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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8. 십계명 #3
2019-06-2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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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626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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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장 7절, 십계명(열 마디 말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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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습 먼저 하면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제2계명,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 오늘 제3계명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입니다. 7절, 단 한 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똑같은 내용의 두 번 반복을 통해 그 엄중함이 강조됩니다.
아울러 앞의 제1, 2계명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나와 너의 1인칭, 2인칭으로 표기함으로써, 그 친밀한 관계가 드러났던 것과는 달리 이번 제3계명에서는, ‘나의 이름’ 대신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이라고 해서, 일부러 여호와의 이름을 객관화시켜 주제로 삼습니다. 7절 뒷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이 주어가 아니라, ‘여호와는’이 주어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충분한 거리감과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의 뜻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 ‘망령되게’ 그 이름을 부를까요? 사전에서 ‘망령되다’를 찾으면,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데가 있다.’로 나옵니다. ‘노망나다’라는 말이 생각나지요. 분명히 성경에서와는 의미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 자체가 기독교적으로 한 번 변화를 겪은 셈입니다.
“망령되게 부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해석으로는, “헛되이[라샤베] 들어 올리다.”입니다(‘어디 그 더러운 입에, 그 이름을 올려!’와 같이).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나쁜 목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 이전에, 의미 없이, 목적 없이, 이유 없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KJV나 NASB와 같은 영어 성경이(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thy God in vain), 그리고 공동번역과 새번역 같은 한글 성경이(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같은 관점에서 번역했습니다.
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출발점은, 그 이름을 가려서, 구별하여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의미 없이 부르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서, 또 믿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자리에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이름은 단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하나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를 대신하는,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지요. 하나님의 역사와 성품과 신격이 모두 담겨 있는 이름이 ‘여호와’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미국에서는 감탄사 비슷하게 “Oh, my God!” “Oh, my Jesus!” “Jesus Christ!”라고 많이 하는데, 우리도 ‘아이고, 주여!’라고 많이 이야기합니다만, 정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거라면 몰라도, 아무 때나 습관적으로 남용하는 것은 분명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영어에서도 그런 표현 대신, “Oh my goodness.”나 “Oh my gosh.”처럼 다르게 말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합니다.
또 조금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무 때나 ‘할렐루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게임 같은 걸 하다가 장난삼아 ‘할렐루야!’를 외친다든가, 즐거움의 수단으로 삼는 식의 사용은 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할렐루야’라는 말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는 아시는 대로 “너희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찬양하다’라는 뜻의 동사 ‘할랄’에 ‘너희가 … 하라’는 의미의 ‘루’와 ‘야훼’곧 ‘여호와’를 뜻하는 ‘야’가 결합된 표현입니다. 의식하기 어렵지만,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무런 신앙적 고백도 없이 장난삼아 ‘할렐루야!’를 외친다든가, 정말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이런 말을 사용하는 건, 헛되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 비해서 이름에 더 큰 의미와 무게를 두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이것이 그리 낯설거나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름을 지을 때 한 자, 한 자, 의미를 담아서 짓게 됩니다. 제 이름 ‘준석’은 한자(漢字)로 ‘빛난(俊) 주석(錫)’이라는 뜻인데요,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묘사할 때, 특히 그 발의 모습을 가리켜 ‘빛난 주석’ 같다고 기록합니다. 이 이름을 지어주신 저희 백부께서 의도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아닐 겁니다. 집안의 항렬에 맞춰 ‘석’자 돌림이기에), 예수님의 발이 되어, 주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으니, 그 이름이 참 신기합니다.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우리는 부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않지요. 반드시 ‘자’를 붙여 부르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곤 합니다. ‘이름’이라는 말 대신, ‘성함’, ‘존함’이라는 높임말도 있습니다. 여기서의 이름은 단순히 그를 지칭하는 어떤 표현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담는 그릇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에 대한 의미부여에 있어서는 히브리인들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 또한 신앙적 의미와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인데요, 아담은 ‘흙’이라는 단어 ‘아다마’에서 왔지요. 그의 존재적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모세’ 역시 ‘건져 냄’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에서 그 존재가 형상화됩니다. 모세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하면, ‘건져 냄 받은 자가 건져내는 자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 역시 그 자체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의 삶과 정체성을 바꾸실 때, 그의 이름을 새로 지어주기도 하십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그 이름이 바뀌면서 모든 게 바뀝니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매우 강한 존재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의 태도입니다. 