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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2019년 9월 8일 주일 설교
2019-09-0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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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908 오순절 후 열세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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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45~56,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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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29) 본문 50절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병이어의 만찬이 모두 끝나고, 늦은 저녁 이제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 기적의 여운이 쉽게 가시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흥분으로 가득하여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자신들의 손을 통해 모든 기적이 전달되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모은 그 바구니들을 하나씩 들고 다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또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주님도 그들의 반응이 싫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때문에 예수님께서 뭐 흔들리셨거나 당장 무슨 마음이 어떻게 변하시지는 물론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온전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우리와 똑같은 감정과 기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임금 삼고자 하는 그것이 왜 행복하지 않고, 왜 흥분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피곤하고 졸리고 힘들어 죽을 것 같다가도, 누가 제 칭찬하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면, 그냥 기분이 좋아져서, 눈이 맑아지고, 힘이 샘솟고, 없던 의욕도 생기고 그렇습니다. 칭찬이, 인정이, 천연 피로회복제가 되는 것, 인간이 그런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래서일까요, 주님은 의도적으로 급하게 모두를 흩으십니다. 45절, 주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셨다’는 말씀처럼,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주도적이고 다급한 모습, 사람들을 돌려보내시고, 또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는 그런 주님의 모습이 모두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제자들의 마음도, 또 혹 주님의 마음까지도 흔들리고, 또 본문 표현으로 하자면, 둔하여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이 그렇게 오병이어 사건을 급히 마무리하신 후 어디로 가십니까? 왜 가십니까? 네, 기도하기 위하여 산으로 홀로 가십니다. 어찌 보면 참 의아한 모습 아닙니까? 굳이 그 밤에, 사람들을 흩어 보낸 후, 굳이 제자들은 모두 따로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신 채, 주님은 굳이 홀로 주님만의 골방으로 가십니다. 몸은 피로로 천근만근일 것이고, 반면 마음은 큰 성취의 감격으로 두근거릴 것이지만, 바로 그 순간 오히려 주님은 아버지께로 나아가 숨고 거기 머물러 계십니다. 왜 그리 하셨겠습니까?
네, 그만큼 주님의 마음이 어수선하셨기 때문이고, 또한 주님을 보내신 이, 곧 아바 아버지와의 깊고 친밀한 교제가 시급하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들, 그로 인한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이, 주님이 이 땅에 보냄 받은 이유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영광이, 주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보다 더 중요할 순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내주는 그 달콤한 인기의 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떡이 지금 주님께는 더 필요했기에, 주님은 급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의 이 기도의 타이밍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문제가 생겼을 땐 나름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그것이 해결되거나, 또 어떤 좋은 일이 생기고 나면 오히려 기도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주님의 모습은 우리가 정말 기도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인정받고, 내가 높아지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게 보이고,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드러나는 바로 그때가 가장 중요한 기도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는 기도야말로 정말 하나님 그 자체를 누리기에 최상의 조건이 되겠지요. 나도 하나님께, 하나님 외에 더 바라는 게 없으니까요.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도 쉽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힘들면 기도도 잘 안 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기도는 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건 철저하게 문제에 집중된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데, 그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능합니까? 어렵습니다, 그냥 죽어라 내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그래서 힘들 때의 기도로는 주님의 말씀이나 뜻을 분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주님께 시선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맞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자, 그 문제에 몰두하느라고 결국 예수를 놓치고 말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귀신이라고 착각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문제에 몰입되면, 그래서 두려움에 휩싸이고 나면 우리의 시선에 더는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고난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도와주세요!”