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마리아의 아들 목수' 2019년 8월 11일 주일 설교
2019-08-1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0811 오순절 후 아홉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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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1~6, 마리아의 아들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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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25) 본문 3절의 ‘마리아의 아들 목수’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버나움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여인을 고치시고, 또 야이로의 어린 딸을 소생시키신 주님께서 이제 그 발걸음을, 주님의 고향 나사렛으로 옮기십니다. 그리고 1장 중반부터 이어져온 주님의 말씀과 치유의 사역이 오늘 본문을 통해 일차적으로 일단락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로 봤을 때는, 일종의 소결론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데요,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큰 과정, 즉 갈릴리 지역에서 시작하여 건너편 이방인의 땅 거라사로, 그리고 다시 가버나움을 거쳐 나사렛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이 바로 이 본문에서 일단락됩니다.
이어지는 그 다음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묶어 파송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일종의 인턴쉽인 셈인데요, 양육과 훈련의 한 과정이 마무리됐다는 뜻입니다. 1장에서 시작된 주님의 사역 그 첫 번째 챕터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세우시는 장면으로 시작했다면, 두 번째 챕터는 그렇게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 함께 하면서 훈련받은 제자들을 직접 현장으로 파송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아울러 이 두 번째 부분에서는 세례요한,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의 모습이 예수님과 오버랩 되면서, 장차 있을 예수님의 죽으심이 예표되고, 다시 한 번 갈릴리와 이방인들을 향한 주님의 사역이 반복됩니다. 이후 세 번째 챕터는 주님의 실제 예루살렘 행, 그러니까 십자가의 죽으심을 향한 주님의 마지막 발걸음을 다룹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큰 흐름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흐름에 있어 주님 사역의 첫 번째 챕터가 마무리되는 시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적 배경이 특별하지요. 바로 주님의 고향 나사렛입니다. 사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떠오르게 합니다. 주님이 왜 나사렛으로 향하셨을까? 굳이 사람도 별로 없는 나사렛까지 가신 이유가 뭘까? 제자들까지 다 데리고 가신 걸 보면, 단지 개인적 방문은 아닌데, 주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양육에 있어서 하나의 큰 맥락을 마무리하시면서, 왜 주님은 나사렛을 그 마지막 장소로 삼으셨을까? 여러 가지 질문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사렛은 가버나움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 잘 아시는 것처럼, 당시에는 많아야 500명 정도(지금은 약 6~7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인구 500명이면, 요즘 지방의 읍이나 면도 안 되고, ‘리’에 해당하는, 그래서 고작 수십여 채의 집이 모여 사는 그런 정도의 규모입니다. 당연히 도시의 사람들은 그 존재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이지요.
제 본적이 충청남도 소재의 한 작은 마을, ‘칠산리’인데요, 여러분 ‘칠산리’라는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고향이 바로 그 옆 마을이신 집사님 외에는 아마 다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나사렛이 딱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전혀 모릅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물론이고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문서들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런 마을이 바로 나사렛입니다. 주님은 소위 그런 외진 시골 출신이었습니다.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었지만, 실제 살았던 고향은 나사렛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나사렛으로 오늘 제자들을 이끌고 가셨고, 거기서 사역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고 계십니다.
나사렛에 가신 주님은 제일 먼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에 보면, 메시아와 구원의 날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이사야 61장의 말씀,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를 펴서 읽으신 후, 그 예언이 당시 말씀을 듣는 그들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주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진 그 권위와 지혜, 그리고 주님의 손으로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 앞에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감동과 놀라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좀 이상합니다. 놀라고 감동은 받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결론이 ‘배척’입니다. 아래 주석을 보면 ‘실족’이라고도 나옵니다. 놀랐는데 배척하고, 감동받았는데 ‘실족’했습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2절 중간부터 이상해집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고 질문하면서부터입니다. 놀라움을 애써 억누르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관계와 선입관 안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고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가리켜 말하면서, 단지 ‘이 사람’(2, 3절에만 세 번)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 …, 뭔가 큰 괴리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말이자, 견고한 무시와 경멸의 마음도 느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도 절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에, 아마 그 언급 자체를 일부러 피했을 것입니다.
