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그 비유를 묻자온대' 2019년 9월 15일 주일 설교
2019-09-1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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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915 오순절 후 열네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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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45~56, 그 비유를 묻자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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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30) 본문 17절의 ‘그 비유를 묻자온대’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태운 배가 풍랑으로 인하여 원래의 목적지가 아닌, 게네사렛 땅에 도착합니다(53절). 이곳 게네사렛은 가버나움과 함께 갈릴리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이방인들과의 접촉이 빈번한, 매우 이방색이 강한 곳입니다. 본문 다음 단락에 수로보니게 출신의 이방 여인이 주님을 찾아오는데요, (‘수로보니게’라는 말 자체가 수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로 ‘수리아에 사는 페니키아인’이라는 뜻이니,) 그 상황 역시 이곳 게네사렛의 성격을 잘 대변해줍니다.
게네사렛에 계신 주님과 제자들을 저 아래 예루살렘에서부터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를 살펴볼 것도 없이,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적 배경 자체가, 게네사렛과는 아주 상반되지요. 단지 물리적으로만 먼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은 신앙적 순수성 그 자체이지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정결과 부정, 성과 속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예루살렘과 게네사렛, 이 두 공간적 배경만으로도 이미 매우 날카로운 구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1절에,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로 ‘모여들었다’고 할 때의 동사 ‘수나고’는, 시편 2:2의 말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의 ‘나서며’에 해당하는 단어로,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를 대적하여 군대를 모으는 장면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메시아가 오셨을 때, 이 땅의 권위와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할 것에 대한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이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고자 했던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되는 셈이지요. 유대뿐 아니라 이방 가운데도 왕으로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이고 나서며 꾀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다급해졌습니다. 이미 온 갈릴리 지역이 예수님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젠 제자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들의 손을 통해 기적이 나타나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더 손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대중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레이더망에 제자들의 부정한 손이 걸려들었습니다. 방금 전 풍랑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하신 주님은 이번에도 그 적대자들의 공격을 대신 막아서십니다.
주님의 몇몇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밥을 먹었고, 그것이 문제가 됐는데요, 사실 유대인들은 떡(혹은 빵)을 먹을 때, 칼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다 떼어 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는 꼭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단지 위생상의 청결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부정한 것을 만짐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부정해진 상태를 씻고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의식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먹기 전에 손을 닦는 일반적인 청결 문화와는 조금 다릅니다. 3절의 ‘손’[퓌그메]이라는 단어의 아래 주석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그들은 손만 씻는 게 아니라, 팔뚝 전체를 씻고 식사를 했습니다. 세정제나 비누로 깨끗이 씻는다기보다는 구별된 방식으로 씻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위생 그 자체보다는 종교적 의미가 더 강한 것이지요.
만약 시장(마트)과 같이 사람들이 많은 곳을 다녀왔다면, 그는 조금 더 강한 정결 의식이 필요한데요, 4절처럼, 물을 뿌리는 것, 즉 아래 나와 있는 설명처럼, 목욕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의 목욕 개념이 아니라, 몸에 물을 뿌려 종교적으로 씻는 행위의 개념입니다. 여기 ‘물을 뿌리다’라는 말이, 우리에게도 너무 중요한 ‘밥티조’라는 단어인데요, 다름 아닌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 받을 때 샴푸나 비누 사용하지 않지요. 단순한 위생과 관련된 문제가 아님을,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결함을 회복하고,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건 비단 본문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만 강조한 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에세네파(쿰란 공동체와 연결) 역시 이런 문제에게 민감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신앙이 좋다는 유대인들 대부분이 이러한 정결의 문제를, 온전한 신앙의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있는 내용이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본래 이 규례는 제사장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 뜰(마당)에서 손과 발을 씻고 몸을 정결하게 하는 규례가 이 전통의 기원입니다. 성막 뜰에 큰 놋대야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물두멍이지요. 거기서 제사장들은 손과 발을 씻고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원래는 일반인들과는 관계가 없었던 규례입니다.