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도로 성장하려면, 평안하고 형통할 때, 그리고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느끼게 됐을 때, 그때의 기도를 잊으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가 목적이 되고,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는 그런 기도,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오병이어 직후의 이 기도가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다는 그 말 자체가 사실은 어찌 보면 너무나 이상한 말이지요. 예수님이신데, 기도를 하셔도 굳이 그렇게 따로 산에 가셔서, 말 그대로 작정하고 기도하셔야 하나, 싶지 않습니까? 사실 예수께서 기도하셨다, 하는 그것만큼 예수님의 인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일도 없습니다. 네, 주님은 작정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때와 장소를 분별하고, 구별하셔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그리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더 어떻게 얼마나 기도해야 할까, 생각해보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비록 바쁘고 힘드시겠지만, 우리, 그래도 평안하다 싶을 때, 그래도 감사하다 생각될 때, 그때 더 하나님 앞에 머무르기 위해 애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람들의 인정과 환호가 제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제게는 주님만 있으면 족합니다. 주님이 저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지만, 제 마음에는 여전히 주님을 향한 사랑보다, 저 자신을 향한 사랑과 애착이 더 크다는 것을, 주님은 또한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밖에 모르는 교만한 저를 통해 일하여 주시고, 저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도록, 저를 지켜주십시오. 제 영혼을 다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사,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안겨 쉼을 누리듯, 오직 여호와를 바라는 가난한 마음을 허락해주십시오(시편 131편),”라고, 주님 앞에 간구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그리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평안하고 형통하며, 더 나아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분명하게 느껴질 때, 그때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저 여러분이 높아지는 그 길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높아지는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조금 더 형통해지고 평안해진 것을 기뻐하는 데 그치지 마시고, 과연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늘 하나님 앞에서 묻고 듣는 그 믿음의 자리까지 이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머물고 계실 무렵, 제자들은 주님과의 분리로 인한 어려움을 혹독하게 겪고 있었습니다. 깊은 밤 불어오는 갈릴리 바다의 맞바람으로 인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처음 시작될 땐(45절) 분명히 목적지가 벳새다였는데, 53절에 도착한 곳을 보면 게네사렛 땅이지요. 두 도시 사이의 거리만도 수십 km입니다. 53절 이후의 내용이 중간에 삽입된 본문일 수도 있지만, 풍랑으로 인해 그 행로가 크게 변경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번 여정으로 인해, 제자들은 원치 않는 주님과의 분리와 또 한 번의 풍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한 번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때는 비록 주무시고 계시긴 했어도, 주님이 같은 배 안에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닙니다. 주님은 저 멀리 산에 계시고, 제자들만 따로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에 맞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때 제자들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처음에 배를 탈 때만 해도 그 배 안에서는 별의별 흥분과 후일담이 가득했을 겁니다. 먼저 안드레가 자신이 직접 아이에게서 가져 온 그 오병이어, 그때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을 것이고, 이백 데나리온 필요하다고 말한 빌립도 ‘아, 정말 그만큼의 떡이 다 채워질 줄 몰랐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2백 몇 십 몇 데나리온 어치였다.’며 말을 보탰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떡과 물고기가 정확히 언제 부풀려졌는지, 다름 아닌 우리 손을 거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는 놀라운 경험들을 서로 나누며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맞구나. 우리를 위해 오신 메시아가 맞았어. 이분이 정말 우리를 로마와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고, 그들을 정복하실 우리의 왕이었어. 그분 옆에 있는 우리도 앞으로도 뭔가 엄청난 일을 계속 하게 되겠지? 그분이 왕에 오르면 우리는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어.’ 그런 북받치는 감동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흥분이 컸던 만큼 갑자기 찾아온 어려움 앞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무기력한 모습 앞에서, 그들의 실망감은 더 컸을 것입니다. 처음의 감동은 사라지고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습니다. 오랜만의 휴가도 반납한 제자들이었기에, 그 피로감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급기야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바다를 걸어오신 주님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51절에 보시면, 제자들은 주님 때문에 ‘심히 놀랐다’(totally amazed, NLT) 라고 말씀합니다. 이번에도 바람과 파도에는 제자들이 그렇게 놀랐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주님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면, 주님이 막상 나에게 다가오셔도, 그 주님을 알아보고 기쁘게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그렇게 또 한 번 그대로 드러나게 됐습니다.
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몇 번의 승리와 믿음의 순종이 있었어도, 단 한 번의 고난이나 실패만으로도 급격히 무너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늘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 같다가도, 내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작은 문제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그래서 그것이 ‘염려’라는 태풍으로 발달해버리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그동안의 우리의 모든 신앙적 노력과 성취와 경험이 거의 쓸모없는 것처럼 그렇게 소멸되는 느낌을 받게 되곤 합니다.
