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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2019년 7월 28일 주일 설교

2019-07-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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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오순절 후 일곱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5:35~43,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24) 본문 36절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딸,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인을 치유하시고, 또 그의 삶 전부를 구원하시던 바로 그 시각, 다른 어린 딸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35절 말씀처럼,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구원의 좋은 소식, 복음이 한참 선포되던 그때 전해진, 너무나 나쁜 소식(禍音), 너무나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그 소식을 들고 온 사람들은, 이제 다 끝났다고, 더는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었을 회당장 야이로를 생각하면, 참 뭐라 말할 수 없는 아린 감정이 북받쳐 올라옵니다. 슬픔도 슬픔이지만, 그 마음 속 안타까움이란, 정말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아빠, 그래서 체면이고 뭐고 다 제쳐놓고 예수 앞에 엎드려 간구했던 아빠였기에, 그 아픈 마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서럽고 억울하고, 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허탈감도 느꼈겠지요. 주님이 그 여인을 치료하시지만 않았어도, 치료까지야 그렇다쳐도, 능력이 나갔네, 딸이 어쩌고저쩌고 …, 그렇게 여인과 말을 길게 섞지만 않으셨어도, 분명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그 시간이 정말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속된 말로,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저 같았으면, 뭐라도 어떻게 했겠다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께 뭐라 하기는 좀 어렵고, 하다못해 옆에 있는 베드로의 멱살이라도 잡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순서만 제대로 지켜졌어도, 딸은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건 아니지만, 이건 명백한 새치기입니다. 하다못해 식당에서 자장면 한 그릇만 순서대로 나오지 않아도, 이게 무슨 일인가 두리번거리고, 구청이나 경찰서에 가서 넣은 민원이 그 순서 하나만 바뀌어 처리되어도 흥분하게 되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딸의 생명이 달린 일에 있어서 그 순서가 틀어졌고, 결국 딸이 죽어 모든 게 끝나버렸으니, 이건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야이로는 정말 긴 시간 동안,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셨던 주님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 타신 배가 다시 이쪽으로 건너오자마자 곧장 그가 주님 앞에 제일 먼저 달려가 엎드렸습니다. 보나마나 주님이 거라사로 가신 후 계속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든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나, 곧바로 모시고 가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어떤 여인 하나가 중간에 끼어 든 것입니다. 분명히 지금 내 차례인데, 주님이 당장 우리 집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그녀가 끼어들었고, 주님은 너무 많은 시간을 그녀에게 할애하셨습니다. 허비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고작 몇 시간 치료가 늦어진다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는 분명히 딸의 상태를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내 딸이 죽어가고 있다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위급한 상황임을 처음부터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되었다는 건, 정말 일의 우선순위도 모르는 말도 안 되는 처사입니다. 저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런데 곁에서 이 소식을 듣고 계셨던 주님께서, 북받쳐 오르는 슬픔과 고통에 잠겨 있던 이 야이로를 향해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곱씹어볼수록 이 또한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야이로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주님의 이 말씀이 그대로 대변해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슬퍼하지 말라’거나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거나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가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 여러분, 두려움은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느껴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나쁜 일이든 간에, 어쨌든 실제로 그것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다 끝나버리면, 사람은 허탈해져서 오히려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 죽으면,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나 슬픔이 그 두려움을 삼킵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뭔가 남아 있기에,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기에, 다 내려놓지 못했기에 느끼는 감정이 바로 두려움인 것입니다. 다윗이 장수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심히 아파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며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기도하지요. 그러나 결국 일주일 만에 아이가 죽자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더는 두려워하지 않지요. 다시 밥을 먹고 기운을 차려 아내 밧세바를 위로합니다. 다 끝났기 때문입니다. 더는 할 수 있는 것도, 소망도 없기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고 두려움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야이로는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내려놓지 못했고, 주님을 향한 가녀린 마지막 믿음의 끈을 끝내 부여잡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를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 역시 지금 야이로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줍니다. … 사실 이 부분은 헬라어 명령형의 문법적 특성을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헬라어에는 특이하게도 누군가를 향해 명령할 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을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과거 (능동태) 명령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공부해라’는 명령을 표현한다고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직관과는 달리, ‘단순과거 능동태 명령법’을 사용하면, 문법 명칭은 ‘과거’라고 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바로 지금에 초점이 맞춰져서, 그냥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명령, 즉 ‘(지금) 공부해라’는 뜻을 가집니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공부를 안 하고 있을 때 이 명령형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공부를 안 하고 TV를 보고 있는 자녀에게 이제 그만 놀고 공부를 시작하라고 명령할 때, 그땐 ‘단순과거 능동태 명령법’을 사용합니다. 반면 ‘현재 능동태 명령법’을 사용하면, 의미가 좀 달라집니다. 앞에는 없던 ‘진행’의 의미, ‘연속’의 의미가 더해집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상태나 동작을 계속 유지하라는 뜻이 포함됩니다. 