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영원한 죄' 2019년 6월 16일 주일 설교
2019-06-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22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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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616 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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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20~35, 영원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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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18) 본문 29절의 ‘영원한 죄’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본문에는 예수님이 원하셔서 세운 열둘,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와 구별하여 따로 산으로 부르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열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고, 오늘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단지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더 멀리 있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 가장 밖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대상이 충격적입니다. 한 부류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그 친족과 가족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당시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던 서기관들입니다. 이 두 부류가 일종의 샌드위치 같은 형태로 본문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과 가족 이야기가 본문 맨 앞과 뒤에서 감싸고 있고, 그 속에는 서기관들의 이야기가 마치 고기 patty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앞서 도저히 연합할 수 없는 두 세력, 곧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를 어떻게 하여 죽일까 모의하는 일에 함께한 것처럼, 오늘도 도저히 같은 편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부류가, 함께 예수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두 집단이 앞에서처럼 연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의 편 가르기가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친족과 가족 이야기를 해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주님이 머물고 계신 가버나움의 (아마도 베드로의) 집에 찾아옵니다.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 ‘붙들다’는 동사 ‘크라테인’은 나중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던 장면에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단지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물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가려고 온 것입니다.
본문 후반부에 기록된 것처럼, 그런 친족들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그 아이가 장차 그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임을 천사를 통해 들었던 어머니 마리아도, 또 훗날 초대교회에서 1세기 중반 내내 최고 리더의 자리를 감당했던 동생 야고보도 그땐 다 그런 목적으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지요. 도대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여러분, 누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잘 기억해 두십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바로 주님의 형제요, 어머니라.”(35절) 말씀합니다. 직접 성령으로 잉태하여 내 배 아파 예수를 낳은 자도 아니요,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고 자부하던 자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고백교회 성도들 모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또 힘껏 행함으로써 주님의 참 가족으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미쳤다고 이야기하고 소문을 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로 보입니다. 다른 곳도 아닌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이니, 이들은 율법에 관한 한 최고의 실력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서기관들은 당시 율법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가버나움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가 단지 미친 사람이 아니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 사탄의 편에 선 자임을 면전에서 선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알세불’(22절)이라는 말은 ‘귀신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블레셋(정확히는 에그론)에서 섬기던 ‘바알세붑’이라는 우상의 헬라어 음역이기도 한데, ‘오물(혹은 파리 떼)의 주’[바알 무이안]라는 뜻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바알세불’은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별칭으로 사용됩니다. 혹시 ‘파리 대왕’이라는 영화나 책을 들어보셨는지요? 1983년에 노벨상을 받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골딩의 소설로, 동명의 영화도 두 편이나 제작된 유명한 작품이지요. 그 책의 내용 역시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적 성품에 대한 것인데요, 무인도에 떨어진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바알세불이 권력과 전쟁에 닳고 닳은 어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순수한 아이들의 이야기이며, 인간 보편의 문제임을 드러낸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든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그 일이, 다름 아닌 그 바알세불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본문 22절에 사용된 동사나 30절의 ‘말하다’는 동사가 모두 미완료인 것은 그들이 지나가듯 한두 번 그렇게 평을 한 것이 아니라, 의도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렇게 비방하여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들을 직접 불러(23)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이례적인 모습인데요, 그들의 그런 ‘반대를 위한 반대’가 얼마나 치명적인 죄인지를, 왜 그 일을 당장 멈춰야 하는지, 심각하게 설명하십니다. 주님은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시는데요, 첫 번째는 사탄이 사탄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이든, 군대든, 나라든, 그 내부에서 서로 분쟁한다면 자멸이 불가피함을, 그러니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주장하지 말라 하며 일깨워주십니다.