이러한 규례가 온 백성들에게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성전이 사라진 후, 소위 포로기를 겪으면서입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포로로 살면서, 매순간 이방인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성전도 예배도 다 잃어버린 채 늘 부정한 상태였던 유대인들은, 불가피하게 이러한 정결 의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으로라도 자기들의 신앙적 도리를 다하고, 그래서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이 없어 제사장이 필요 없으니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이 그 일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이 포로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땅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그리스와 로마 같은 이방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야 했던 유대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이방인과의 접촉은 여전했고, 그들과 구별된 정결함과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의 이런 문제제기는 분명히 일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부분이었고, 민족의 정체성과도 직결된 것으로,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처럼, 본래 하나님의 법이 아니었던 이 규례가 나 자신만의 신앙적 열정이 아닌 남의 신앙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다는 건, 가도 너무 멀리 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 규례에서도 그랬듯이 사람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 주신 율법이,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전통으로 인해 오히려 사람을 억압하고 해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이곳저곳 다니며 외부에서 먹고 자는 일이 많은 제자들이 어떻게 매번 제대로 씻고 목욕하고, 밥을 먹겠습니까? 오병이어 사건 때처럼, 광야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먹는 식사인데, 어떻게 그런 전통을 제대로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씻을 물이 문제가 아니라 마실 물도 부족한데 말이지요.
비록 본래의 취지가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이미 그 전통은 본래 율법에서도 한참 멀어져버리게 됐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기 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던 소박한 의식이, 밖에서 먹고 자기를 반복해야 하는 나그네들의 삶조차 사람들 앞에서 정죄하는 무거운 멍에가 돼버린 것입니다. … 이것은 단지 지킬 수 없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규례를 잘 지키는 이들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정결예식의 전통이 우리를 어떤 함정에 빠지게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게 된다는 문제, 곧 외식(外飾)의 문제에 걸리기 쉽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儀式)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당연히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보다, 우리의 겉모습만 볼 수 있는 인간의 눈을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의식하게 되지요. 선한 동기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의식이 아니라, 의도된 겉치레 속에 인간의 더러운 내면을 숨기고 가리게 되는 겁니다.
또한 남을 판단하기는 더 쉬워집니다. 신앙적으로 뭔가를 하더라도 그걸 나만 그렇게 하면 되는데, 우리는 꼭 남도 나처럼, 내 기준에 맞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지요.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단순히 겉모습만으로 남을 판단하고, 나와 같은 모습을 강요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사실 유대교 신앙이든, 기독교 신앙이든, 결국 우리의 신앙이란 은혜 받은 자, 곧 먼저 사랑받고, 먼저 용서받은 자의 자발적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이쯤 되면 그런 신앙의 본질도 다 흐릿해지고 맙니다.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 만든 전통이 오히려 율법의 본질을 외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이야기에 대하여 매우 극단적으로 반응하십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다짜고짜 그들을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로 몰아세우십니다. 주님은 아예 처음부터 책망으로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제기하는 판단과 정죄에 대하여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매서운 비판만 이어가십니다. 어떤 가르침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우치려고 하신다거나, 뭔가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것이 왜 잘못되었고,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주님의 설명을 듣는 사람들은, 14절 이하에 나오는 것처럼, 오히려 주님을 따르던 무리, 그리고 제자들입니다. 정작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말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에겐 그런 말들조차 필요 없다고 주님은 판단하셨고, 실제로 그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여러분, 이런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의’를 주장하며 교만해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항상 이 점부터 고민해봐야 합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가 아니면 내 기준과 판단 때문인가 …. 아울러 결국 이것이 그 사람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그를 고쳐서 내 눈에 거슬리지 않게 만들기 위함인가? 우리는 깊이 숙고해야만 합니다.
