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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51.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1)
2019-11-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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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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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2:16~31,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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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언약서의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형사와 민사적인 문제를 다뤘고, 오늘 본문에는 다시 종교적인 부분들, 또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관련된 여러 생활 규례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재밌는 서사가 일단락되고 계속해서 딱딱한 규례들만 나오고 있어서, 혹 읽으면서 지루하다 하는 생각도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내용도 여러 가지가 연이어 나오고, 또 무엇보다 오늘날의 상황이나 형편과는 잘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어서 조금은 읽기 어려울 수도 있는 규례이기도 합니다만, 우리의 초점은 분명합니다.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고 싫어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어떤 삶이 행복하고 좋은 삶인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처세에 대해 말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하여 밝히는 책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 안에 있으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과 같은, 오래 전의 규례들도 우리에게는 다른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비록 구체적인 상황 하나하나가 다 오늘 우리의 삶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이, 하나님의 계획이 어떠한지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읽기 조금 힘이 들긴 하지만 이제 계속해서 묵상하게 되는 이 규례들을 통해서, 부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고 닮아가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성품과 뜻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먼저 16, 17절부터 차례로 살펴보면, 여기에는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그러니까 결혼 상대자가 없는 여성을 꾀어 동침한 경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뭐, 남녀 간의 사랑 문제를 여기서 다루는가, 싶기도 하겠습니다만, 이 문제는 그런 게 아니라, 결혼을 도구로 하여 혹은 힘으로 남성이 여성을 농락한 경우를 말합니다. 16절에 ‘처녀를 꾀어’의 ‘꾀어’라는 동사 ‘파타’가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는 남자가 어떻게 여인을 꾀었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오빠, 믿지?”라는 말로 한다고들 하는데, 당시에는 이와 비슷하게, 혼인을 전제로 관계를 유도한 것이지요.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천 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혼인빙자 간음죄’라는 게 있었는데요, 본문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에 대해 처벌하는 죄’로 형법 304조에 규정되어 있던 법입니다. 그러나 2009년에 이르러 이것이 위헌판결을 받아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지요. 이 법이 남성만을 처벌 대상으로 하여 남녀평등에 반할 뿐 아니라,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여성의 성적(性的) 자기결정권을 부인하고 있어,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역행하는 법률’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이 당시에는 극심한 남녀의 차별이 현실 속에 실재할 때이고, 그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여겨, 여성이 지금과 같은 지위나 법적 보호를 기대할 수 없었던 때입니다. 사실 성경의 수천 년 전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지요. 저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여성의 지위, 또 혼인은 철저하게 그 집안과 가장의 결정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남자가 결혼을 조건으로 여인을 꾀어 동침했다면, 그리고 그 이후 약속을 저버리고 배신했다면, 능욕을 당한 여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다시 적법한 결혼을 하는 것도 매우 힘들어져서, 젊은 나이에 이미 한 여인의 삶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경우, 남자로 하여금 납폐금, 곧 지참금을 주고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것을 명령합니다. 본래 우리나라에서는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함을 보내는 일을 ‘납폐’라고 했습니다. 신부를 맞이하는 선물이나 재물을 일컫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도 ‘납폐’(‘모하르, bride-price)는 신랑이 결혼식에 앞서 아내 될 처녀를 데려가기 위해 신부 측에 지급하는 돈입니다. 신부 가정이 잃게 되는 노동력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차원이자, 훗날 이 여성이 홀로 남게 됐을 때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해주는 예비 자금, 보험의 차원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이 돈을 혼인하는 딸에게 선물로 주거나, 잘 보관하였다가 자신이 죽기 전에 혹은 딸이 혼자가 됐을 때, 이것을 딸에게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제 이 남성은 그 여인을 정식 절차대로, 예를 갖추어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약혼을 하지 않은 여인이니 망정이지 약혼을 했다면 이땐 간음이 되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물론 여자 쪽 가족이 이 남자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땐 납폐금만을 받고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도 선택권은 여자 쪽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규례가 주장하는 바는, 단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없다, 이런 게 아니라, 당시로서는 결코 대등한 지위를 가질 수 없었던 여성의 결혼과 삶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반대로 남성에게는 성과 혼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메시지가 의미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울러 이 규례는, 우리에게 주신 성(性)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쾌락의 도구로서, 우리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결혼과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거룩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함을 이 규례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는 일면 고루하게 보인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분명 단정하고 정결된 삶으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이 꼭 그러하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18절부터 20절까지는, 갑자기 다시 사형에 해당하는 세 가지의 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18절은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19절은 짐승과 행음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고, 20절은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멸하라고 말씀합니다. 어찌 보면 다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은 크게 보면,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네, 20절 말씀이 분명히 드러내듯, 이것은 ‘우상숭배’의 문제입니다.