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권능에 대해, 비록 신기해하며 놀라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이후엔 곧장 주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님을 그들 안에 받아들일 마음도 없었고, 더 깊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과 상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의 주, 나의 선생, 나의 그리스도, 나의 하나님, 그런 관계가 아니라, 그냥 ‘신기한 이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그들 안에 있던 놀라움의 결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지 놀라움만으로는 예수와 상관할 수 없습니다. … 혹 여러분에게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어떤 대단한 사람입니까? 무언가 좋은 가르침을 주는 탁월한 선생이십니까? … 그렇다면 그 놀라움과 감동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삶에 깊이 상관하고 있는, 여러분의 주가 되십니까? 여러분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정말 여러분과 연합된 임마누엘 그리스도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혹시 우리에게도 단지 호기심의 대상으로 끝나는 건 아닙니까? 나사렛 사람들은 명확한 선을 긋고 주님을 그 밖으로 밀쳐내고 있었고, 결국 주님은 그곳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놀라운 말씀이지요. 주님도 거기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치 능력이 없기라도 하신 것처럼,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깊이 머물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과 온전히 상관되고, 그래서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의 참된 주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보여주는 그런 마음과 반응에 적잖이 놀라고 당황하셨습니다. 6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상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상히 여기다’라는 이 단어[ἐθαύμαζεν]는, KJV이 ‘marvel’이라는 단어로 옮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크게 놀라고 기이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2절의 ‘놀라’[ἐκπλήσσω] 놀라 압도되는 것). 주님께는 전혀 뜻밖의 반응이었고, 주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선지자 대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겁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일종의 금의환향(錦衣還鄕) 비슷한 상황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환호하고 뒤따르며, 주님을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그처럼 갈릴리 최고의 유명인사가 된 예수님이 그 시골 고향에 오셨으니, 이건 나사렛의 경사입니다. 적어도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 정도는 걸어 환호할 일입니다. 요즘에도 지방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지요. 무슨 고시에 합격하거나 나라의 중요한 직책에 오르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현수막이 걸립니다. 하지만 나사렛은 아니었습니다. 현수막은커녕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고, 놀라움은 곧장 주님을 배척하는 것으로 돌변했습니다. 심지어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반응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 그리고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다.” 사실 나사렛 사람들의 과격한 반응을 고려하면 대단히 차분하고 담담하다 못해 맥이 빠지는 대응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집과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 사실 이 표현은 당시 유대인들의 속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이하긴 해도, 조금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전혀 이해 못할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 그렇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집과 친척, 고향에서는 외면을 당하기 일쑤인 겁니다.
사실 제 고향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차로 한 15분 정도 거리 안에 제가 다닌 초중고등 학교가 다 위치하고 있고,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제 고향 근처에 가봐야 별로 반응이 시원치 않습니다. 뭐 저는 예수님도 아니고, 또 신령한 선지자도 아니니 이해가 됩니다만, 사람들이 왜 시큰둥하겠습니까? 네, 저를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알고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서 그렇지요. 학창시절에 쉬는 시간마다 같이 학교 담을 뛰어넘는 소위 ‘담치기’로 불량식품을 사먹고 들어오고, 방과 후엔 오락실에서 함께 놀고, 때론 슈퍼마켓에서 같이 초콜릿 훔쳐 먹고 하던 그때의 저를 보았고, 또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런 일탈이 없으셨을 예수님이지만, 주님은 오직 나사렛에서만 거의 30년을 사셨습니다. 마을 사람이라고 해봐야 몇 백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만 30년이니, 이건 뭐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익숙해도 너무 익숙한 겁니다. 예수님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그때부터, 얼굴에 수염과 여드름이 나던 사춘기 시절을 지나서, 공부를 포기하고 목수 일을 하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장 노릇을 하던 청년 예수의 모습까지, 그들에게 예수는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도저히 어떤 존경이나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늘 봐 왔기 때문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는 처음부터 새 포도주일 수 없었습니다. 그냥 흔하고 뻔한 포도주,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포도주, ‘마리아의 아들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헌 부대는 예수를 만나 터져버렸고, 귀한 새 포도주는 땅에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익숙함에 매여서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익숙하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에 모르기가 더 쉽습니다. 익숙하면 핵심을 이해하려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핵심적인 것을 놓친 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의 것에만 시선이 머물게 만드는 함정, 그것이 익숙함입니다. 거기서 편견과 착각이 시작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주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마리아이며, 그의 직업은 목수였으며, 그의 형제가 누구누구였는지 다 알고 있다고 자랑하듯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예수 그 자체를 알지는 못합니다. 진짜 예수를 알려면, 그 주변이 아니라, 지금 예수가 전하는 메시지와 그의 삶과 그의 권능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와 상관해야 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아닌, 예수 주변을 이해하는 데 그쳤고, 그것이 마치 예수를 아는 것인 양 착각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사렛 사람들과 같이, 그저 예수의 주변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에 예수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과거의 예수’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과 예수를 아는 건 다릅니다. … 바로 지금 여러분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 이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 온전히 주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려 하십니까? 혹시 익숙함에 취해 우리도 진짜 예수에는 무관심하고 또 배척하지는 않습니까?
