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2019년 12월 1일 주일 설교

2019-12-0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1201 대강절 첫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9:42~50,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40) 본문 50절의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또 축복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능력 있는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피아노’의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봤습니다. 특별히 ‘우리’라고 규정 지어진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비록 그들이 적극적으로 우리 편에 서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주님 말씀을 신뢰함으로, 우리가 먼저 열린 우리의 삶으로, 태도로,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로서의 실력이 더 온전해야 함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포용은 약자의 논리가 아니라, 강자의 논리입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와 분별력이 뒷받침 될 때에만 우리는 배타적인 태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정말 타협하지 말아야 할 진리와 본질을 지켜낼 수도 있습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는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에게 성도의 실력이 정말 탄탄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지난주와는 다소 상반된 내용입니다. 그러한 열린 공동체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비둘기의 순수함을 지켜낼 것인가, 한 개인으로서, 또 교회 공동체로서 어떻게 타협 없이 진리를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당연히 분위기도 지난주와는 사뭇 다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어조와 감정이 어떤 것 같습니까? 네,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 아니지요? 매우 강하고 매서운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주님의 감정은 격해져 있고, 표현은 의도적인 과장이 포함되어 심각하기 그지없습니다. 주님의 메시지가 포르테, 아니 포르티시모로 강하게 강조되어, 말씀의 절정으로 치닫는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본문은 오늘 우리의 이 리트릿 분위기와는 잘 맞지 않는 그런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아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 느낌이었을 겁니다. 갑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주님의 말씀에 적잖이 당황했겠고, 또 정신이 번쩍 들었겠다,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지금 이 주님의 호흡에 잘 맞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한 번 쯤 들어봤을 말씀, 그러나 그 의미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42절인데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아멘) 아마 이 말씀을 오늘 여기서 처음 들어보신 분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매우 무서운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하셨다고는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말씀입니다. 물론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잘 잊어버려서 그렇지, 주님은 이런 유의 말씀을 자주 하시긴 했습니다. 저부터가 예수님을 알 되 너무 ‘피아노’의 예수님만 아는 게 문제입니다. 주님은 중요한 순간에는 정말 ‘포르티시시모’(fff)의 말씀도 자주 하시지요. 오늘 본문처럼요. 예수를 믿는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그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게 더 낫다니, 참 그 이보다 더 심각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연자맷돌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이 곡식을 빻고 할 때 쓰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소나 나귀 같은 짐승이 돌리는 엄청난 크기의 맷돌을 가리킵니다. 보통 지름이 1m가 훨씬 넘고, 무게도 1톤이 넘습니다. 그러니 황소 한 마리 무게를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영 그 심연에 가라앉아 있겠지요. 성경 속 ‘바다’라는 표현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사망과 음부를 뜻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저주의 말씀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씀의 대상이 정확히 누구입니까? 네,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한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정도의 내용을 잘 이해해야만 이것이 정확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게 되는데요, 우선 ‘이 작은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 네,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지요. 바로 전 단락(33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이런 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작은 자들’이란 그런 어린아이와 같이 너무나 연약하여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작은 자’를 수식하는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주님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단지 나이나 힘이 약한 어린아이 같은 작은 자나 일반적인 사회적 약자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는 작은 자’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적으로 작은 자입니다. 더구나 ‘이 작은 자들’(these little ones)이라고 말씀하셔서, 이것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주님이 안아주신 그 아이는 당연히 단수였겠지요. 