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안전하리라' 2019년 신년 감사 예배 설교

2019-12-3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1231  신년 감사 예배 메시지 ----------------------------------------------------- 잠언 29:25~27,  안전하리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본문 25절의 ‘안전하리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매년 늦가을이나 초겨울이 되면 기도원에서 이른바 목양 리트릿의 시간을 가집니다. 일상에서 조금 물러나 다시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올 한 해를 뒤돌아보고, 또 새해를 준비하며 그렇게 한 주를 보냅니다. 새해 주제 말씀을 받아 정하는 것도 그때입니다. 올해도 가평에 있는 필그림 하우스에서 리트릿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요, 올해는 아내의 독일 출장과 날짜가 겹치게 돼서, 좀 더 묵상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리트릿을 갈 때마다 제게는 어떤 기대와 떨림이 있는 것이, 바로 이 새해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 때문입니다. 과연 내년에는 또 어떤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통해 어떤 계획을 이루어가실까, 한편으로 기대도 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정해야 하는 목사로서 영적인 부담감도 있습니다. 그래서 리트릿 내내 이 부분을 두고 씨름하게 되는데요 …, 그런데 이번 리트릿에서는 비교적 쉽게(?) 주제 말씀을 받게 됐습니다.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인데요, 기도원에 도착해서 몇 분 기도하지 않고서 곧장 이 주제, 이 말씀이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처음엔 어떤 중요한 단어나 표현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번에는 어떤 일련의 단어들이 기도하는 제 마음에 처음부터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는데요, 당시 제 마음이 너무 평안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기도원으로 가는 길에, 구체적으로는 가평읍에서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외진 길 어딘가에서, 제 자동차에 문제가 생겨 멈춰 섰던 겁니다. 견인차와 함께 늦은 시간까지 여러 정비소를 전전했고, 겨우 문을 연 카센터에서는, 지금 부품이 없고, 또 어디서 구할 수도 없으니 당일 수리는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엔 정비소 사장님으로부터, “내가 왜 이런 차를 받아서 이 고생이냐?” 하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그땐 정말 마음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차를 정비소에 맡긴 채, 기도원까지 택시를 불러 올라갔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버스도 다 끊긴 상태였습니다. 방에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컵라면으로 저녁을 대충 때웠더니, 절로 간절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그때 제 마음에 어떤 말들, 어떤 말씀들이 계속 맴돌고 있었겠습니까? 네, 쉼, 안정, 잠, 평안, 계속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번 주제 말씀은 그렇게 해서 정해진 말씀입니다. 그 단어들을 마음에 품고 성경 여러 곳을 묵상하다가 결국 오늘 이 잠언의 말씀에서 제 마음이 멈추게 됐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힘 있는 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지만, 사람의 모든 일은 여호와께 달려 있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의로운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 지금도 제겐 너무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이지만, 그땐 특히나 이 말씀이 힘이 됐습니다. 그래 내년에는 평안이구나, 안전이구나 …,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늘 이루어져왔으니, 교회도 내 삶도 샬롬이 가득하게 하시겠구나, 금방 마음이 놓였습니다. 혹시 차도 바꿔주시려나, 하는 기대도 살짝 있었습니다. 물론 집으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카센터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주신 말씀만으로도 저는 평안해졌습니다. 사실 목회를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제 마음에는 안전이라는 단어가 머물러 있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지금 안전하다고 느껴지십니까? … 또 저희 교회는 어떤 것 같습니까? … 우리고백교회가 이제 일곱 살이 됐습니다만, 지난 6년 간 솔직히 전 한시도 온전한 안전을 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는 처음 드리는, 참 죄송하고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재정에 대한 염려도 늘 떨쳐내지 못해왔습니다. 과연 이번 달도 무사히 월세를 주고 잘 넘어갈 수 있을까, 목사 신수비 주시고 나면 교회 괜찮나, 정말 다음 달은 또 괜찮을까 … 저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진 올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매달 제 마음은 늘 불안했고,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안전하리라, 말씀하시니 잠시나마 정말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더 좋은 말씀이 생각나기 전에 본문을 내년 주제 말씀으로 급히 확정해버리고, 곧장 디자인 업체에 전화를 해서, 이 본문을 주제로 현수막 디자인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스로 더는 수정하지 못하게 아예 못을 박아버린 겁니다. 지금 걸려 있는 이 현수막이 실은 이미 그때부터 교회에 도착해 보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일단 주제 말씀을 정하고 나니 기도원에서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주제 말씀도 벌써 정해졌겠다, 이젠 기도원에서 푹 쉬다 가야겠다, 끼니마다 챙겨주는 맛있는 밥이나 따박따박 받아먹으면서, 잠이나 실컷 자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신 말씀을 계속 입으로 되뇌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이게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내년이 되면 다 안전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돌아보니까 정말 올 한 해가 딱히 안전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상황이 지금보다 더 좋아진다 해도 저는 또 걱정할 게 뻔했습니다. 