수만 있다면 지체 앞에서, 진정 자유롭고, 진정 진실하여, 함께 용납하고, 함께 서로를 굳게 하는(눅 23:32), 그런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서로 경쟁하듯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여기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 본 받을만한 어떤 대단한 신앙적 영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진실한 믿음의 벗이 필요할 뿐입니다. 나 자신과 똑같은 연약함과 두려움과 똑같은 갈망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이 오늘 주님의 마지막 이 기도의 씨름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이며, 우리가 함께 그 말씀을 묵상하는 목적입니다.
저는 우리고백교회가 반드시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만 오면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나다운 모습이 될 수 있는 그런 교회, 세상에서 내내 끼고 있던 마스크를 좀 벗어던질 수 있는 교회 …. 여러분 요즘 마스크 쓰고 다니려니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날이 더워지니까 훨씬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교회 오면 그런 마스크를 좀 벗어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신앙과 인격의 마스크를 벗어던질 수 있는 교회, 심지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기도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거리낌 없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꽤 긴 시간 서로를 만나지 못한 채 우리가 이렇게 다시 함께 모이게 됐는데요, 여러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고백교회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이 이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십시다.
오늘 힘겨운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뭐라 말씀하십니까? 여전히 잠에 빠진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제 그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합니다(42절). 부족한 줄 아시면서도, 그들과 끝까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며, 그 마음이 부디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함께 있는 믿음의 식구들 되기를 원합니다. 몸만 잠시 같이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정말 함께 있다는 마음이 들 수 있는 그런 공동체로 세워져 가도록, 우리가 함께 노력하십시다. 부족한 저부터 그렇게 더 노력하겠습니다.
19세기 성공회 개혁가인 R. M. 밴슨이라는 사람의 말인데, 저를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나를 향해서는 진실한(정직한) 마음을.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주님을 향해서는 타오르는 마음을.”(Re) 네, 우리가 정말 그런 모습으로 함께 빚어져 가기를 소망합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