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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음식' 2020년 4월 19일 주일 설교

2020-04-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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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9 부활절 둘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4:12~26, 유월절 음식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60) 본문 14절의 ‘유월절 음식’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으로 온전히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지난주 말씀 중에 우리는 유다의 배반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잠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염려했던 민란이나 소동 없이, 아주 신속하게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너무나 만족스런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모략들마저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 합력하도록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다름 아닌 유월절 명절에 정확히 일어나야 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저 멀리서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역사와 삶의 모든 자리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열심’이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이 최후의 만찬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뜻과 성취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본문의 배경,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배경은 유월절 식사입니다. 12절에 보면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되어 있지요. 주님은 유월절이라는 명절의 만찬(일종의 가족 만찬)을 당신의 제자들과 잡수시는 것으로 이 땅에서의 모든 공적 사역을 마무리하십니다. 그리고 그 식사와 주님의 죽음을 잇대어, 이스라엘의 오랜 유월절 전통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시는 것처럼 유월절과 그것을 기념하는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자기정체성 자체가 거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전날 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히브리 백성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의 집은 넘어감으로써 그들은 이른바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통해 애굽의 긴 노예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그렇게 무작정 광야로 나간 그들을 하나님은 질서 있는 민족 공동체로, 하나의 국가적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국가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법을 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영토를 약속하시면서 말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그런 의미입니다. 단지 구원과 해방의 날일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드디어 세상 앞에 서게 된 날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개천절과 광복절, 그리고 제헌절까지 합해진 그런 의미가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 안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유월절 식사를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심으로써, 그리고 그 나누는 떡과 잔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당신의 몸이라 하심으로써, 유월절 자체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만드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월절과 출애굽을 통해 히브리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창조하시고 언약을 베푸신 것처럼, 오늘 주님은 이 유월절 만찬을 통해, 새 이스라엘, 새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는 새 언약을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흘리는 당신의 피를, 24절과 같이, ‘언약의 피’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새 언약의 피’이겠지요. 이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사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어그러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화목 제물의 피라는 의미도 있겠고, 그 화목의 관계를 언약으로 확증하는 데 필요한, 즉 언약 자체가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그런 피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전자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연관되고, 후자는 시내 산에서 있었던 언약식에서 뿌려진 피와 연결됩니다. 애굽에서 보낸 마지막 밤,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른 유월절 그 사건은 여러분이 잘 아실 테니, 시내 산에서 있었던 언약식에 대해서만 잠깐 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강해에서도 같이 나눴던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온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와 순종의 결단을 담아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로 예배합니다. 그 과정 중에 모세가 아주 특별한 한 가지 세리모니를 하게 되는데요,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그 짐승의 피를 여러 양푼에 담아, 절반은 제단에,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쏟고, 또 남은 절반은 백성들을 향해 뿌립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언약이 이루어졌음을 확증하는 그런 피였던 것이지요.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언약의 피’라는 표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사실 언약의 당사자들을 향해 피를 뿌린다는 것 자체가 매우 장엄하고 비장한 느낌이지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지 조금이나마 실감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새삼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택하셨는지, 이것이 결코 돌이키거나 취소될 수 없는, 생명이 걸린 그런 언약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가 바로 그 언약의 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당신의 피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씻는 대속의 피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언약이 얼마나 완전하며, 영원한 것인지를 확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납하셨고,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셨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예수의 피로 확증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 언약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내어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하게 받아들여졌으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한 존재인지,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가, 그런 건 다음 문제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하나님께 받고 있는가, 나와 하나님을 연합하게 하는 그 언약이 누구의 피로 이루어졌는가, 내가 얼마나 완전한 언약 안에 거하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인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일 수 없으며, 비루하고 어그러진 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 예수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실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그 언약 앞에 성실하게 사십시다. 우리에게 뿌려진 피가 누구의 것인지,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세상에 증언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생각해봤습니다만, 오늘 이 만찬에서 주님이 또한 힘주어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 더 발견됩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피와 분명히 구분되는 새 언약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 주님은 유월절 대속의 피나, 시내 산 언약의 피와는 달리,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당신의 몸을 또한 먹으라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의 피, 여러분, 그건 마시는 게 아니지요. 당연히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뿌린 그 언약의 피 역시 마시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율법 자체가 피를 엄하게 금하고 있지요. 피는 곧 생명이어서 어떤 생명의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먹는 누구든 그 생명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레 17:14). 지금이야 그런 금기가 거의 사라졌습니다만, 율법에 얽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사도들의 시대에서도 이 전통만은 유지가 될 정도였습니다(행 21:25).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인 제자들에게, 또 그리스나 로마의 이방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부분 중 하나였을 겁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내 몸을 먹어야 한다, 내 피를 마셔야 한다, 하는 말씀을 들었던 여러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 6:60, 새번역)라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건 당시 유대교 신앙이나 근동의 문화에 있어 낯선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주님의 피를 마신다? 그 의미가 어렵기는 우리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주의를 기울여 읽어보면 한 가지 재밌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된 부분인데요, 22절에서 24절 부분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실 때와 잔, 곧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실 때에 있어서, 순서상의 차이가 발견됩니다. 찾기 그리 어렵지 않은 차이이긴 한데요, 여러분 찾으셨습니까? 떡은 떼어 주신 후 곧바로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그것이 주님의 몸이라는 말을 먼저 듣고 난 후 제자들이 먹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포도주는 반대입니다. 