그러니까 이 ‘작은 자들’이 단순히 어린아이들을 가리킬 가능성은 무척 적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믿는 작은 자들, 곧 지금의 연약한 제자들을 포함한 여러 믿음이 약한 자들을 의미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실족하게 하면’이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본문의 이 표현을 주로 어떤 때 사용하십니까? ‘실족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네, 누군가로 인해, 어떤 일로 인해, 서운함을 느끼거나 마음이 상해서 관계가 틀어졌을 때, 우리는 이 ‘실족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 마디로 ‘시험 들었다’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이 구절 자체를 전체적으로 이렇게 이해하지요.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다른 어떤 사람이 시험을 당하여 교회를 떠나거나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일을 주님께서 극히 싫어하시며, 따라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어떤 그런 취지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혀 틀린 이해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건 지나치게 우리의 상황에 본문을 끼워 맞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족하다’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서는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족(失足)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네, ‘발을 헛디디다,’ ‘넘어지다,’의 뜻입니다. 본문의 헬라어 단어 ‘스칸달리조’라는 동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걸려 넘어뜨리다’라는 기본 뜻에서 시작됩니다. ‘올가미’, ‘덫’, ‘함정’의 뜻인 ‘스칸달론’이 그 어원이고, 오늘날 ‘스캔들’이라는 말로 잘 사용하지요. 유명한 사람을 한 번에 넘어지게 만드는 그런 추문, 사건을 말합니다. 그래서 은유적으로는 그릇된 행동, 잘못된 행동을 하다, 이런 뜻이 뒤따라 나오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어떤 감정적인 서운함이나 섭섭해 하는 느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사회 관습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뭔가 잘못된 일을 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넘어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퀴즈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43절, 45절, 47절에도 역시 ‘스칸달리조’라는 동사가 사용이 됐는데요, 우리말로는 어떤 단어가 바로 이 ‘스칸달리조’일까요? … 네, 세 절에 모두 등장하는 ‘범죄 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스칸달리조’입니다. 아래 주석에도 ‘실족하게’라고 되어 있지요. 바로 이 ‘실족’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42절과 나머지 다른 구절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42절로 돌아와서,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이라는 이 구절의 의미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떤 오해나 감정적인 서운함으로 인해 교회 안 나오고 뭐 이런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큰 죄로 인해서 믿음이 약한 성도가 시험에 빠진다면 그건 좀 다른 이야기이겠습니다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관계를 우려하여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만드는 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도록 만드는 그와 같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경우를 살펴봅시다. 여러분, 언제 주님이 이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 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붙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 된다고 항변한 장면에서 이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바로 여기, ‘나를 넘어지게 하다’라는 동사가 오늘 이 ‘실족하게 하다’, ‘스칸달리조’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부르심의 길을 거부하도록 부추기는 것, 또 죄의 유혹에 넘어가도록, 그렇게 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넘어지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잘못 사랑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베드로는 결단코 주님을 죄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그 말을 한 게 아닙니다. 그렇지요? 오직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어야 한다는데 제자가 돼서,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님. 얼른 그 길을 가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의상으로라도 아마 우리도 다 같은 반응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사탄’을 언급하며 그것을 엄히 꾸짖으셨고, 또 오늘 이 본문에서도 같은 취지로 다시 한 번 경고하십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이 땅의 작은 자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이 걸어가야 할 바른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이어지는 내용이 강조하는 것처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범죄 하게 하는 일은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로 넘어지게 만든다면, 그는 영원히 바다 속에 머물러 있는 게 나을 것이다,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귀담아 들읍시다. 그리고 서로를 바르게 사랑합시다. 설사 믿음이 약한 ‘작은 자’라 할지라도, 주님은 그에게도 마땅히 싸워야 할 믿음의 싸움이 있고, 그가 짊어져야 할 거룩함의 무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저 그 작은 자들을 위한다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성도의 거룩한 부르심마저 외면하고 무시하게 만드는 일을 행하면 결코 안 됩니다.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으며, 또한 누구나가 그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다른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2~39) 아멘. 여러분, 왜 주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합니까? … 어떤 퀴즈 프로그램에서, 남편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하냐고, 한 할머니에게 질문을 했더니,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웬수!”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런 말은 아니지요? 