지금 이 상태라면 내년에도 제 마음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겠다 싶었고, 그때부터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안전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안전’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거나 또는 그런 상태’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히브리어 사전으로 찾아보다가 알게 됐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전’은 그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안전’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사게브’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높다’(high)입니다. 그것도 적당히 높은 게 아니라, 아찔함을 느낄 정도의 그런 높음을 의미합니다. 참 역설적이지요? 여러분, 높은 데가 안전합니까, 낮은 데가 안전합니까? 고소공포증을 가진 분도 계시지만, 우리는 너무 높이 올라가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와 땅에 발이 닿을 때, 그때의 느낌이 바로 안전함이지요. 그런데 본래 이 ‘사게브’의 뜻은 ‘높다’입니다. 그래서 ‘사게브’에는 ‘존귀하다’, ‘영광스럽다’라는 두 번째 뜻이 있습니다. 그 가치와 상태가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다.”(시 148:13)에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도 사용되고, 또 “나를 건지시고 높이 드소서.”(시 59:1)처럼 사람이 존귀하다고 할 때에도 ‘사게브’가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 단어에 ‘안전하다’라는 의미가 추가됐는지 여러분 감이 오시는지요? 네, 그저 당연한 조건에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나 높은 곳에 있는데도 아무런 위협이나 문제가 없는 상태,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는 상태를 특별히 가리키기 위해, ‘안전하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와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안전은 본래부터 가만히 있고, 아래로 침잠하고, 또 걱정거리가 다 사라진 그런 상태의 안전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안전에서 스스로 멀어진 상태이지요. 안전을 박차고 나아가서, 더 높은 곳, 더 존귀하고 거룩한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보다 더 안전하지 않은 상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직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아 그 존귀한 목적과 뜻을 추구하고 이루어 낸 영광의 상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안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내년 한 해가 바로 이 ‘사게브’의 안전으로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면, 우리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며, 그래서 평안하고 안전할 거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을 품으면, 어쩌면 문제가 더 많아질지도 모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더 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가 의로움을 선택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미움 받는 일이 늘어날 것입니다. 분명 안전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해질 겁니다. 미움도 받지 않을 것이고, 갈등도 생기지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안전에 만족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의미 있는 일, 중요한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과는 무관하게, 겨우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고 있어서 생기는 그런 안전을 여러분은 바라십니까? 아마 그렇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가장 안전합니다. 배는 안전하려면 항구에 정박해 있으면 됩니다. 그때가 가장 안전하지요. 그러나 배가 항구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건 아무 쓸모가 없는 배입니다. 배의 목적은 안전이 아니라 항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안전하고자 했다면 엄마 뱃속에서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안전하려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더는 안전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런 안전에 머물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거라면, 우리의 삶은 이제 더 이상의 목적도 이유도 없어집니다.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와 그 의가 우리 삶의 목표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안전, 더 높은 안전, 하나님의 편에 섰을 때 누리는 그 존귀한 안전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그저 항구에 정박한 채 녹슬어가는 배가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풍랑이 일고 위험이 있겠지만, 그 배 안에 주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더 먼 바다를 향해 믿음의 항해를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의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저는 우리고백교회도 이미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고백교회는 안전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의 모든 걱정과 염려가 오롯이 불신이었음을 알겠고, 더 안전한 상태를 목적으로 한 저의 모든 선택이 불순종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여러분, 안전을 향해서가 아니라, 존귀함을 향해서 나아가십시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다, 그리고 안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시는 하나님을 누리는 우리고백교회가 되십시다. 