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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49. 은 삼십 세겔
2019-11-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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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1113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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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12~36, 은 삼십 세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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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과 함께 주신 이른바 언약서의 내용이 계속 이어집니다. ‘올바른 예배’로부터 시작해서, 지난 시간에는 ‘종에 관한 법규’를 다뤘고, 오늘 본문은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해와 범죄들을 다룹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 정도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요, 먼저 12절부터 17절까지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폭력적 범죄들에 대한 내용이고, 18절에서 27절까지는 배상이 요구되는 개인의 신체적 상해에 관한 규례입니다. 마지막으로 28절부터 36절까지는, 가축과 관련된 여러 배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이 적지 않지만, 간단하게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반드시 사형으로 처벌해야 하는 죄를 다루는 12절부터 17절까지를 보면, 크게 네 가지의 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 곧 사람을 때려서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고의성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데요, 기본적으로 사람을 때려서 죽일 정도라면 당연히 의도성이 있다고 봐야겠지요. 물론 어떤 상해의 의도 없이 가볍게 상대를 쳤는데도 사람이 죽는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보면, 이러한 우연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요, 그 표현이 조금은 특별합니다.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이라고 되어 있어서, 그저 우연한 사건으로만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개입된 사건으로 표현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됩니다. 생명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자, 인간 사이에서 더는 원한과 보복의 악순환이 일어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이 의도 없이 사람을 죽이게 되면, 그때는 어디로 도망가야 합니까? 네, 피의 보복자 ‘고엘’을 피하여 일단 도피성으로 가서 거기서 재판을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재판에서 고의성이 드러나면 어떤 경우에도 사형을 면할 수 없습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제단에서라도 그를 잡아내려 죽이라고 되어 있을 만큼, 처벌에는 예외가 없고, 또 어떤 다른 배상이나 다른 방식의 처벌도 불가능합니다.
아울러 만약 재판을 통해 고의적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을 경우에도, 곧장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고의성은 없었다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을 해한 만큼, 그는 도피성의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는, 그래서 그의 생명으로 속량하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에 관한 한 오늘 이 시대보다 훨씬 더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의성을 가려내는 것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고의성 여부를 따져 과실치사냐 아니면 의도적 살인이냐를 가리는 게 쉽지 않고, 그래서 ‘미필적 고의’라는 말도 있는 것이지요. 확정적으로 고의는 아니고, 또 명확히 살해의 의도는 없었지만, 충분히 사람이 죽을 수 있음을 인식한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있었다면, 이것은 미필적 고의로서 단순히 폭행이나 강도가 아닌,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부분을 가려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니, 아마 당시에도 상당한 고충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동기를 들여다보는 일이니 말입니다.
사형에 처할 다른 또 다른 범죄는, 자신의 부모를 때리는 자입니다(15절). 아울러 부모를 저주하는 자 역시 죽이라고 율법은 말씀합니다(17절). 오늘의 관점에서는 매우 낯설고 특별한 법으로, 사형과 관련된 죄의 절반이 부모와 연관이 있는 셈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우리는 새삼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 어떤 사회학적, 인류학적 여러 해석들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신구약 성경 모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임을 기억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부모를 공경하고, 또 순종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마지막 한 가지는 사람을 납치하여 팔거나 종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지금의 표현으로 하면 인신매매입니다. 이 또한 그 처벌이 상대적으로 매우 무거운 셈인데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한갓 소유물로 삼는 행위, 또 하나님이 친히 택하여 구원하시고 자유를 허락하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종 되게 하는 인신매매의 행위는, 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한 것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율법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저 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사람의 자유와 인권, 또 생명을 향한 관심과 노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실천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의 신체적 상해의 문제를 다룬 18절에서 27절까지의 내용은 잠시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28절부터 36절까지의 내용, 가축과 관련된 여러 배상 문제를 먼저 다루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누군가 기르던 소가 사람을 받아서 죽였을 때,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라 명령합니다. 요즘에도 가끔씩 맹견이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이 보도가 됩니다만, 본래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신성을 모독한 경우의 처벌인데요, 피조물을 다스리는 인간을, 피조물이 죽였으니, 일종의 불경의 죄(인성모독?)이기에 이렇게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으니, 따라서 식용(食用)으로 불가함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소가 원래부터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래 그런 습성이 있어 주의를 요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때는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임자도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필적 고의가 엄격하게 적용되어 살인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충분히 알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사람’, 곧 주인에게 보다 적극적이고 무거운 책임을 부과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앞에서와 같이 기계적으로 형을 집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피해자 가족이 원한다면, 소 주인을 처형하는 대신 배상금을 물릴 수 있습니다. 이때는 피해자 가족과의 합의가 중요한 변수가 되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원한이나 의지로 인한 살해가 아니었기에, 이러한 예외 규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소에 받혀 죽은 사람이 종일 때에는 상황이 조금 다른데요, 이 경우에는 죽은 종의 주인에게 배상금을 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 배상금의 금액이 얼마이지요? 네, 당시 종의 평균 매매 값이었던 은 30세겔입니다(32절). 당시의 은 1세겔이 대략 일반 노동자 4일 품삯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약 천이백만 원쯤 되는 셈입니다. 물론 워낙 시대적 간극이 커서 정확한 계산은 아닙니다.