왜 주님은 그 가족이 불화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 가족이, 나를 사랑하는 그 가족이, 우리로 하여금 내게 주어진 십자가, 내게 주어진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걸림돌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목회의 길의 마지막 스켄달론은 제가 제일 사랑했던 저희 부모님이셨습니다. 사랑하지만, 온전히, 바르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그 가장 가까운 관계가 우리의 영혼과 생명을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하는, 너무나 매정하게 들리는 말씀을 서슴지 않으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때론 지체 된 성도들이, 또 목사가 여러분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그거 힘든데 하지 말라고, 적당히 해도 된다고, 남들 다 그렇게 산다고,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서로를 실족하게 합니다. 목사인 저도 성도들을 인간적으로 안쓰럽게 여겨, 정말 해야 할 말을 잘 못하는 일이 생기곤 합니다. 주님처럼 매정한 말 잘 못합니다. 며칠 밤을 잠도 잘 못자면서 근심하고 혼자 고민하다가, 그냥 넘어가곤 합니다. 때가 되면 깨닫겠지, 돌이키겠지, 더 힘들게 하면 시험 들겠지, 그러고 맙니다. 온유해서가 아닙니다. 귀찮고 힘들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잘못하면 목사가 원수입니다. 저만 입 닫고 있으면 여러분은 안심할 거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이 우리를 친히 지켜주셔서, 우리로 서로를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조금 이야기를 바꿔서, 여러분, 그럼 나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실족하는 일, 범죄 하는 일들이 있을 때, 주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는지, 다시 본문을 보십시다. 43절, 45절, 47절, 다 한결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로 죄를 범하게 하는 신체의 한 부분이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찍어버리고 빼어버려서라도, 그 죄로부터 돌이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죄의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모든 육체와 삶의 근원을 도려내고, 끊어내서라도 그 죄를 이기라고 하십니다. 그 죄 때문에 우리의 온 몸이 다 꺼지지 않는 불, 곧 지옥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차라리 몸의 일부를 끊어내고서라도 전체의 몸은 생명에, 영생에 들어가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실제로 이렇게 하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랬다가는 우리의 육체가 남아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무게를 함부로 퇴색시키면 안 됩니다. 정말 마치 그 신체가 내게 더는 없는 것처럼, 그래서 더는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것처럼, 이미 그 육체의 정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어 소멸되었음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그 싸움이,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 작은 자들이 치러야 하는 가장 중요한 영적 싸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으로는 회개하지만, 여전히 죄의 달콤한 유혹과 그 죄가 주는 치명적인 기쁨을 포기하지 못하여, 형식적인 회개에 머무르는 일이 성도들 가운데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을 돌아본 것처럼, 우리는 자꾸만 죄를 돌아봅니다. … 저주를 받지 않고 죄를 지을 수만 있다면, 그 죄를 짓고 싶어 안달합니다.” … 슬프지만 너무나 무섭고 심각한 영적 질병이 우리 모두 가운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더 강한 표현이 불가능한, 그런 수위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렇게나 심각한데 정작 우리는 너무나 태평하지 않습니까? 정말 이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죄를 대하고 계십니까? 이 문제를 정말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가십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옥이니 불이니 하는 말씀이나 몸 어디를 자르라는 이런 주님의 말씀이 너무 과장되고 유치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이런 말이 정말 심각하게 다가오십니까? 49절은 또 어떻습니까?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 무슨 뜻입니까? 소금에 절이듯 죄인이 불에 절여질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새번역, 공동번역). 지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몸의 건강, 내 몸의 온전함을 끔찍이 생각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지금 그걸 포기하고서라도 우리 영혼이 돌이켜 회개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나마 여기 언급된 신체는 다 두 개씩 짝으로 있는 것들이지요. 손과 발, 눈 모두 그렇습니다.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없어도 괜찮지 않느냐고, 정말 그런 마음가짐으로 죄와 싸워야 함을, 그래야만 이길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겁니다. 어차피 받은 구원, 늴리리야 니나노, 그러고 살다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삶이 탐심과 음란, 정욕과 교만과 자랑으로 부패해가는 것들을 방치한 채, 그저 스스로를 여전히 어린아이려니 생각하고, 다 괜찮다고 그렇게 자위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또 같은 마음으로, 주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의 잘못된 모습이나 실족한 모습 역시도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하고, 모른 척 하거나, 오히려 그것들을 잘 하고 있는 일인 양 부추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주중에 묵상했던 요한계시록 말씀 속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내가 너를 토해내 버리고 싶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함께 경성하십시다. 물론 내 손 자르듯 남의 손 자를 수는 없습니다. 남의 실족에 대하여는 훨씬 더 조심스럽고 온유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에 보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5:1)고 했습니다. 