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부정한 입술의 탄식" 2014년 4월 24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4-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424 목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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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장 1~7절, 이사야 강해 52 부정한 입술의 탄식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a3ypbbyjce/20140424_.html
이사야서 쉰두 번째 말씀으로, ‘부정한 입술의 탄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비록 이사야서 6장에 가서야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는, 이른바 이사야의 소명을 기록하는 말씀입니다. 통상 예언자의 부르심이 해당 예언서의 가장 처음 부분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이사야의 경우는 이렇게 6장에 가서야 등장하는 것,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소명에 관하여 이사야서가 가지는 이례적인 특성은 비단 이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지만, 실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지목하여 불러서 예언자로 삼으시는 직접적인 언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 이하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메신저로 보내야 하느냐고 자문하실 때, 이사야가 그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매우 독특한 구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특수성은 단지 그 형식이나 내용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이사야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은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자체를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의를 요구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의 부르심은 이사야 1장이 아닌 6장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리고 앞의 1장에서 5장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교훈을 멸시한 유대 백성들의 모습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 탄식한 본문 5절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본문 5절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아멘.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고백, 그 첫 마디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하나인데, 거룩한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본문 1절에서 4절까지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거룩함과 광대함 그 자체입니다. 잠깐 그 모습을 살펴보면, 먼저 1절에서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보좌, 그리고 거기 앉으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의미합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바로 그 통치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옷자락이 이 땅 성전에까지 가득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관념을 벗어납니다. 유대인들은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고 여겼지만, 오늘 이사야가 본 하나님의 모습은, 그저 당신의 옷자락만으로도 성전 전체를 가득 채우는, 위엄 그 자체입니다. 2절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인 스랍의 모습과 외침이 기록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놀라고 두려워하며 자신의 신체를 가린 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처럼 형용사가 세 번 반복되는 것은, 히브리어의 문법적 특징 상, 최상급의 표현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 노래의 소리가 얼마나 크고 강했는지, 그 소리로 말미암아 성전의 터가 요동하고 그 안에 연기가 충만했다고 본문 4절은 계속해서 기록합니다.
이처럼 이사야가 바라 본 하나님의 임재는 거룩함 그 자체였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장면을 상상해 보게 되었는데요, 아마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도 이사야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 인간은 한없는 자기 비하에 직면하게 됩니다. 감히 그분의 임재 앞에 나설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말씀을 대언하는 이사야의 모습이 이러하건대, 우리와 같은 평범하고 연약한 존재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망했다’는 이사야의 탄식이 결코 과장이 아니겠지요.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바로 그와 같은 절망을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스랍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이름을 외쳐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감히 그렇게 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의 온 존재가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며, 입술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외칠 수조차 없는 부정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망하였다’는 탄식뿐임을 오늘 이사야는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곤 합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의미하는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영, 성령이 내 안에 그 거룩한 옷자락을 드리운 채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가벼이 여깁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조금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본다면,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우리를 죽고 난 후 어디 좋은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부르기는커녕, 하나님의 임재 앞에 ‘망했노라’고 탄식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우리의 이 더럽고 부정한 마음과 삶 속에 임마누엘,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신 참 구원이 바로 예수의 죽으심이 가져온 엄청난 결과였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놓인 인간의 절망이 얼마나 본질적이며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지, 오늘 이사야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정함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지도 못합니다. “주님,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저를 고쳐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 앞에 그저 탄식하며 숨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실존, 저와 여러분의 모습임을 오늘 이사야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부정한 백성과 이사야를 어떻게 하실지 그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롬5:8)처럼, 오늘 아직 부정한 이사야를 하나님께서는 친히 정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던 스랍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거룩한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사 사하여졌느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행위를 통해 오늘 이사야는 부정한 모습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회복됩니다.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친히 이루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주권으로 창기와 같은 더러움이 제하여지고,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새로워집니다. 이제 이사야는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 앞에 나아갈 용기를 얻었고,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대면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뿌려지고 적셔져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사야의 전격적인 회복은 저와 여러분은 물론, 오늘 하나님 앞에 범죄한 채 무너지고 있는 유대 백성들을 향한 회복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사야를 회복케 하시고 부르시는 이 장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는 유대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우하실 것이며, 어떻게 회복시키실 지를 친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사야가 부정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전하는 자로 새롭게 부르심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 백성들도 다시 하나님의 복이 되어 온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을 오늘 하나님은 보여주고 계십니다. 죄 가운데 죽어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성령을 부으사 복음을 증언하게 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롭게 된 이사야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결코 과거의 이사야가 아니며, 그의 입술은 이제 더 이상 더럽고 허무한 소리를 발하는 부정한 입술이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대언되어야 하며, 마른 뼈들을 소생케 하는 복음이 담겨야 하는 거룩한 입술입니다. 거짓과 기만의 이야기가 그치고 진리와 진실을 전하는 입술이어야 합니다. 비난과 미움의 소리가 아닌, 위로와 용서의 소리가 거기 담겨야만 합니다. 저주와 절망이 아닌 축복과 소망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 입술은 더 이상의 이사야의 입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 그 거룩한 제단의 입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저와 여러분의 입술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찌 스랍이 가져 온 제단의 숯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비하겠습니까? 그분의 보혈은 이미 우리의 모든 존재를 정결케 하였고,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성대와 우리의 온 몸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입술도 이제 더 이상 죽음과 저주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거룩한 그 이름을 전하는 입술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거짓과 기만과 비난과 미움과 저주와 절망이 나오면 안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전해져야 하는 거룩한 입술이며, 복음 안에 있는 모든 진리와 진실과 위로와 용서와 축복과 소망이 담겨야 하는 아름다운 입술이어야만 합니다. 다시 사탄의 노리개가 되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성령의 도구로만,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복음의 나팔이 되게 하십시오. 세상의 악한 영들과 사탄을 대적하고 깨뜨리는 성령의 메시지를 담으십시오. 여러분은 거룩하여졌고, 이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며 탄식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부디 그 부르심의 말씀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화답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입술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지,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부디 우리의 거룩한 입술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데 사용되는 복 된 입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