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출애굽기 강해 40. 십계명 #5
2019-07-1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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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710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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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장 12절, 에베소서 6장 1~4절, 십계명(열 마디 말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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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다섯 번째 계명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인데요, 바울 사도께서 강조하신 대로(엡 6:2, …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여기에는 약속이 더해져 있지요? 이 말씀대로 하면 어떤 축복이 있다, 즉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복 된 약속이 함께 주어진 처음이자 유일한 계명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부모님 잘 공경하고 계시지요? 이처럼 축복의 약속이 있는 말씀이지만, 사실 이 또한 참 어려운 계명인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다.”라고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족은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가장 사랑하기 힘든 대상이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전하기에 너무나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설교자에게 성경 어느 구절 하나 좀 덜 부끄러운 말씀이 없지만, 특히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말씀 앞에서는 참 감추기 어려운 민망함이 있습니다. 목사라는 핑계로 홀로 계신 어머니를 향해 항상 ‘고르반’, ‘고르반’ 거리며 스스로 만든 면죄부만 쌓는 상황인지라 …,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제 안에서는 “너나 잘해라. 너나!”하는 말이 계속 들렸고, 말씀을 두고 기도하면서도 잘못한 일들이 얼마나 생각이 나는지 …, 지금도 여러분 앞에 참 죄송한 마음으로 서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오늘은 설교가 좀 짧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난주에 제 이종사촌(조 집사님)이 수요예배에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렸었는데요, 저는 그 친구가 지난주에 왔다가 가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분이 저희 가족, 친지 안에서도 부모와 어른들에게 잘 하기로 칭찬이 자자하거든요. 그분께는 고모가 되시는 저희 어머니께도, 아마 저보다도 더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오셨으면, 제가 말씀을 전하면서 면이 더 안 설 뻔 했는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은 저보다 훨씬 더 잘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지난주 수요예배를 마치면서, 은영 자매께서 그날 제가 입은 셔츠가 예쁘다고 칭찬을 해 주셨는데요, 그러고는 하는 말이, 그 셔츠 어디서 샀느냐고, 아빠에게 사 드려야겠다고 이야기 하는 걸 들었습니다. 예배 마치고도 그게 제게는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거의 그런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누가 예쁜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아, 저거 우리 어머니 입으시면 좋겠다.’ 그리 생각한 적이 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딱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여기 서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게 돼서 참 송구합니다만, 저는 저고,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선 이 계명에서 우리가 생각해야봐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라는 표현대신 ‘공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것에 대한 이 계명의 핵심은, 어떤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태도와 의지, 그리고 행동의 차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완성된 감정이나 하나의 기준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노력의 방향과 의지를 요구하십니다.
‘공경하다’라고 옮겨진 이 단어는, ‘(하나님을) 경외하다’라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카베드’(→ 영광, ‘카보드’)입니다. 원래의 의미는 ‘무겁게 여기다’라는 뜻이지요. 부모의 존재와 말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 부모를 공경함의 본래 의미입니다.
성경에 이 ‘카베드’가 명령형으로 나오는 경우는 단 두 가지 경우뿐입니다. 한 가지 경우는 하나님께(잠 3:9, 사 24:15),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부모에게(출 20:12, 신 5:16) 행하도록,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단어만 보더라도, 성경이 얼마나 부모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는지, 그리고 그 권위의 근거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심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부모를 공경하는 이 두 계명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지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부모를 온전히 공경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공경의 대상은 다름 아닌 ‘네 부모’입니다. 그 부모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신앙이며, 어떤 인격인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네 부모’라는 유일한 조건이 있을 따름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분들이 네 부모이기에 공경하라고, 그러면 네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단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경외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것처럼, 부모는 오직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공경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의 출발점이 어디일까요? 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도 그렇듯, 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무겁게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부모의 말을 무겁게 여깁니다. 그리고 부모의 말을 무겁게 여기는 것은 그 말을 잘 ‘듣는 것’, 곧 경청에서 시작됨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남의 말을 잘 경청하자는 말도 많이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훈련하기도 하는데요, 정작 가정에서, 또 부모님께는 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냥 가볍게 무시하거나 논쟁으로 이기려 하는 경우가 더 많지요.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다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라는 책이 있는데, 내용에 보면, “죽어가는 사람을 돌볼 때 에너지의 절반은 경청하는 데 써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부모야말로 실상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경청에 에너지의 절반을 써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습니다. 비록 자녀들 입장에서는 지루하고 답답할지라도, 먼저 귀 기울여 듣는 것, 또한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것에서 부모 공경이 시작됨을, 잘 듣는 것, 그것이 효도의 출발임을 기억하십시다.