부모님의 이름을 늘 조심히 부르듯,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도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 사랑과 존경을 담아 부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무 때나 쉽게 부르는 그것이 마치 친밀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착각하곤 하는데, 오늘 말씀은 그러한 헛된 사용을 엄히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도 문제지만, 명백히 잘못된 방식으로 부르는 것도 성경이 금하는 것입니다.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이 표현을 NIV 같은 성경은 ‘misuse’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대표적인 경우가 욕설인데요, 이름을 중시하는 우리말에서보다는 영어에 상대적으로 그런 욕설이 더 많지요. “God damn!” 등의 예가 금방 떠오릅니다. 네,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우로, 이런 표현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들입니다(당연히 욕 자체를 안 하면 될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이름 안에 하나님의 존재가 담겨 있고, 더 나아가 이름 그 자체를 하나님의 존재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레위기에 보면(24:10~14), 이것이 문제가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스라엘 여인으로 단 지파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애굽 사람인 한 남자가 있었는데요, 아버지 애굽 사람은, 과거 애굽에서 살 때 이스라엘 여인과 결혼을 했고, 애굽을 나올 때 함께 나온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다문화 가정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상대방은 ‘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기록된 걸 보면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마 그 출신과 관련된 비하나 말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만, 어쨌든 그 싸움 중에, 그 애굽 아버지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며 상대방을 저주한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를 모세에게 끌고 갔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기를, “그 저주한 사람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손을 그의 머리에 얹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 하십니다. 보통 때에야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흥분하거나 하면 우리 역시 그럴 위험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가 평소 이 세 번째 계명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였을지,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혹시나 망령되게 그 이름을 부를까 염려하여, 아예 그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한 것처럼) 여호와를 여호와라 부르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훗날 ‘여호와’라는 말 대신 ‘나의 주’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부른 걸 아실 텐데요, 그래서 원래 그 이름이 ‘야훼’인지, ‘여호와’인지, ‘야웨’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또 성경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여호와’(הוהי)를 적을 때에는 가서 목욕도 새로 하고, 붓도 새로 빨아서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서 영어로 논문을 쓰거나 할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려 하면, ‘여호와’에 해당하는 ‘Yahweh’라 쓰지 않고, 유대인들이 쓰는 것처럼 자음으로만 된 ‘YHWH’(테트라그라마톤)라고 씁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거나 기록하지 않는 유대인 독자들의 거부감을 고려한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기 위해 그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는 것은, 본래 율법의 취지는 아닐 겁니다. 당연히 부르라고 주신 이름이며, 그 이름 안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며, 가능한 더 많이, 더 자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겁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의미 있게 불러줄 때, 그것이 얼마나 특별한 경험입니까? (성도들이 기도 인도할 때, 목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제 이름을 부를 때의 그 느낌, 참 강렬하고 좋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비로소 빛깔과 향기가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상대에게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을 바르고 온전하게 더 자주 부르시기 바랍니다.
욕설 외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함으로써 그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대표적인 경우 두 가지가 성경에 나오는데요, 한 가지는 거짓 맹세, 혹은 거짓 증언의 경우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이름을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9:12)는 말씀이 있습니다. 법정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뜻과 결백을 강조하기 위해 혹은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경우를 금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너의 주장과 결백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 자체를 금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마 5:34). 우회적으로 하나님과 연관된 것으로도 하지 말고, 자기 머리나 생명을 두고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다만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고만 이야기하라고, 그 이상의 말들은 모두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네, 내 의로움과 진실함을 강조하고 싶겠지만, 답답해도 좀 참으라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수단화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니 인내하고 기다리라 하십니다. 네, 여호와의 이름으로 뭔가 더 힘을 주고 싶을 때, 이 말씀 기억하셔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이름을 misuse하는 것은, 그 이름을 통해 능력을 얻고자 하는 미신적인 시도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 산 위에서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과 겨루며 말하지요.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 ”(왕상 18:24)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셨고(욜 2:32), 예수님께서는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도 하셨습니다(요 14:13~14).