무당도 그렇지만 짐승과의 관계도 모두 당시 가나안의 이방 신들에게 제사할 때의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가나안의 대표적 우상인 ‘바알’ 신을 아시지요? 농사의 신이자, 가축을 주관하는 풍요와 다산(多産)의 신입니다. 이런 바알을 숭배할 땐, 무당들과는 물론이고 짐승과도 관계를 맺는 일이 빈번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이 본문은 그러한 우상숭배와 그로 인한 성적 타락을 엄히 금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영적 간음은 결국 육체적 간음과 직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은 단지 종교 하나를 추가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타락과 직결된 문제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다름 아닌 인간의 탐욕과 성적 문란함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저희가 이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상을 숭배할 일이야 없겠지만, 여전히 우리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쥐락펴락 하고 싶어 하는 무당이 자리 잡고 있고, 쉬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탐심과 음란을 틈타, 하루에도 몇 번씩 난잡한 굿판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 힘껏 대적하여 싸워야 합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땅에 있는 지체,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죽여야 합니다.”(골 3:5)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고, 우리는 결코 다시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음을, 이제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날마다 강한 믿음의 확신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혹과 미혹이 많은 이 시대 속에서도 그 싸움을 멈추지 마시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령을 의지함으로, 부디 그 믿음의 싸움에서 꼭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모습과는 달리,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떻게 귀결되는가, 그 내용이, 이어지는 21절부터 27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와 돌봄의 문제를 다루는 이 규례 속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고 있고, 또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그대로 닮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등장하는 약자는 다름 아닌 이방 나그네입니다. 21절을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자주 읽어 본 말씀이지요.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굽의 나그네였고, 그들이 경험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나그네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이방의 나그네를 혐오하거나 압제하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한다고 말할 때 사용된 동사(3:9)를 21절에, ‘압제하다’(라하스)라고 그대로 사용하면서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방식대로, 우리도 이웃과 타인을 향해 행할 것을 성경이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앞서 이방 신을 섬기는 문제와 지금 여기의 이방 사람들을 돌보는 문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땅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의 삶은 오히려 철저하게 보호의 대상입니다. 그들을 혐오나 차별로 대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의 노동력을 함부로 갈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험한 방식이 ‘나그네의 돌봄’과 ‘종의 구원’이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의 삶 역시 이방인의 구원, 자유 등과 무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신 대로, 타인과 이웃에게 행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22절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내용으로,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 말씀하면서, 23절에는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나옵니다. 정말 강하고 무서운 표현이지요.