여러분 혹시 마블 사의 영화 ‘Dr. Strange’ 보셨습니까? 거기 보면 악의 세력(Dormammu)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는 최고 마법사 ‘Ancient One’이 나오는데, 그녀가 엄청난 능력으로 그렇게 악의 세력을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게 되지요. 다름 아니라 Dark Dimension, 곧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힘을 받아 가능했는데요, … 그와 같은 일은 영화에서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실제 영적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가복음 1장에서 주님이 회당에서 처음 귀신을 내쫓으실 때,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했던 말이 있지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1:24) 그 말마저도 주님은 꾸짖으시고 입을 다물라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시지요. 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음을, 빛은 어둠을 꾸짖어 내쫓음을 통해서 빛으로 존재함을, 주님은 말씀하시고 또한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또 한 가지 말씀,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내용을 말씀하시는데, 27절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봅시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아멘)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가 이해되시지요? 이 말씀은 지금 주님이 하시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주님 자신의 설명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귀신을 내쫓으실 수 있는지, 지금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 어떤 영적 사건들이,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쳐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저희 부부가 연희동에서 살 때, 낮에는 그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도둑들이 그 틈을 타 몰래 들어와 패물을 싹 다 가지고 조용히 나간 것처럼, 주인이 없을 때를 노리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더 대담한 방법이지요. 주인이 있으나 힘으로 제압하고 묶어놓은 다음 값나는 것들을 천천히 싹 훔쳐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부모님이 철야 기도를 하러 가셔서 교회에서 주무시고 계실 때 도둑맞은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만, 집에 어린아이 둘만 있다는 걸 알고는, 제가 아무리 안에서 인기척을 내도 쉽게 도망가지 않는 겁니다.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겉으로는 그저 착한 일, 가슴 따뜻한 일, 사람을 위한 일, 뭐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실제 그 일을 가능하게 한 것, 정말 그 일 안에 담긴 본질은 그와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과는 무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강한 자, 곧 귀신의 왕 사탄을 성령의 권능으로 결박했기에, 그들의 소유요 종이였던 사람들을 강탈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지금 주님은 사탄의 집에 들어가 그를 결박하고 잃어버린 백성들을 되찾아오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시면 더 명확해집니다. 여러분,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어떻게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셨습니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모세로 하여금 강한 자 바로를 상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기어이 바로를 먼저 꺾으십니다.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래 애굽에서 빼내시는 게 아니라, 바로가 스스로 항복할 때까지 그와 싸우십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의 신들을 심판하여, 바로의 모든 손과 발을 결박하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십니다. 결국 애굽 사람들로부터 은금 패물과 귀한 의복까지 다 챙겨 나오게까지 하시지요. 결박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 네, 인내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싸움과 승리가 이루어지는 데까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마간의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네, 지금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귀신의 왕 사탄을 결박하고 있으며, 그 능력으로 빼앗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탈해오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기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결국 그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더러운 귀신을 다 멸하고 심판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왕이자 가장 센 귀신 사탄을 결박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하나님 앞에 굴복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영적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것입니다. 남은 건 자잘한 패잔병들의 반항이며, 뒤쫓아 오는 애굽의 군대입니다. 물론 그것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대단히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28절과 29절 말씀인데요, 3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아멘)
놀랍게도 주님은 영원히 사하심을 받을 수 없는 이른바 ‘영원한 죄’[하이오기온 하마르테마]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어떤 죄입니까? 네,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라고 번역을 했었는데요, 여기 ‘블라스페메오’라는 단어에서 ‘신성모독하다’라는 뜻의 ‘blaspheme’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니, ‘성령을 모독하다’로 옮긴 것이 더 나은 듯합니다.
번역의 문제야 어떻든 그 정확한 의미가 어떤 것이냐, 그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을 수 있는데, 용서받을 수 없는 ‘영원한 죄’가 있다고 하시니, 사실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28절 맨 앞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해서, 주님은 다른 말씀들보다 훨씬 더 강조하시기까지 합니다. ‘진실로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소위 ‘아멘 말씀’ 중의 하나로 그 문장의 처음에 ‘아멘’이 들어가 ‘아멘 레고 휘민’이라고 시작되기 때문인데, 그만큼 주님이 단호하게 하신 말씀에 속합니다. 당연히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리킵니까? 지금까지 본문 내용을 살펴봤으니, 대략적으로는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께서 사탄을 결박시킨 그 결과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결박된) 사탄의 일이라고 저주하는 모습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하나의 현상으로서는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렇게만 이해하고 있어도 무관합니다만, 이것을 일반화시켜서 ‘어떤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라고 정의내리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그만큼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어려운 길을 조금 더 가 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서기관들은 단 한 번도 ‘성령’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모독한 것이지 성령을 모독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령이라는 말은 주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도 성령을 모독했으며,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꼭 성령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고 해서, 이걸 더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예수님을 거역하고 모독하고 심지어 (베드로처럼) 저주해도, 그가 만일 회개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는 서기관들 입장에서는 적잖이 당황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영원한 죄는, 단순히 어떤 말이나 표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저 예수님을 저주하거나 부정하는 것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나타난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상황 속에서,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주님이 마지막 때에 재림하시는 장면을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에는, 사탄이 결박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어둠의 권세와 존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집니다. 단지 결박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고,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이들이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마음의 완악함과 교만함으로 양심이 굳어져 은혜 받는 것조차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사탄과 함께 멸망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 역시 이와 비슷하게,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상황,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같은 본문이 기록된 마태복음에 보면 이 부분을 주님이 잘 설명하시는데요, “…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말씀하셔서, 성령과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연결시켜 놓으십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직접 언급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 명백하게 역사하는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고, 경험하고, 또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억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나라를 의도적으로 거절하는 것, 그리고 그 나라를 사탄의 나라라고 비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 일은, 단순히 하나의 축사 사건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이 사탄의 권능을 꺾고, 그 사탄을 결박함으로써, 하나님나라와 그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결박을 통해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오는, 종말론적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축사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주님이 재림하시는 상황의 일부를 앞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은 이러한 내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에 예언된 메시아가 이 땅에 올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며,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올 것인지 그들이 가장 잘 압니다.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인들이 스스로 메시아를 찾아오고, 귀신들린 자들, 불치의 병에 걸린 이들이 성령으로 놓임을 얻게 된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으로 보고 그것을 확인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로 모독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예수라는 인격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거부한 것이며, 그 나라의 실체이신 성령을 모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용서되지 않는 ‘영원한 죄’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은 용서 받기를 거절한 죄이며, 스스로 그 나라가 아닌 영원한 심판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의 ‘영원한 죄’인 것입니다.