그런데 은 30, 그러면 생각나는 중요한 사건이 있지요? 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격이 바로 이 은 30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소에 받혀 죽은 종의 값, 일반 노예 한 사람의 값으로 팔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은 어떤 대단한 대가나 고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죽으신 게 아닙니다. 세상이 볼 때, 사람이 볼 때, 그저 노예 한 사람의 값으로 여겨진 채 팔리고 또 죽임당하셨습니다. 주님은 거기까지 낮아지셨고, 그 비천함을 통해 우리를 높이셨습니다. 주님의 삶과 죽음이 그러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스스로 종 된 사랑과 섬김을 베푸셨고, 십자가 죽으심 역시도 한없는 자기부인의 겸비함으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고, 그분의 삶을 뒤쫓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어떤 모습,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고,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할 때, 그 자체로 존경을 받거나 대단한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기대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의 자기부인은,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하고, 높은 값을 매겨주는 그런 고상한 ‘자기 부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잘 것 없고,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희생이며, 그것이 정말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되지 않는, 그래서 ‘희생’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한, 그런 죽음일 수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남을 섬기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 자신도 그 일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정도까지 스스로 낮아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억울해 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그보다 더 존귀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람은 알아주지 않고, 값으로 쳐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 지금도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시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행하고 계심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예비 된 영광을 무엇에 비하겠습니까? 너무 섭섭해 할 것도 없고, 또 내 희생이나 아픔을 누군가 알아주길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제 QT 본문이었던 시편 142편,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만이 내 기업이며, 내 분깃임을 감사로 고백하며,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겸비함으로 남을 섬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되기를, 주님이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33절 이하에 나오는, 소나 나귀의 보상에 관한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 더 언급하지 않고, 이제 18절부터 27절의 내용, 곧 사람의 신체적 상해가 발생했을 때의 규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을 이 시간에 다 다루기는 어렵고, 여기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기준이 바로 23~25절입니다. “23.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아멘)
소위 ‘눈에는 눈, 이에는 이’(탈리오의 법칙, lex talionis)라는 말로 잘 알려진 동해보복법이지요.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로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원칙입니다. 주전 18세기의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와 있다고 하는데요, 얼핏 무자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본래 이 원칙의 정신은 의외로 다른 데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무차별적이고, 무제약적으로 사적인 보복을 가하지 않도록 제한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신체적 피해를 입었을 때, 사적인 보복이 허용되면 결코 그 동일한 보복으로 끝나지 않지요. 보복에 대한 2차 보복이 이루어지게 되고, 더구나 과거에는 이러한 폭력이 단순히 개인 간의 문제로 끝나지 않은 채, 종족과 종족간의 집단적 보복, 복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적인 보복을 금지하고, 법에 의한 처벌의 상한선을 규정했다는 데, 이것의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많은 경우 당한만큼만 보복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남이 한 대 때리면, 나도 한 대만 때리는 게 아니라, 두 대, 세 대 때려야 속이 풀립니다. 내가 맞은 그 한 대 속에는 상대의 악의와 공격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느끼게 되고, 또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공격을 해왔다는 피해의식을 누구나 갖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초과적인 보복을 가하게 됩니다.
본문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은 이러한 자의적인 보복과 재보복을 금지하여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지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무엇보다 그렇게 동해보복을 한다고 해서, 어떤 ‘회복’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여러분의 손가락 하나를 자르는 실수나 폭력을 가했을 때, 똑같이 상대방의 손가락을 자르는 것으로 끝나면, 물론 잠깐 마음이 시원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나나 상대방에게나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좋은 병원에서 손가락 접합 수술을 받는 비용과 내가 받은 정신적 피해를 상대방이 돈으로 보상하는 것이,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더 나은 결과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가해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신체를 지켜냈다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 깊이 진정어린 책임을 통감하고, 다시 그 사회의 일원으로 재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비록 미약하나마, 그 범죄로 인해 손상된 관계까지도 회복의 가능성이 생기게 되지요. 이른바 ‘회복적 정의’가 시작됩니다.