분명 저와 여러분의 삶은 새해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 그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아닙니다. 저희가 이렇게 예배를 드려도 내년에도 두려운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지요? 당연히 내년에 우리의 건강은 조금 더 약해질 것입니다. 올해처럼 내년에도 아플 것이며, 올해처럼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생길 것입니다. 여전히 제 차는 중간에 멈춰 서겠지요. 올해처럼 넉넉하지 않은 재정으로 우리의 삶은 원치 않는 절약을 해야 할 것이며, 직장의 스트레스도 여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것들이 우리를 결코 두렵게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존귀한 일을 선택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그 존귀한 안전으로 보호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전이 목적이 되는 삶은 우리 그만 내려놓으십시다. 안전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존귀함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내 삶이 안전하지 않다고 여겨서 늘 안전이 우상이었던, 저 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이 말씀으로 그 우상을 깨뜨려버립시다. 그리고 안전해지면, 평안해지면, 넉넉해지면 그때 해야지, 했던 그 존귀한 일들을 지금 꿈꾸고 지금 시작하십시다.  이미 어느 정도 안전해지셨고, 그 안전에 혹시 취해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도전합니다. 그만 그 거짓 안전에서 깨어나십시오. 안전하지 않았을 때 찾고 구하던 그 하나님나라와 의를 다시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지금의 안전보다 훨씬 더 존귀한 자리로 부르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2020년에도 안전하리라, 이 말씀을 믿고, 주셨던 그 말씀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다시 25절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시는 말씀처럼, 사람 두려워하는 걸 그만 두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우리는 그걸 의지하게 되지요,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사람을 의지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람을 의지해서는 결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고, 그래서는 안전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낚기 위해 사용하는 낚시 바늘이 두려움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더 의지하는 한, 우리는 사탄이 쳐놓은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을 작정하는 것, 곧 다스리고 결정하는 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신 26절 말씀을 온전히 의지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면 반드시 올무에 걸립니다. …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잠시 내려갔을 때, 그의 마음이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 일의 작정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사라지자 곧장 올무에 걸립니다. 아내 사라가 너무 아름다운 외모여서 애굽 사람들이 그녀를 취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네,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 일의 마지막이 어떻게 됐습니까?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걸 모르고 접근했던 바로와 그 집에 하나님의 큰 재앙이 임합니다. 세상의 복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결국 그는 복이 아니라 화요 재앙이 됐던 겁니다. 여러분, 결국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이 뭐라고 사람을 의지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본문의 주권자, 곧 권력을 가진 통치자를 두려워하지만, 여러분 솔직히 그 통치자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인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그토록 강조하시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또한 그저 먼지일 뿐이며,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인생이니,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고백교회도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온전히 안전함을 믿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힘이나 재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여러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롯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십시다.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실 내년 2020년이 저의 안식년입니다. 한 교회에서 6년을 사역한 목사의 경우 보통 7년째 되는 해를 안식년으로 삼아 쉼과 재충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실제로 얼마나 쉴 자격이 있는 목사인지, 또 교회의 상황과 형편이 얼마나 목사의 안식년을 허락할 수 있을지, 저 자신도 솔직히 분명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뭐 저만 고생한 것도 아니고, 저만 쉼이 필요한 것도 아님을 잘 압니다. 그래서 지난 목양 리트릿부터 지금까지 내내 고민하며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안식년을 보내야 할지, 과연 교회에 폐가 되지 않는 길이 무엇일지 등등 생각이 참 많습니다. … 물론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가져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들도 많습니다. 