익숙함이 모욕을 낳는다는 유명한 유대인 속담이 있습니다. 익숙하고 편하다고 생각하면 상대를 존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쉽게 배척하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중요한 죄성이기도 합니다. 가까우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가까운, 그래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귀히 여기지 못합니다. 인간이 행복하지 못하고, 늘 허무한 삶을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익숙한 관계를 무시하기 때문이지요.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그건 무시하고 늘 멀리서만 찾아 헤매기에, 인간은 늘 행복보다 불행에 가깝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가깝고 가장 편한 사람이 실은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줍니다. 가족이 원수이지, 세상이, 낯선 사람이 원수가 아닙니다. 나를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들,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나를 모욕합니다. 무시합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믿음의 공동체가 붕괴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편하니까 함부로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익숙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익숙함이 그에 대한 모욕을 낳습니다. 요즘 묵상하는 에스겔 말씀에 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익숙해진 이스라엘, 친밀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익숙해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무시당한 하나님의 아픔과 분노가 에스겔서에 가득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제 말씀에 보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뭔가 질문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조차도 이젠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그걸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신답니다. 더는 이스라엘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익숙함에 취해 하나님을 모욕하는 걸 더는 참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를 이렇게 배척하지 않습니다. 좋은 분으로, 선한 분으로, 만나기 어려운 귀한 분으로 존중하고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에 익숙한 사람들, 예수를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예수의 가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예수를 함부로 대합니다. 성경 이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메시아는 자기 백성,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환대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이 예배도, 정말 예배(禮拜)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는, 그런 예배여야 합니다. 사람이 편하고 좋은 게 예배가 아닙니다.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몸과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조심스럽고, 조금은 신경을 쓰게 되는 그런 예배여야 합니다. 친밀한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편한 대로, 내 멋대로, 내 좋은 대로 예배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하는 그 흔한 예의와 배려도 없이, 하나님께는 무례히 예배하기 일쑤인데, 그러면 안 됩니다.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깝고 익숙하면 우리는 함부로 하게 됩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의 성도들 서로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시간 너무 익숙하고 편해져서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잊습니다. 어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상대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고, 함부로 정죄하고 함부로 ‘뒷담화’합니다.
이미 익숙하기에 상대방을 진지하게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이런저런 정보만 갖춰지면, 우리는 그를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정한 그 틀 안에서 그를 이해해버립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익숙함에 속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서로를 잘 알고 있습니까? … 잠깐 옆에 계신 서로를 한 번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로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의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사는 곳, 뭐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 어디서 공부했고, 뭘 전공했는지 정도를 아는데 그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지금의 그 사람이 맞습니까?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꿈과 고민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잘 모르시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적어도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레짐작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기 전까지는, 결코 여러분의 마음에서 서로에 대해 결론내리지 마십시오. 서로에 대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만 있고, 기억하고만 있어도, 우리는 서로를 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고후 4:16). “renewed day by day”,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나 자신을 보면 때로 아닌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을 신뢰하십시다. 날마다 더욱 새로워지고 있는, 서로의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나사렛 사람들은 낯선 주님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과 권능이 어디서 왔는지를 스스로 묻고는, 답도 스스로 결정해버립니다. 하다못해 주님께 직접 그 근거를 묻지도 않습니다. 익숙함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르는데도 묻지 않고, 스스로 답을 정하게 만듭니다. 그런 관계는 결국 배척을 낳습니다. 어떤 하나님나라의 능력도 임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장 편하고 쉬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귀히 여기십시오. 거기서 하나님나라를 발견하실 것이고,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익숙함의 덫에 걸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넘어지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나는 늘 잘 모른다는 것을 아는, 가장 고귀한 지식을 항상 품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서 설교를 갈무리하겠습니다. … 여러분 주님은 이번 나사렛 여정을 주님의 첫 번째 사역 챕터의 마지막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굳이 이런 여정을 선택하셨을까요? 사람도 별로 없고, 주님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주님은 아마 어느 정도는, 고향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을 겁니다. 마리아와 그 가족과 친족들이 가버나움에 계신 주님께 찾아와서, 주님을 미쳤다 하며 붙들려 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본문만큼의 배척까지는 아니어도, 그렇다고 엄청난 환대를 예상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제자들까지 다 이끌고 굳이 그 나사렛에 가셨겠습니까?