예컨대 26절과 27절에 언급되는 종의 경우가 그런데요, 종의 눈이나 치아에 대한 대가로 똑같이 주인의 눈과 치아가 아니라, 종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단지 종의 신체가 덜 중요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이 종에게는 상응하는 주인의 신체적 상해보다 자신의 자유가 더 크고 온전한 보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회복적 정의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회복적 사법체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당장 종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물질로만 해결하려고 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각 개인이 당하는 책임의 크기가 동일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피해는 가중됩니다. 그래서 보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내가 당한만큼 똑같이 상대방도 당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에는 일면 공의의 측면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이 원칙을 적용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지요.
사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탈리오의 원칙은, 내가 어느 입장에서 이 법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내가 피해자일 때는, 남도 똑같은 피해를 받게 하는 이 원칙이 그래도 먼저 와 닿지만, 내가 가해자일 때는 탈리온이 아니라, 내 죄에 상응하는 다른 법적 조치를 우선 생각하게 됩니다. 더구나 내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피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복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우리의 입장의 문제이고, 우리가 정확히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 율법과는 또 다른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이 부분을 콕 짚어 말씀합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앙갚음하지 마라, 공동번역).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그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앙갚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서너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고 계신데요, 먼저 오른편 뺨을 누가 때리면 왼편을 돌려서 대라고 하십니다. 마주 선 상대방이 내 오른 뺨을 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손등으로 때려야 하지요.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상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됐는데요, 본래 뺨을 때리는 행위 자체가 그런 모욕감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요.
그런데 주님은 앙갚음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럴 때 왼편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방식이요, 율법을 완벽에 가깝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우리가 더 나은 의를 이루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말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적 정의가 아니라, 자비와 용서의 정의를 통해서 율법이, 하나님나라가 완성됩니다. 그 정의를 통하여 지금 내가 누구의 자녀이며, 누구의 나라를 사는 백성임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삶의 고백입니다.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죄인임을 인정하는 그만큼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죄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지요. 나도 그랬다는 것을,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그들 역시 죄의 권세 아래 있어 그런 것이며, 누구도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임을, 앙갚음하지 않는 그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에게는 내가 당한 피해를 온전히 보상받는 것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다른 이들이, 내 원수가, 나를 통해, 이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것을 드러래는 것에 신앙적 초점을 맞추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임하셨으며, 그가 사랑과 섬김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며, 십자가와 부활로 그의 나라가 이제 이 땅에 이루어졌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너와 똑같이 죄인이었던 내가 달라졌음을, 그래서 당신도 달라질 수 있음을, …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원수로 하여금, 명확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지난번 주일 설교에서처럼, 예수님과 한 집에 사는 존재인 우리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속, 그 형과 같이 그런 표정을 하고 세상을 대하면 곤란합니다. 형은 형다워야 합니다. 돌아온 동생을 챙기고 돌보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왜 나한테는 이것도 안 해주냐고, 그렇게 자기를 불쌍히 여기면 곤란합니다.
원망하는 형에게 아버지가 말하지요. “얘야, (그러지 마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느냐?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주님 마음이지요. 아직 주를 모르고, 아직 철 들지 아니한 자들, 아직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이 어떻게든 주께로 돌아오는 그 일들 속에서, 이미 주님을 누리고 있는 내가, 주님과 함께 ‘우리’로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 힘들지만, 성도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 높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길입니다. 나를 자랑하고 나를 드러내며, 남을 이겨서 얻는 바리새인의 의가 아니라, 내 마땅한 권리와 힘을 내려놓고, 무가치해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남을 이기게 해서라도 얻는 의, 그래서 상대방까지도 살리는 의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보상이며, 기업이며, 분깃인 것을 믿지 못하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높은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부디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앙갚음과 보복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로는, 이 땅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죄의 열매만 풍성해지며, 고통과 사망의 권세만, 죄의 나라만 번창합니다. 그러나 왼쪽 뺨을 돌려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는 날이 갈수록 소멸되어 갈 것이며,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여 많은 영혼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시듯, 우리도 누군가 주께로 돌이킬 기회와 시간을 줘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인내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얻을 것이며, 주님의 큰 기쁨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 은혜와 사랑의 정의가 가득하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참으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