성도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해 공부도 필요하고, 정말 말 그대로 지친 몸과 마음의 회복도 필요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다음 또 한 텀(term)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식년을 가져야 하는 목적의 전부일까, 하는 고민이 제게 늘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한덕수 목사님 가정과 가까운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나눴습니다. 지난 전도 집회를 도와주신 감사 인사 차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어쩌다 저의 안식년 문제가 화제가 되어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성 사모님께서 그런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년은 그저 쉼의 문제만이 아니다. 안식일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 단지 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오롯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인 것처럼, 목사의 안식년 역시 교회의 주인이자 머리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여러분 이해가 되시는지요? 여러분, 제가 내년에 일정 기간 목회와 설교를 쉬고, 또 교회를 잠시 떠나 있는다고 하면, 우리고백교회가 괜찮겠습니까? … 만약 괜찮지 않다면 그건 정말 문제가 있는 거겠지요? 네,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의 능력에 기초한 교회, 그런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진단하고 회복해 가는 과정이 안식년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들은 거의 대부분 담임목사 한 ‘사람’의 목회적 능력에 너무 크게 의존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많은 문제들이 실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요. 목사가 교회를 개척한 경우엔 그 문제가 더욱 크고 깊게 교회를 병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2020년 새해는 저희 교회에 너무나도 중요한 해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어엿한 지역교회로서의 면모를 잘 갖춰갈 수 있느냐, 그래서 과연 완전한 자립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느냐가 결정될 것입니다. 마치 성장판이 열린 어린아이처럼, 건강한 성장을 지속하는 그런 교회로 세워져 갈 것이냐, 아니면 그저 가족 같은 분위기의 작은 모임으로 되돌아가 겨우 버티고, 겨우 지탱하는 상태로 머물 것이냐, 그 갈림길이 바로 내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주제의 말씀이 더욱 큰 도전과 의미로 다가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안전할 것이다, 그러니 바르고 건강한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합니다. 목사든 누구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합니다. 안전을 위해, 평안을 위해 현재에 매여 있는 교회가 아니라, 안전하리라, 하시는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나라와 의를 향해 도전하고 꿈꾸는 그런 교회가 되라고, 그런 성도와 목사가 되라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의 삶의 문제, 신앙의 문제로 귀결될 것입니다. … 아마 여러분은 지난 전도 집회를 치르면서 느낀 바가 많으셨을 겁니다. 교회의 사역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신앙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셨지요? 마찬가지로 교회의 건강함은 저와 여러분의 연약한 삶에 큰 도전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살아가고, 그 안전을 소비하는 삶에 익숙합니다. 조금만 더 평안해지면, 조금만 더 안정적이 되면, 그러면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 안전을 소비하는 데 급급한 삶이 됩니다. 하나님나라를 살아내지 못하고, 영생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 있지요. 우리의 신앙이 그저 싸구려 보험 하나 정도 역할밖에 안 된다면 우리는 결코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보험 가지고 계시지요? … 미래에 대한 보장과 보험을 현대인처럼 잘 갖추고 산 인류가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현대인은 역사상 가장 불안하고 걱정 많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한다고 말씀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내일의 비밀을 내일에 맡겨둘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금 내 소관 아래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것도 예견하거나 보장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예수님에겐 쉬운 일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분도 우리와 똑같이 혈과 육에 갇혀 오직 지금만 사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주님은 안전을 누리실 수 있었을까요? … 네, 주님은 또 다른 안전을 누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온전한 샬롬(화해), 그 관계 속에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계신 하나님과 항상 샬롬의 관계를 누리고 계셨기에, 주님은 안전이라는 우상에서 자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험이 필요 없고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통해 일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 사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친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먼저 이 하나님을 누리면 반드시 안전할 것입니다. 그냥 걱정거리 없는 평안이 아니라, 존귀하고 높은 부르심의 그 평안, 그래서 세상의 걱정거리들을 넉넉히 다스리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일과 함께, 2020년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로 오고 계십니다. 우리, 내년에도 그분의 나라를 꼭 살아내십시다. 안전에 매여 사람을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안전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 더 존귀하고 거룩한 삶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