그러나 때로 그런 믿음 없이 이름을 부르는 흉내만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주문이나 부적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인데요,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자, 사람들이 시험 삼아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일이 생겼지요. 특히 에베소에 사는 스게와라는 사람의 일곱 아들도 그렇게 했는데요,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분명 그 이름에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흉내만 낼 수도 있고, 오로지 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여 이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해야 합니다.
결국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관계없이 그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름을 사용하여 얻고자 하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당연히 여호와를 위한, 여호와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뭔가 내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수단 삼아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우리는 얼마든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이름은 망령되이 불린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그 이름을 수단화합니다. “대학에 잘 가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까 공부 열심히 해라. 이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안 되니까 이번에 꼭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도대체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이름이 오용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이 세 번째 계명은, 그래서 긍정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너의 행실과 삶을 통해 내 이름이 높여지게 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심하게 그 이름을 사용하는데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 더 온전히 바르게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언행을 통해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성전을 봉헌한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지요.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여기 보면, 이스라엘을 향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Re,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 그들을 부르는 말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이스라엘’이라는 말 속에도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의 뜻을 가진 말이 ‘이스라엘’이니 말입니다.
‘기독교인’, 혹은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속에 이미 예수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기독’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크리스천’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이 자체로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존귀한 일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같을 경우 영어 이름에서는 ‘주니어’(Junior)를 붙이지요. 영화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나 명예의 전당에 오른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켄 그리피 주니어(Ken Griffey Jr.)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도, 크리스천도 주님의 주니어 쯤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그 이름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위해서라도, 그 주니어들을 어떻게 인도하실 지는 더 물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영광과 존귀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단지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만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으며, 그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6장에 보면 이스라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졌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아멘.
사실 이 말씀은 대단히 영광스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또한 영화롭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23:3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망령되게 일컬어진 당신의 이름을 회복하려 하십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에서도 이것이 가장 먼저 간구되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이,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보다도 더 먼저 언급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그분의 이름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여호와의 이름은 망령되게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그 백성이라는 사람들로 인해서 말입니다. 이젠 세상 사람들도 덩달아 그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고 있습니다. 분명 그에 따른 책임과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왜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7b)고 강조하셨겠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제56문)에 보면, 이 부분을 해석하기를, “이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 사람이 주는 벌을 피한다고 하여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라고 해놓았습니다만, 우리는, 사람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가벼이 넘어갈지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이며, 비록 지금 당장 그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며, 그것을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백성들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을 표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행 15:25). 네, 그 정도까지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나의 삶이 여호와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음을 기억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고대 근동의 지배자였던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의 일화인데요, 그는 본래 자기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던 걸로 보입니다. 자신이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 그가 하루는 부대를 순시하다가 어느 막사에서 병사들의 하는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 그 녀석 말이야, 그 놈이 군인이야? 그런 녀석이 어떻게 우리부대에 계속 남아있는거야? …” 내용인즉 그 부대에는 알렉산더 장군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의 병사가 있었는데, 아주 형편없는 언행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겁니다. 군복 단추를 풀어헤친 채, 술에 취해 잠든 병사 알렉산더를 깨워 데리고 왔습니다. 알렉산더가 그 병사에게 너의 이름이 뭐냐고 묻습니다. 알렉산더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네 삶과 태도를 바꾸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네, 주님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실 겁니다. “우리의 이름을 바꾸든지, 우리의 삶과 태도를 바꾸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말입니다. 이름을 바꿀 수는 없으니, 삶을 바꿔야 하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영화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길 원합니다. 어디에서나 그분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 이름의 영광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요, 찬송으로 삼아, 그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고,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