우리말로는 똑같이 ‘공부해라’지만, 이 경우엔, 지금까지 해 오던 것처럼, 그렇게 계속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해 오던 학생에게 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런 명령형은 거의 사용할 일이 없겠지요? ^^) 그럼 본문에 쓰인 ‘믿기만 하라’의 명령은 둘 중에 어떤 것이겠습니까? 네, 바로 이 후자의 명령, 곧 현재 능동태 명령법입니다. 그냥 단순히 ‘믿어라’, 즉 ‘믿음 없는 상태에서 믿음 있는 상태가 돼라’가 아니라, ‘계속 믿어라’(πίστευε)(continue/keep believing), 지금까지 네가 가지고 있었던 그 믿음을 계속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지금까지 주님을 믿어왔고,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믿음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그럼에도 그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습니다. 두려울 게 남아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이 말씀은, 그런 야이로의 믿음을 어떻게든 붙들어주려 하시는 말씀이며, 야이로를 향한 주님의 따뜻한 위로가 담긴 말씀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야이로의 딸은, 야이로가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9:18)에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첫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이로는 처음부터 죽은 딸을 다시 살려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다릅니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지, 딸이 이미 숨을 거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야이로가 주님께 와 있는 동안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이상하지요?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 두 사람의 기록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하고 하나는 죽었다 하니, 다수결로 하면 죽지 않은 것이 맞겠지만, … 결국 이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한편으로는 그만큼 이 소녀의 상태가 위독하여 죽음이 임박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경우이든 간에 야이로는 사실상 딸의 죽음을 이미 마음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이 야이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 집 안에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38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떠드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당연히 슬픔에 찬 소리, 곡소리를 의미합니다. …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습니다만,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장례식에서 가족 외에 전문적으로 곡을 하며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장례 기간이 길어서 상주와 가족이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교적 관습에 따라 곡의 종류와 예법이 각각 달랐기 때문에, 대곡제(代哭制)라고 해서, 돈을 받고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례식도 보통 일주일 간 계속됩니다. 그래서 그들도 전문적으로 곡하는 여성과 피리를 부는 자들을 함께 고용하여 장례를 치릅니다. 마태복음에, 주님이 그 집에 가셨을 때 피리 부는 자들을 보셨다고 기록된 것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마가복음에서처럼 이 딸이 아버지가 여기 와 있는 동간, 중간에 이렇게 죽었다고 한다면, 그 장례가 너무 급박하게 치러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가장인 아버지가 돌아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딸의 죽음을 아버지가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은 채, 소녀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리 부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곡을 시작했다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소녀의 상태가 워낙 위중해서 미리 조치를 취해 그들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하기야 그래도 개운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혹 다른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미 아이는 죽었지만, 야이로는 아직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부정하는 단계에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끝내 포기하지 못한 채, 한 가닥 소망을 품고 달려와 주님 앞에 엎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역시, 이제 막 딸이 죽어서가 아니라, 이미 죽은 딸인데, 이렇게 예수를 괴롭혀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의미일 것입니다. 야이로가 주님 앞에 엎드려 간구할 때 그런 말을 합니다. 23절에 보면,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아픈 딸을 치료해달라는 말치고는 조금 지나친 표현처럼도 느껴집니다. 어쩌면 야이로는 처음부터 아이가 치료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죽을 것을 거의 확신한 채, 그 이후의 일을 생각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야이로는 예수를 찾아왔고, 주님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금까지도 야이로는 여전히 믿음의 자리를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여전히 두렵습니다. 주님은 그런 야이로의 믿음을 곁에서 지켜주시려 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들이 비웃고 조롱하나, 그것 신경 쓰지 말고,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잃지 말라 권면하십니다. … 어떻게든 그 믿음을 부여잡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그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바로 오늘 본문에 짙게 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은 실상 믿음 없는 자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없는 믿음을 새롭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 그 믿음을 지켜온 자, 그러나 그 믿음이 여러 이유로 흔들리는 자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도 또한 그러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믿음 있는 자로서,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에 대한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상황 때문에, 어떤 가능성 때문에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 좀 그렇지만, 주님 때문에, 주님을 신뢰합니다. 상황이 어떻든, 가능성이 어떻든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주님 때문에,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롬 4:17)시기 때문에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보통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네, 그는 정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했습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면서 그는 믿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누구에 대한 믿음을 가진 겁니다. 어떤 상황이나 결과가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나를 사랑하사, 나를 복으로 세우실 것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의 시선이, 그의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가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상황이 주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조금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여전히 웃을 수 있고, 또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상황을 다스리고 계심이 분명히 느껴지고,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자체가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우리의 시선을 맞출 때, 그때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믿음의 방향, 시선의 방향이 그만큼 중요하지요. 