그땐 주님이 직접 도우러 오셔도, 주님이 어떤 도움의 손길을 우리에게 내밀어주셔도, 우리는 그것 또한 또 하나의 고난이나 문제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이지만, 그것이 주님의 손길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완전히 KO(knockout)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미 두려움이 우리를 정복해버렸고, 그래서 우리의 감각은 둔해지고,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52절 말씀이 그것이지요. 이미 제자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주님이 오병이어의 떡을 떼시던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겁니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우리는 그걸 다 별개로 인식합니다. 그때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내 목자’이신 하나님이라고 연역하고 추론하여,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경험을 case by case로, 각각의 분리된 상황으로만 인식합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일은 결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무시던 주님과 함께 한 폭풍우 따로, 오병이어 따로, 그리고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 따로, 칠병이어 따로, 우리는 그렇게 믿음을 따로따로 배워갑니다. 우리의 가장 큰 연약함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들의 실력을, 제자들의 실력을 다 아십니다.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자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 많은 우리 영혼이, 아무 때나 생기는 염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염려에 얼마나 쉽게 휩싸이는지, 주님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십니다.”(키에르케고르) 그래서 매번 우리에게 달려와 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가장 감격되고 감동되던 구절이 48절 중간의 ‘보시고’입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 밤 사경쯤,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가장 깊은 밤, 제자들이 사경(死境)을 헤매는 그 시간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러분 주님이 기도하러 혼자 산에 가셨는데, 거기서 제자들의 어려움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도를 멈추시고,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로 다가오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왜 주님이 배 타고 뒤따라오지 않으시고, 그 밤에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겠습니까? 네, 이유는 간단합니다. 최대한 빨리 제자들에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무슨 ‘와호장룡’ 같은 무협 영화에나 나오는 주인공처럼, 바다 위를 걷는 능력을 드러내고 싶으셔서 그리 하셨겠습니까? 주님이 언제 당신 능력 드러내려고 일부러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홀로 기도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런데도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달려서, 제자들에게로 오십니다. 지금 배 찾고, 어부 구하고 그럴 시간이 없는 겁니다.
우리 주님 그러고 보면 참 바쁘십니다. 사역하시랴, 기도하시랴, 제자들 돌보시랴, 거기에 물도 걸어 다니셔야 할 지경입니다. 저는 그 주님이 지금도 그렇게 저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실 것을 믿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대로, 주님은 우리의 목자 되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혼자 위험에 빠져 아등바등 하는 우리의 모습을 주님은 결코 모르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시며, 바다 위를 달려오십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 주님은 저와 여러분 각자를 그리 섬기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도착하셔서 하시는 첫 마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 이 말씀 앞에는 ‘곧’이라는 부사, ‘즉시’라는 뜻의 ‘유쎄오스’가 나옵니다. 50절인데요,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놀라자, ‘즉시’ 주님은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이건 분명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제자들을 더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였을 겁니다. (작은 소리에도 너무 잘 놀라는 제 아내, 그래서 제가 갑자기 부를 때마다 항상 조심하게 되는 …)
큰 소리로, 여유 있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간절한 음성으로, 주님은 안심하라고, 나 여기 있으니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기 왔으니 이제 다 되었다고 …, 풍랑에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냐고, 정말 고생했다고, 이제 괜찮다고 …,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비로소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배에 오르시고 난 후, 주님이 제자들과 한 배를 타신 직후 풍랑이 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이 찾아오곤 합니다. 혹시 지금도 그런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주중에 저와 저희 가정에도 참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보통은 힘든 일이 몰려서 함께 오지 않습니까? 저희 가정도 지금 그런데요, 이게 말씀드릴 수도 없는 참 애매한 문제입니다. 해결이 되면, 그때 기회를 봐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주중에 말씀 묵상하면서, 제게는 이 말씀이 더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혹 여러분도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풍랑을 만난 것 같으십니까?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또 자꾸 뒤처지고 하는 것 같은 삶이신지요.