혹 다른 이들의 허물이 보여도, 정말 그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주님 모습처럼, 우리의 그 헤아림으로 주님이 우리를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티를 보는 우리에게 들보가 있다고 주님은 판단하십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얻었음을 믿는다면, 내가 남보다 더 낫다는 생각은 아예 멈춰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그런 죄인이 남을 판단한다면, 그는 스스로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맞는가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빌 2:3) 명령하지요. 상대방이 나보다 더 나은 모습일지 아닐지 우리는 모릅니다. 당연히 실제로 내가 상대방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도는 그럴 때조차 뭐라고 권면합니까? 남을 나보다 낫다고 ‘여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인정하라고, 그 여김을 통해 스스로 겸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 앞에 순종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었던 것에 대하여, 겉모습만 보고 남을 쉽게 비난하거나 훈수하지 마십시오. 훈수는 내가 상대방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있지 않는 한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바둑판 앞에서 나보다 고수에게 훈수하는 어리석은 자를 보셨습니까? 거기엔 무슨 이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지, 생각하며 일단 입을 다물게 됩니다. 나보다 더 실력이 좋은 사람의 수를 내가 판단할 수 없듯,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타인을 향한 훈수를 금세 그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은 결국 남을 향한 그 시선을 거두어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남의 부정함을 보는 시선을 거두어, 내 마음속 부정함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느낀 절망 가운데 예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아무리 신실해도, 그의 시선이 내 들보가 아니라 타인의 티를 향해 있는 한, 그는 아직 예수를, 십자가와 은혜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더러운 것이 사람 어디에 있다고 하십니까? 네, 사람 밖이 아닌, 사람 안에 있다고 계속 강조하십니다. 사람 밖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 정결함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입니다. 따라서 모든 음식물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씀합니다(19절).
사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선언이지요.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율법의 내용을 해석하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완성하십니다. 구약의 쉐마를 연상시키는, 14절의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는 말씀 속에는, 장로들의 전통은 물론, 토라 그 자체를 능가하는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의 말씀은 일면 율법과 배치되지요. 율법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아닌 것을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담대히 선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신 하나님나라에서는 이제부터 음식으로 인한 부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더 이상 외부의 어떤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은 없다고, 완전히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신 겁니다.
이는 단지 음식만이 아니라, 외부의 부정한 모든 것에 대한 율법의 내용에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소위 율법적으로 부정해진 사람들을 멀리 하지 않으시고, 두려워하지도 않으시고, 친히 만지고 고치신 것을 살펴봤습니다. 문둥병자를 굳이 만지심으로 고치셨고, 야이로의 죽은 딸, 곧 시신을 만지셨으며, 부정한 여인이 몰래 당신을 만진 것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죄인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셨으며, 귀신들린 자를 친히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몸으로, 삶으로 정결함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고 계셨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사람 안에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사람 안에 있는 그 더러운 것들이 우리의 언행을 통해 몸 밖으로 나오면, 이제 그것이 다른 이들을 더럽게 하고, 상하게 만듭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다 잠재적인 독(毒)이며 흉기입니다. 뭘 먹거나 만지거나 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 자체의 내면 자체가 더럽고 상한 음식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하겠습니까? 무조건 내 속으로 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겉모습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나만, 내 속사람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오늘 교회력 말씀(디모데전서 1:12~17)에 보니,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했기에, 바울처럼 훌륭한 사람이 그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가 죄인의 괴수라면 우리는 뭐겠습니까? 무슨 영화 제목처럼, ‘괴수의 왕, 고질라’ 쯤 되지 않겠습니까? 네, 그것이 진실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전히 그런 모습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신경 쓰고 싶고, 가르치고 싶고, 책임지고 싶으시다면, 그럼 여러분 저처럼 목사를 하시면 됩니다. 솔직히 저는 제 앞가림만 하고 살기에도 버거운 사람인데, 그런 자가 목사가 돼서, 참 곤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게 아니시라면, 우리의 시선은 내 안에 있는 더러움을 향해야만 합니다. 독의 근원이며, 음식물 쓰레기 창고이자, 흉기로 가득한 무기고인 그 마음을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그 싸움을 싸우셔야 합니다.