표현도 강하지만, 여기서는 주님이 직접 심판의 주체가 되십니다. 앞서 우상숭배의 문제에서는 사람이 그들을 처벌하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반해서,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형의 집행자로 등장하십니다. 그 내용도 너무나 무서운 말씀이지요. 그냥 너를 죽이겠다, 뭐 이런 말씀이 아니라,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말씀함으로써, 하나님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이 과부와 고아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경 곳곳에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성경에 적어도 400회 이상 언급된다고 하는데요, 시편에 보면(68:5), 하나님은 특히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고아와 과부의 편에 서 계시며, 하나님의 정의는 항상 과부와 고아에 대한 자비로 기울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의 신앙도 이 문제를 비켜갈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인데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7)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결국 고아와 과부를 향한 우리의 마음과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왜요?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것, 또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목적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곧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성화는 결국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신앙적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이 우리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묻어나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형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닮아감으로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 역시 고아의 형제자매요, 과부의 변호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하고 또 우리고백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참 된 경건에 이르게 되기를 원합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는, 경제적 약자, 곧 가난한 채무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를 다룹니다. 이 말씀도 시작부터 강력한 것이, 25절에 보면, 돈을 꾸어 줄 때, 채권자 같이 하지 말고, 이자를 받지 말라 하십니다. 빌려주기 싫으면 차라리 빌려주지를 말 것이지, 빌려주기로 했다면 이자도 받지 말고, 빚쟁이처럼 재촉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다 그렇게 호의를 베풀고 살라는 게 아니지요. 스스로 일하기 싫어하는 자나 ‘도덕적 해이’가 일상이 된 탐욕스러운 자본가에게 그렇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가난한 자’에게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누군가 가난한 이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이자도 안 받고, 재촉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려운 사람은 그래도 살아갈 힘과 미래의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에서나 이루어질 일입니다. 돈이 궁해본 사람은 다 알지요. 이것이 얼마나 일어나기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가, 잘 알 것입니다.
본래 ‘이자’라고 옮겨진 히브리어 명사 ‘네셰크’는 뱀이 먹잇감을 ‘물다’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그 삶의 일부를 물어서 떼어낸 일부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가난한 이들에게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이자입니다. 저도 살면서 몇 번 그런 빚 독촉, 이자 독촉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만, ‘피가 마른다’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경험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니 비록 빌려주지는 못할망정 가난한 이들을 더욱 어렵게 하는 그런 일에는 아예 참여하지도 또 방관하지도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율법을 조금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고 하십니다. 구하는 자,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하셔서, 이제는 아예 뒷문을 닫아버리십니다. 빌려주기 싫어도 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인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께 탕감 받은 빚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의 어려운 요구를 외면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참 어려운 말씀이지만, 부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을 의무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남에게 빌리는 삶이 아니라 꾸어주고 더 나아가 이자 없이 빌려주는 삶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넉넉하고 부요한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지는 26, 27절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돈을 빌려줄 때 받게 되는 일종의 담보물에 관해 이야기하는데요, 26절의 ‘(이웃의) 옷’은 ‘겉옷’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같은 기후에서 ‘겉옷’은 단지 외투의 역할만이 아니라, 밤에 덮고 자는 이불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가난해서 돈을 빌릴 때 담보물로 겉옷밖에 내놓을 수 없는 경우라면, 그때는 그 옷을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보내서, 그가 그걸 덥고 잘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에서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지요.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을 것이다.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말씀합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말씀인데요, 여러분 우리 모두 그리 사십시다. [시간 관계 상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 주에 계속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이러한 말씀들을 마무리하면서 본문 31절은,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결론 맺습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너희는 …, 사람의 기준이나 생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속한 성품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그 거룩함의 내용들을 우리가 오늘 일부 살펴봤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삶에 있어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어떤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결혼과 성의 문제, 나그네와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문제, 또 먹는 문제까지, 삶의 전반이 다 ‘거룩한 사람’의 거룩한 삶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 중 몇 가지 중요한 단어를 꼽아 본다면, 거기에는 정결함과 성적 책임, 그리고 자비와 공의, 또 말을 삼가는 것, 그리고 구별된 감사와 절제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알면 알수록 더 힘들고 또 더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진리가 주는 자유와 믿음의 만족 또한 더욱 깊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더욱 명확해지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남에게 말하는 게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흉내 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함을 주일에도 말씀드렸는데요, 부디 오늘 이 말씀들 또한,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삶을 통해 온전히 고백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이 온전히 드러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