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전 꼭 주시고픈 메시지가 있었던 것일 겁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때,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아래 모든 아이들을 다 죽이라 명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결국 애굽으로 야반도주를 감행하게 되지요. 헤롯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꿈에 요셉에게 말씀합니다. 헤롯이 죽었으니 이제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요셉은 여전히 무서워했지만, 하나님은 계속된 꿈을 통해 결국 요셉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때 하나님께서 요셉의 가정을 인도하신 곳이 바로, 나사렛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마 2:23) 네,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면서, 결국 ‘나사렛 사람’이라는 매우 비하적인 꼬리표를 달게 되신 그 모든 과정이, 실은 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주님이 나사렛에서 살게 되고, 또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미리 정해진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인지를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이 다시 나사렛으로 향하신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나사렛 예수’였고, 또한 온전히 ‘나사렛 예수’여야만 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처음 그를 보자마자, 그의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참 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바돌로매’가 그의 또 다른 이름). 제자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나다나엘에게 증언했고, 그래서 그도 주님을 따르게 됐습니다. 그런데 처음엔 나다나엘이 주님을 무시했습니다. 배척합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네,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릴 뻔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마음에 거짓됨이 전혀 없던 나다나엘조차도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단정한 것입니다.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겁니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여리고도 아니고, 하다못해 세겜이나 가버나움도 아닌, 나사렛이라니, 그런 곳에 메시아가 계시고,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빌립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중요한 건 정작 나사렛 사람들조차도 ‘나사렛 예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우리 동네지만, 아무리 내가 사는 곳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곳에서 …, 하나님나라가 여기서 …, 그럴 수는 없다고 그들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대단한 자기 비하이지요. 또한 강한 자기 욕망의 투사이기도 합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면, 나처럼 약하고 무명한 자로, 별 볼 일 없는 모습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기고, 그렇게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그들은 예수를 일컬어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 부릅니다. 아버지도 없는 가난한 마리아의 아들, 또 목수에 불과했던 예수, 그런 ‘마리아의 아들 목수’는 절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주님이 세례요한처럼 번듯한 제사장 출신의, 나름 뼈대 있는 가문이나 유력한 집안 출신이었다면, 만약 주님이 가말리엘 문하에 로마 시민권까지 가진 사도 바울처럼 좋은 집안과 학벌의 배경이 있었다면, 그렇게 나사렛 사람들이 함부로 주님을 배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그 정반대의 선택을 하십니다. 가장 이름 없는 땅에,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 볼품없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낮아도 너무나 낮게, 천해도 너무나 천하게, 예수의 오심이 그러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그는 …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예쁜 꽃도 아니고, 화려한 백향목도 아니었습니다. 곱지도 않고 풍채도 없습니다. 그냥 흔해 빠진 풀이나 뿌리였습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몸엔 질병이 가득했습니다. 남의 아픔은 잘도 고치는데 자신의 질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그에게서 얼굴을 돌려버렸습니다. 그것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낮은 모습이 다름 아닌 주님의 성품이라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설명되어 있지요. 그 근본이 하나님과 같지만, 하나님과 같은 위치, 같은 권세를 가지나,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가 되는 것, 그래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사렛 사람이 되셨으며, 오늘 또 다시 나사렛으로 향하시고, 그곳에서 한 호흡의 사역을 마무리하십니다. 당신이 ‘나사렛 예수’임을 드러내시고, 확인하시며, 스스로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구원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지, 그때 세상의 반응은 어떠한지, 주님은 그곳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또 제자들을 가르쳐 일깨우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나사렛 예수’를 믿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며, 그 나사렛 예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음을, 나사렛 사람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넉넉히 이루어짐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섬김으로, 내려감으로, 우리의 존귀함을 확증합니다. 나사렛 출신인 것을 감추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약함이 곧 하나님의 강함임을 신뢰하며, 우리는 내 약함을 자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네, 날 수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다름 아닌 그 나사렛에서만 진정 선한 것이 나옵니다.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세상이 하나님나라입니다. 나사렛 출신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낮아짐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마땅히 가질 수 있는 권세와 권리조차 기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공동체입니다. 오직 나사렛에서만 하나님나라가 시작됨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 시간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신 나사렛 예수를 믿는 온전한 믿음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높아지고 잘 되어야만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겸손한 마음, 종 된 삶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다. 스스로 높아지려 할 때마다, 세상의 관점에 익숙해지려 할 때마다, 우리의 주님이 ‘나사렛 예수’임을 기억하십시다.
익숙한 관계에서 오는 무지와 편견을 성령의 빛으로 불태워주시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온전한 지식에 이르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서로를 더 존귀하게 여기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는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