그 시선이 밖으로 향하면 보나마나 우리는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 같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내 안의 방치된 더러움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입은 정결하지만 마음은 점점 하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가리기 위해 더 많은 인간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대신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변하지 않고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여러분의 마음을 거룩하게 지켜내시기를, 그리고 남을 향한 시선을 여러분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물론 전통은 그 자체로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일단 우리는 전통 없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전통 없이 어떻게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앙의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도 없을 겁니다. 이 예배의 거의 모든 것이 전통의 산물입니다. 율법과 성경의 내용이 본래 우리의 모든 삶을 전부 다 규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의 내용들은 사실 가장 원론적인 내용만을 다룹니다. 율법의 본질에 해당하는 ‘what’을 설명할 뿐, 그것을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실행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랍비들이 그 ‘how’를 설명하기 위해 그 오랜 세월 숱한 노력을 기울인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나 미쉬나 같은 모든 유대교 전통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삶에서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그걸 다루는 게 전통인 겁니다. 전통이 없다면 우리는 또 다른 전통을 만들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실 우리고백교회도 전통을 매우 강조하는 교회인 것 같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예배의 틀을 잡는 것 자체가 그렇고, 성찬식도 매주 진행합니다.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도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지요.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제가 무척 보수적인가 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전통이 없이는 어떤 새로운 것도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가 그 전통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무엇보다 저는 저와 우리고백교회의 실력보다 그 2천 년의 실력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한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래서 가능한 더 많이 전통을 배우고 싶고 또 지켜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게, 우리의 겉모습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겉모습으로도 남을 시험에 빠지게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위선은 나쁜 것이지만, 남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무책임한 언행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쓰라고,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을 조심하라고 수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 행위가 혹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혹 믿음이 아직 연약한 이들이 내 언행으로 실족하지 않을까, 성도는 늘 조심하여 먹고 마시며,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덕을 세워 남에게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그러니 참 쉽지 않은 길입니다. 위선과 덕, 그 사이의 그 얇고 흐릿한 선을 구별하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신앙적 과업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전통이 성도 개개인과 공동체를 더 건강하고 바르게 지켜줄 울타리가 되려면, 그리고 그 전통의 주체인 우리 자신의 내면이 바뀌고, 우리의 겉은 덕을 세우는 아름다운 예수의 형상이 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묻고 끊임없이 답을 구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본문 17절에 기록된 ‘그 비유를 묻자온대’입니다. 너무나 중요하고 또 주님이 강조하시는 성도의 결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면하시고, 따르는 무리를 다시 불러 음식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14~16절). 그런데 정작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좋은 선택을 합니다. 무리들이 다 돌아간 후 주님과 따로 집에 있을 때, 그 말씀에 대해 다시 한 번 여쭤본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고 잘 깨달아지지 않는 메시지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지 않고, 주님께 여쭤본 것, 바로 거기에서 제자들은 비로소 바리새인들의 실력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 겁니다.
물론 주님께 호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제자로서 아직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고, 주님이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책망은 짧고 주님의 설명은 깁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앞에서는 없던 친절한 설명을 주십니다. 이 문제가 뭐라고, 본문은 장장 스물세 절에 걸쳐 기록되어 있지요. 오병이어 사건보다도 훨씬 더 긴 분량입니다. 이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기도 하지만, 제자들이 주님께 묻고 들으며 깨닫기 위해 힘썼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하지요. 직접적인 성경 말씀의 들음도 중요하고, 설교를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나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나머지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다가, 막히거나 헷갈릴 때, 우리의 전통과 내 모습이 분별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의 영, 성령께 언제든 여쭤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물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특권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자주 답을 안 해주시는 게 문제지만, 그러나 그건 우리가 워낙 듣는 데 실력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물으십시오. 목자 없는 양 같이 신앙생활 하지 마시고, 부디 묻고 따지고 생각하며 예수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우리는 참 질문에 서툰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랜 시간 훈련을 해왔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잘 안 됩니다. 묻고 듣는 데까지 가는 게 너무나 어렵습니다. 다윗이 구한 묻는 마음, 솔로몬이 구한 듣는 마음,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 마음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것 묻지 마십시오. 저 사람 왜 저럽니까, 저 인간 왜 안 바뀝니까, 저 웬수 어째서 그대로입니까, 그런 것 묻지 말고, 우리를 더럽게 하고, 또한 타인을 더럽게 하며, 온 세상을 더럽게 하는,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에 대하여, 그럼에도 그런 우리를 당신의 피로 씻어, 영으로 거듭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열심히 물으십시오. 우리 자신을 보게 해 주시기를, 더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우리가 날로 새로워지기를, 주께 간구할 수 있는 모습에 이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만물을 더럽게 하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것을 고치러 오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어 저와 여러분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전통은 필수불가결하며,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전통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신 기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멈추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 열심히 질문하여, 우리의 전통에 이끼가 끼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 말씀에 순종하기를 소망합니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함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영성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셨으니, 사랑하는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부디 이 마음을 품고 삶으로 고백함으로써, 나도 정결해지고, 남도 살리는, 그리스도의 복 된 삶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