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시며, 반드시 지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로 달려 오사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샬롬을 회복시켜 주시는 선한 목자 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여러분도 그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 음성을 분별하여, 기쁘게 여러분의 배에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발걸음과 여러분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놀라지 마시고, 부디 여러분의 삶을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 언제 바람이 그쳤다고 성경이 말씀한고요? 네, ‘주님이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셨을 때’(51절) 비로소 바람이 그쳤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삶에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두려움은 주님의 말씀으로 잦아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의 마음을 위협하고 다스리던 두려움의 풍랑이 잦아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자리한 풍랑 그 자체는, 주님의 임재로, 주님이 우리의 삶에 친히 들어오실 때 비로소 잔잔해집니다. 배 밖에 계실 때가 아니라, 배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이라는 배 안으로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치 유령인 양, 그분을 영접하면 무슨 큰 일이 날 것처럼, 두려워하고 멀리하지 마시고, 주님이 친히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고 개입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배에 오르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삶을 오픈하고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의 임재 앞에, 그 풍랑이 스스로 잦아들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기를 그래서 주님을 구하고 영접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없이도, 주님이 멀리 계신 게 느껴져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을 평안으로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풍랑 없이 잔잔하지만 거기 낀 짙은 안개를 분별하셔야 합니다. 서툰 어부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만 능숙한 어부는 안개를 두려워한다는 유명한 일본 속담이 있습니다(김금희의 소설 ‘경애의 마음’에서 인용). 이번 ‘링링’처럼 큰 태풍, 두렵습니다. 다 두려워하고 조심합니다. 그 태풍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어리석은 어부는 없습니다. 초짜 어부든, 노련하고 경험 많은 어부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부가 경험이 쌓이고 실력이 쌓이면 진짜 무서운 건 평범한 안개라는 걸 알게 됩니다. 바다는 고요하고, 배는 평안하지요. 그러나 이미 위기입니다. ‘이쯤은 괜찮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평안하잖아. 잘 보이진 않아도 가까이 가면 다 보일거야, 내 경력이 얼만데, 이 정도 쯤이야,’ 가볍게 여기다가 결국 크게 실족합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풍랑이 아니라 안개를 두려워합니다. 주님이 잘 느껴지지 않는 상황, 주님은 보이지 않는데도 너무나 평안한 상황, 예수님과 유령이 분별되지 않는 상황,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헛갈리는 상황, 그 상황 앞에서 성도는 긴장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고난보다 더 큰 문제가 실은, 주님을 분별할 수 없는, 우리의 거짓 평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이 아닌 안개 앞에서 우리가 더 기도에 힘을 써야 한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가장 기도가 필요한 순간은 풍랑이 아니라 안개를 만났을 때입니다. 우리의 소망대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 같고, 또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미끄러져 갈 때, 바로 그때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인생이 흘러가고, 원하던 평안이 찾아오고, 그런 나를 사람들이 주목하는 바로 그때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가장 위험한 위기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오늘 함께 나눈 이 말씀이, 우리의 흐린 시선과 분별력을 다시 맑게 하는 주님의 음성이 되기를,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삶으로 영접하게 하는 능력의 말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무뎌지고 둔하여진 마음을 다시 부드럽게 하시고, 단단한 마음의 굳은살을 제거하사 부드럽고 예민한 새 살을 주시기를(겔 36:26) 간절히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둔하여질지, 제자들을 통해 미리 경고하신 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 말씀인데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진다고 하십니까? 네, 방탕할 때, 술 취할 때, 또 생활의 염려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집니다. 그러고 보면 좋을 때나 힘들 때, 언제나 둔해지기 쉬운 게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조심하라고, 그 길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연약함을 늘 기억하며, 항상 조심(操心)하시기 바랍니다.
형통의 때에, 평안의 때에, 그래서 주님과 말씀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 기도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홀로 당하는 어려움인 것 같아도, 목자 되신 주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계시며, 즉시 우리에게 달려오시는 분이라는 것도 함께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내가 탄 배에 영접할 때, 함께 ‘한 배’를 탈 때, 비로소 그 풍랑이 잔잔해진다는 것도 묵상했습니다. … 사랑하는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의 모든 묵상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그래서 주님과 함께 그 바다를 건너, 다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