사실 우리가 이 계명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순종하려고 애쓰는 나이가 되면, 이미 부모님은 정말 자녀가 노력해야만 경청할 수 있고, 공경할 수 있는 그런 연세가 됩니다. 하신 말씀을 계속 반복하시기도 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말씀을 하실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계명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이미 장성하여 청년, 또 장년이 된 어른들에게 더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도 그렇습니다만, 부모는 대단히 갑작스럽고 또한 급격한 속도로 그 권위를 잃어갑니다. 그때의 부모는 본래 가졌던 권위와 힘과 경제적 능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권위를 세우거나 주장하기 힘든 노년의 부모를 향하여, 이미 장성하여 권위를 가지기 시작한 내 입장에서 도저히 존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나이든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 자주, 그리고 아주 강한 명령으로 등장합니다. 늙은 부모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명령(잠 23:22), 나이든 부모를 치는 자를 죽이라는 명령(출 21:15),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는 명령(출 21:17), 부모의 것을 착취하고 도둑질하는 것에 대한 심판(잠 28:24), 나이든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것에 대한 심판(잠 19:26)과 부모를 조롱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식은 그 눈을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저주의 말씀(잠 30:17)까지, 권위를 잃어가는 부모에 대한 공경을 성경은 계속 강조합니다.
주일 설교 시간에 잠깐 언급했던 이어령 박사가 쓴 어떤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치매기가 있는 아버지가 툇마루에 앉아서 마당에 앉은 까치를 바라보며, 장성한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얘야, 저 새 무슨 새냐?” 시큰둥하게 아들은 대답합니다. “까치요.” “그래, 까치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잠시 후에 다시 물어봅니다. “얘야, 저 새 무슨 새냐?” “까치라니까요.” 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시더니 또 같은 말을 하십니다. “얘야, 저 새 무슨 새라고 했지?” “몇 번이나 대답해야 아시겠어요! 까치요, 까치라고요.” 그때 옆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합니다. “아범아, 너는 어렸을 때 저게 무슨 새냐 하고 백 번도 더 물었다. …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까치란다, 까치란다.’ 몇 번이고 대답하시면서, 말하는 네가 귀여워서 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던 게다.” 네, 그 사랑의 인내로 오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늙은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과 연관하여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무척 두려운 말씀인데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실제로 이와 같은 일이 시행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하지요. 자기 자식을 성문까지 끌고 가 장로에게 고발할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네, 우리는 훗날 내 자식을 낳아 길러봐야 그제야 비로소 부모가 어떤 사랑으로 나를 키웠는지를 헤아리게 됩니다. 참, 사람만큼 기르고 돌보기 어려운 존재도 세상에 또 없습니다. 다른 짐승들은 그냥 낳자마자 일어서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몇 시간 지나면 뛰어도 다니고 그러는데, 우리 인간은 너무나 연약하여 오랜 시간 부모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연로한 부모 역시 오랜 시간 자녀의 공경을 필요로 하지요.)
제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최근에 아들을 낳았는데,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엄마가 화장실을 갈 때도 아이를 안고 가서 볼 일을 봐야 한답니다. 그 긴 인내와 수고로 우리가 지금 여기 이만큼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차마 다 그 사랑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살아갑니다. 네, 그 부모가 이제는 너무나 빠르게 그런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늙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모를 공경하라 말씀하시고, 거기 일종의 조건이자 약속을 달아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잘 못 지킬 것을 아시는 하나님, 또 이 순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의지와 노력을 행하도록 일종의 유인책이자 격려의 말씀을 주신 것인데요,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전달자요 보존자인 부모, 그리고 땅과 기업을 물려준 부모에 대한 공경은 당연히 부모에게 맡겨진 그 생명과 기업의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약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니까, 내 삶의 기업에 있어서 안전과 평강을 동시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3)고 기록합니다. 쉽게 말해서 형통함과 복(공동번역)에 대한 명확한 약속이 있는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인물 중에서 효자, 그러면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딱 떠오르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는데요,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살 때, 부모에게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기록합니다(2:51). ‘순종하여 받들다’가 바로 ‘공경’이지요. 또 주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그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도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를 끝까지 공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준으로 삼기에 너무 높으니, 예수님 외의 인물 중에서는, 제 개인적으로는, 이삭이 떠오릅니다. 대표적으로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번제로 바치려 할 때의 순종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연로한 아버지의 계획과 생각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힘으로 아버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그는 칼을 쥔 아버지의 손이 자신을 향하여 내려오기 직전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당연히 그날만 특별히 순종한 건 아닐 겁니다. 일상이 그러했기에, 그처럼 긴박한 상황에서도 늙은 아비를 공경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삭은 일평생 부와 평강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두 아들과의 관계가 모두 원만하지는 못하여 아예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는 어디를 가나 하나님께서 형통함으로 복 주셨고, 성경은 그가 마침내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창 26:13). ‘거부’라는 말 자체가 오직 이삭에게만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약속하신 것처럼, 이삭은 평안히 장수합니다. 아버지보다, 아들, 손자보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이 이삭입니다(180세). 이삭 이후에는 그만큼 장수한 사람이 없고, 그 수명이 급격히 감소합니다(아브라함 175, 이삭 180, 야곱 147, 요셉 110). 참 놀랍습니다.