무슨 난 의인인 것처럼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를 사랑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온유하게 권면하라고 말씀합니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 방법이 온유해야 한다는 것이지, 죄에 대해서 온유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끝까지 온유함으로 대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가르치기를, 범죄 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딤전 5:20). 무서운 말씀입니다. 당연히 한 번 실수한 걸 가지고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이에 대하여 명확한 기준을 말씀해주시지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제일 먼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나 혼자 가서 조용히 그 사람에게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함께 데리고 가서 다시 한 번 권면해야 합니다. 재차 권면하면서, 이 문제에 대하여 그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증인을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요? 네, 그때는 교회에 말합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가 다시 한 번 최종적으로 권면하게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교회에서 내쫓으라는 것입니다(고전 5:13). 소위 출교라고 해서 교적에서 삭제하여 내어 쫓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교회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죄에 맞서 함께 싸우는 공동체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교회는 아주 쿨하고 젠틀한 무슨 사교집단이 아닙니다. 그저 나만 잘 하면 되고, 나만 예수 잘 믿으면 되는 그런 입시 학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함께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어가는(갈 6:2) 거룩한 싸움터, 영적 전쟁터입니다. 악의 영들이 수없이 시험하고,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냉엄한 영적 사파리입니다. 교회가 무슨 동아리 모임인 양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소풍 온 게 아닙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한 죄의 방해와 반격이 강해질 것이며, 주의 일에 힘쓰면 힘쓸수록 더 시험은 크고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가진 사랑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에베소 교회가 책망 받습니다만, 그것은 그들이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인내하고 싸우다보니 놓쳐버린 사랑, 서로를 용납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마지막에 권면하시기를,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화목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면서도 서로 사랑하며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금을 앞에 두고 화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화목이 초점이 아닙니다. 소금이 있는 화목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맛을 내는 소금, 부패하지 않는 거룩한 삶을 위한 소금,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 되기 위해 제물에 더해지는 바로 그 소금을 앞에 두고, 성도는 서로가 화목하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화목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아무 고민도, 권면도 없이, 지체가 죄를 범하든 말든, 신앙이 무너지든 말든,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지내는 그런 모습이면 안 됩니다. 과연 정말 소금처럼 맛을 내고 살고 있는지, 소금처럼 녹아지며 남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주의 진리의 말씀을 앞에 두고 우리는 화목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누가 더 잘났느냐, 그런 시시하고 무의미한 논쟁은 그만 두고, 정말 해야 할 고민과 싸움을 함께 하며, 그럼에도 온전한 화목을 이루어가라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권면 드립니다. 먼저는 여러분 스스로 반복되는 죄의 실족을 멈추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죄와 싸우십시오. 성인(聖人, saint)이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매일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하지 않지만, 그 완전하지 않음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회개와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며, 내가 지금 앓고 있는 영적 질병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고, 치유를 간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십시오. 아울러 여러분으로 인하여 다른 누군가가 실족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죄의 미혹에 빠지거나 믿음의 길에서 어그러지지 않도록, 깊이 조심하십시오. 예수를 오래 믿고, 또 직분을 받으신 분들, 또 앞으로 직분을 받게 될 성도들은, 더욱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겨,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삼가십시오. 믿음의 연륜이 있는 성도라면,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말로 독려하여 함께 할 수 있도록 섬겨주십시오. 나만 잘 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저도 여기 와서 기도하면서 목사로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위험한 자리에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고, 고민도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구르는 돌에 이끼 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고민이 멈추지 않는 한, 소망도 멈추지 않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9년을 마무리하는 이번 12월, 부디 존귀한 일을 생각하는 존귀한 자로서 올 해의 죄를 내년으로 끌고 가지 마십시오.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 우리의 모든 죄들도 함께 잘라내어 버리고, 부디 거룩한 맛을 간직한 소금의 삶을 회복합시다. 미지근한 라오디아게 교회처럼, 주님이 토해버리고 싶은 그런 교회가 아니라, 진리 앞에 차갑고, 사명 앞에 뜨거운, 온전한 교회의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가 함께 자라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