잔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셔서 그들이 다 마신 다음에, 이것이 주님의 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당시 제자들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어서 일단 마시게 하고 설명하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해보게 됩니다. 어쨌든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 단순히 성찬식에 참여한다는 건 아닐 텐데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여기에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Re) 생명의 떡을 먹으면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주님의 피를 마시면 목마르지 않을 텐데요, 주님은 그 떡을 먹는 것을 ‘내게 오는 자’라고 하셨고, 그 피를 마시는 것을 ‘나를 믿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조금 쉬워지긴 했지만 이것도 여전히 막연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그렇지만, 주님을 믿는 것도 사실은 그리 설명하기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 이것도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정말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익숙한 질문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고, 그런 고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냥 암기하는 교리적 내용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 예수를 나의 주로 영접하여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여러분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네, 기본적으로는 옳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답을 듣고 누군가 이렇게 반문한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또 대답하시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설명한 것은 예수님에 관한 어떤 내용을 믿는 것이지 예수님 자체를 믿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고 그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 라고 말입니다. 네, 일면 맞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는 단지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는다는 것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에 관한 진실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자체를 믿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순히 예수라는 분이 신뢰할만하며 그의 말은 틀림이 없다는 것, 그런 생각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을 정말 지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그저 예수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과 다릅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과도 다릅니다. 예수 자체를 믿는 것은 예수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며, 끊임없이 예수를 공급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몸이 음식에 의존하는 것, 우리 몸이 음식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이 음식의 힘을 믿고 그것을 받아들여 존재하듯,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렇게 예수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처럼, 당신을 먹고 마셔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단지 나를 믿어라, 이게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하는 훨씬 더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으로, 또 어떤 눈에 보이는 분명한 하나의 행위로 바꾸어 설명하십니다. 믿음은 어떤 관념이나 생각일 수 없습니다. 명확하고 실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의 실체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확증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저 믿습니다, 말의 고백이 아닙니다. 정말 예수를 찾고 부르며 그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음식의 힘을 신뢰한다고 배고픔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저 음식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믿습니다, 백 번 천 번 고백해봐야 실제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을 주겠다,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생수를 주겠다,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곧 떡이고, 내가 곧 참된 음료라고 하십니다. 예수 자체가 영생의 음식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라 하십니다.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부활을 주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며, 생명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 역시 예수라는 생명을 지금 여기서 내가 먹고 영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예수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참 된 음료다, 하는 주님의 말씀은, 더 쉽게 말해서, 그냥 예수가 우리의 밥이요, 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를 먹고 마시지 않는 한, 예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섭취하지 않는 한, 예수의 영을 사모하고 마시지 않은 한, 우리는 결코 참 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를 생각해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의 육체는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나갈 수 없습니다. 먹지 않으면, 마시지 않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죽어갑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무언가를, 어떤 생명이든 먹어야 삽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아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외부의 생명에 의존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하게 다른 생명에 의존하여 그 삶을 유지합니다. 지금 주님은 그 생명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생명을 섭취하지 않고는 우리가 단 하루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렇다고 하시지요. 주님도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먹는 그 사람도 예수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57). 여러분, 이 말씀을 참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홀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마치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지만, 실상 그렇게 살면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생명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에 의존해 있고, 거기 잇대어 있습니다. 그걸 잊으면 안 되기에, 주님은 하나의 예식을 제정하셔서 우리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예수를 먹고 마셔야 하는 그런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가 주님을 먹고 마시기만 한다면, 정말 하나님의 자녀처럼, 예수님처럼 존귀한 일을 행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떤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계신지 가늠이 되십니까?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그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존귀할지, 이보다 더 분명한 비전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먹는 모든 사람이 예수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수가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분명히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어지는 말씀에 나오는데요,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셔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우리가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결정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며,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구하여 그 이루시는 일들도 누려야 합니다. 예수가 줄 수 있는 생명과 만족을 다른 것으로 헛되이 대체하려 하지 말고 말입니다.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깊은 생명의 만족과 안전을 잃어버리지 마십시다.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지 마십시다. 그저 머리로 이해하는 예수가 아니라, 음식과 생수로서, 참으로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실존에서, 우리가 살아갈 힘과 에너지가 됨을 믿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주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유월절의 이 만찬은 본래 1년에 한 번 지키는, 절기의 식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절기의 식사를 유대인의 매우 평범한 일상의 식사로 바꾸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유월절 메뉴, 어린양 고기와 쓴 나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빵과 포도주만 있으면, 밥과 음료만 있으면, 이 식탁은 차려집니다.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으로서가 아니라, 날마다의 평범한 음식처럼 당신의 몸이, 당신의 말씀이 누려지기를, 주님은 바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그 바램대로, 날마다의 삶에서 예수를 먹고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예수를 씹고 먹어, 정말 예수의 삶을 사십시오. 주님은 거기까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말씀하셨고, 우리가 주를 원하고 사모할 때, 넘치는 은혜로 우리를 채우실 것을 또한 약속하셨습니다(고후 9:8). 그 약속을 믿고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밥 먹듯 예수를 찾고, 구하고,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주님 말씀하신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되기를, 그래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의 삶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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