어디를 보느냐, 거기서 믿음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본래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믿음 있는 만큼 두려움이 사라지며, 믿음 없는 곳을 두려움이 채웁니다. 사실 두려움은 비단 믿음만이 아니라, 다른 신앙의 모든 열매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믿음의 반대도 두려움이고, 사랑의 반대도 두려움이고, 소망의 반대도 두려움입니다.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 4:18)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랑과 두려움도 공존하지 못합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전이 없기 때문에 두렵고, 소망의 빈자리를 두려움이 채웁니다. 결국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 가장 심각한 적이자, 내 신앙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정확한 테스터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바라는 바로 그만큼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상황에 근거하여 어떤 믿음의 가능성을 쌓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만을 신뢰함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에게 모든 가능성을 맡기는 신앙으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 믿음 자체가 승리입니다. 그 믿음의 결과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음 그 자체로 승리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그분이 이미 세상을 이겼으며, 그가 우리의 모든 것을 합력하게 하사, 우리의 삶에 능히 선한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주님을 향한 그 신뢰가 약해지지 않기를 주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주님은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곳에 머물러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쉼 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처럼 지금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말로 인해, 그 있던 믿음이 조금씩 소멸되어 갈 때, 두려움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워갈 때, 주님이 곁에서 들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이 약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이로의 믿음이 보여주듯, 성도는 모든 것이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여겨질 때에도 성도는 거기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다시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라!”는 그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피조물이 이 땅에 없기 때문입니다. 숨을 거둔 소녀, 이미 죽은 소녀이지만, 주님께서 ‘달리다 굼’(Talitha, cumi) 하시니, 말씀에 반응하지 않습니까? 죽었으나 반응한단 말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 어린 소녀와 같은 모습이라서, 주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주님을 만질 수도 없는 모습이라면, 그땐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지며 말씀하실 겁니다. ‘달리다 굼’ 이 시간도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일으키시기를 원합니다. 본래 이 ‘달리다 굼’은 유대인들이 아침이 되면 자녀들을 깨울 때 조용히 그의 귓가에 대고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얘야, 그만 일어나자.” “일어나 밥 먹자.”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도 주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네, 정확히 그 상황인 겁니다. 자고 있는 자녀를 다독이며 깨워 준비한 아침을 먹으라고 이야기하는 엄마, 아빠의 따뜻한 소리가 바로 ‘달리다굼’입니다(우리나라처럼 깨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사그라들고, 그래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무기력한 삶이 이어질 때, 주님의 이 ‘달리다 굼’의 속삭임으로 저와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여러분 자신을 향해 스스로 말씀하십시오. ‘달리다굼!’이라고. 자,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달리다굼’ 해보십시오. 내가 소녀라고 생각하고, 물론 소녀는 아니지만, 그렇다 치고, ‘달리다 굼’ 혹은 그냥 ‘쿰’하면 됩니다. ‘너, 일어나’ 하는 말입니다(아람어, 헬라어로는 ‘아나스테미’). 여러분 자신을 향해 자주 선포하십시오. 무슨 소란을 떨며 큰 소리로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죽음을 다스리는 주님의 권능은, 그냥 나지막한 소리 한 마디면 족합니다. 말씀으로 선포하고, 다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저는 야이로의 이야기와 혈루병 여인의 이야기를 한 데 묶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나라의 모습이 어떠한가, 그 성격과 본질이 어떤 것인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은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살리면 저 사람을 잃습니다. 영화에서 자주 나오지요. 누굴 살릴 것이며, 누굴 잃을 것인가. 이 사람을 살리면 저 사람은 죽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선순위라는 말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다릅니다. 그와 같은 제로섬(zero-sum)이 아닙니다. ‘열두 해’ 앓았던 질병으로부터 한 여인이 먼저 나음을 얻었다면, 그로 인해 지체되어 죽어가는 이 소녀의 생명도 ‘열두 해’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여인도 구원을 받고, 소녀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들을 위한 주님의 권세와 통치는 충분하며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요 14:2)고 말씀합니다. 넉넉합니다. 남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동안 내게 들려 온 나쁜 소식은 결코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것도 복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남이 잘 되는 것이 내게 실패가 아닙니다. 또 남이 안 되는 것이 내게 기회가 되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좋습니다. 내 이웃에게 좋은 것이 나에게도 좋습니다. 남이 잘 되면 내가 망하고, 남이 합격하면 나는 떨어지는 세상이 아니라, 남이 잘 되면 나도 덩달아 잘 되는 세상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그 나라의 언어요, 그 나라의 삶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기도가 지체되는 것 같아도, 그리고 누군가의 기도에 새치기를 당한 것 같아도, 실제 그런 일이 생겨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달리다 굼’ 선포하십시오. 반드시 그 믿음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둘 다 살리고, 둘 다 복 되게 하시는 일, 세상은 어렵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주님 보시기에는 작은 일(왕하 3:18)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어떤 때에나, 넉넉하고, 너그러우며, 관용 있는 자가 되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의 관용을 알게 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들인지 보게 하십시오. 사촌이 땅을 샀을 때 배 아파 하지 않고 함께 박수치는, 가장 고결한 믿음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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