게다가 여호와가 준 땅에서 쫓겨나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은 유일한 족장이 바로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그리고 요셉은 다시 애굽으로, 여호와가 준 땅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지만, 이삭은 아니었습니다. 대기근이 찾아왔을 때에도 이삭은 기어이 가나안 땅을 벗어나지 않게 되지요. (반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야곱의 삶은 온통 고생길이었음도 기억합니다). 결코 우연일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의 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평안한 노후를 준비하는 최고의 방법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식을 바라보며 내 노후를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반대로 가야 합니다. 자식이 내 노후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부모가, 내가 잘 공경한 부모가 내 노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자녀 사랑해서 복 받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나쳐서 문제일 정도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가 이르면 나타날 일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한다 말씀합니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일 같은 건 말세에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결코 쉽지 않지만, 따로 약속까지 주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격려하시니, 부디 주님의 이 약속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삭의 순종에 관하여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삭은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공경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6:1) 말씀하는 것처럼, 이삭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한 것이지 단지 인간적인 도리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학대 앞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일입니다. 이삭은 1~4계명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사랑하는 신앙 안에서 부모를 섬긴 것입니다.
효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권의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부모의 장례나 제사와 관련하여 오해가 많았었는데요, 당시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장로교신학교이자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신학교의 전신인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이야기인데요, 하루는 어떤 조선 사람 하나가 그에게 묻더랍니다.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는 것이 옳은가?” “옳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마(펫) 목사도 부모가 계시며 효도하는가?” “나도 부모가 있으며 공경하는 마음이 많다.” “그럼, 왜 부모를 버리고 여기 만리타국에 와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효도인가?” “형제여, 부모의 말을 순종하는 것이 효도요, 불순종하는 것이 효도요?” “당연히 순종이 효도요.” “그렇소. 우리 부모님께서 나더러 ‘조선에 가서 주를 전하라.’ 하시었소.” … 부모의 신앙이 온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막힘이 없다면 이처럼 주 안에서 순종하면 됩니다.
하지만, 부모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의 신앙과 상황 등이 여러 가지로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확신이 들 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선순위를 잘 지켜내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아들은, 평소 자신은 앞으로 절대 아버지의 교회를 물려받을 일이 없을 거라고, 세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자신은 변칙과 술수를 쓰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만, 결국 아버지의 권고에 의해 교단 헌법도 무시한 채 부자세습을 감행합니다. 자녀 된 도리는 다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모를 공경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부모를 위한 기도입니다. 부모의 건강과 필요를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부모의 신앙과 삶을 위한 기도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신앙에서 벗어난 일들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 안에서,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이 클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하고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평생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상처 가운데 아파하며, 괴로워합니다. 때론 그 상처를 다시 내 자녀에게 되물림 하기도 합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똑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 계명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이기까지 사랑한 하나님을 이젠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그 사랑 안에서 부모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참으로 그 사랑 안에 우리가 거한다면, 우리는 내 육신의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 ‘나는 정말 복도, 운도 없어.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났어.’ 하는 그런 마음과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가 내 아버지이신데, 부족함이 없는데, 그것이 정말 믿어지고 누려진다면 왜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겠습니까? 아버지 이새에 의해 없는 사람, 없는 자식 취급을 당했던 다윗이 그것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던 건, 여호와가 내 아버지이시기에 부족함 없다는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에게 그런 상처와 아픔이 있다면, 내 부모를 탓하는 원망의 마음이 있다면, 이 시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그것들을 못 박고 자유함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면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다섯 번째 계명은, 앞의 네 계명과 뒤의 다섯 계명을 연결하는 하나의 링크와도 같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부모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있습니다. 1~4계명에만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6~10계명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요, 오직 5계명에서만 계명에 뒤따르는 축복의 구절에서 한 번 더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연결고리가 바로 부모 공경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훈련을 통해 이웃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부모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부모와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이 가정에서 정상적으로 습득되지 않으면 그 다음의 사회에서 인간 존중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부모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겠지요. 부모를 잘 공경함으로 복 되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꼭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어떠한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도 바로 부모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나를 낳아준 부모를 섬기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어불성설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연결고리의 말씀을 통해서 삶과 신앙의 중심을 잘 잡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결코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따로 약속까지 주시며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는 축복의 약속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힘껏 공경하시기를, 그래서 주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서 잘 되고 강건하여 오래 오래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