제 설명이 이해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만, 어쨌든 그와 같은 일이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일어났다는 사실, 그것도 서기관들과 같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과 하나님나라를 아예 모르는 자들에게서는 이 ‘성령 훼방’의 죄가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와 성령의 권능을 전혀 모르고 있고, 그래서 고의로 그 나라를 대적할 수도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에 관한 한, 성령과 하나님나라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이 더 위험합니다. 물론 모르는 게 약은 아닙니다만, 저와 여러분 역시 그러한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으며, 설사 그런 종말론적인 완악함까지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일상의 완악함 속에서 성령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어떤 모습을 경계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서기관들이 실족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어쩌다 그들이 그렇게 미혹되어 눈앞의 하나님나라를 거절할 만큼 완악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이 정말 무슨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비난할 때 했던 말처럼, 그들이야말로 바알세불이 지피기라도 한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앞에서도 그토록 완악하게 만든 것일까요?
중요한 건 그들이 특별히 남들보다 더 사악하다거나 무지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대단한 유혹에 빠진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 곧 예수님의 친족과 가족들 역시 같은 관점에서 서기관들과 한 무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엄청난 영적 분별력이나 치명적인 시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뭔가가 분별이 된 다음에 결정해야 하는 ‘태도의 문제’이며, 저와 여러분 모두가 가지고 있는 ‘평범한 연약함’이 어떻게 심각한 죄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온 이 서기관들은 결국 사람들을 선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까지 못 박게 만드는데요, 그런 결말의 시발점이 어디였을까요? 여러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성경은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 놓인 작은 감정 하나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무엇인지 분별한 것은 다름 아닌 외부인이자 제3자였던,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가 체포된 예수님을 만나 마지막 십자가 판결을 내리기 직전에, 군중들을 향해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살릴 것인지에 관해 묻습니다. 그런데 왜 빌라도가 군중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런 제안을 했다고 성경이 이야기합니까? 네,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준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막 15:10). 다른 대단한 이유나 신학적 근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이니 뭐니 핑계를 갔다댔지만, 실상 옆에서 보고 있는 빌라도는 아주 명확히 분별이 되더라는 겁니다.
서기관들이 예수와 하나님나라를 거부하고 성령을 모독하게 된 것은, 예수로 인하여 생긴 시기의 마음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부러워서 진 것입니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수가 부럽고, 그로 인해 행복한 세리와 죄인들이 부러워서 넘어졌습니다. 천국이 임하여도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천국은 싫은 것이고, 나보다 믿음도, 지식도, 열심도 없는 이들, 분명히 나중 된 죄인들이 먼저 되는 그런 천국을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는 이제까지 그들이 누리던 영광을 다 빼앗아버렸습니다. 자신들을 향했던 사람들의 환호와 열망이 이제 다 예수에게로 향해버렸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메, 두로와 시돈까지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왔으니(22), 그들 자신이 바로 그 영향의 산 증인들인 셈입니다. 예수의 등장은 결정적으로 그들이 누리던 것들을 가져가버렸고, 그것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가 메시아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실체가 다름 아닌 인간의 교만과 이기심이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 때도 그랬습니다.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그들은 요한이 귀신 들린 거라고 했습니다(마 11:18). 누군가 무슨 신앙적 반향만 일으키면, 거긴 다 문제가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귀신에 홀려 일순간 시기심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오랜 시간 부패가 진행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엄청난 이유로 성령을 모독하고, 대단한 죄로 시험에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높아지지 않고, 내가 드러나지 않는 천국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눈앞에 천국이 펼쳐져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 배 아파 하고, 남이 복 받는 것 부러워하다가 넘어집니다. 부러워하고, 배 아파 하는 것까지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더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보다 높은 가치와 기준 앞에 그 시기심을 굴복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그 다음 단계인 완악함을 향해 너무나 쉽게 선을 넘어갑니다. 그래서 상대방 안에 있는 천국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기서 오히려 어둠을 찾아내고, 심지어 그 어둠을 그들이 가진 밝음의 동기와 힘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왜 생깁니까? 어째서 여당은 야당이 하는 건강한 비판에도 귀를 닫고, 어째서 야당은 대통령이 한 좋은 일도 기어이 흠집을 내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왜 내가 일단 싫은 사람, 싫어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좋은 면을 끝까지 인정하지 못합니까? 그들을 시기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이미 그들을 나의 대적으로 규정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옳음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른 존재가 되고, 내가 가진 힘과 명분이 그만큼 약해집니다. 그걸 견디지 못하기에, 우리는 쉽게 ‘반대를 위한 반대’로 넘어갑니다.
교회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가 내 입장과 다르고, 나와 한 패가 아니며, 내 기분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자주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스르게 되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작은 교회 목사와 성도들은 큰 교회를 시기합니다. 물론 잘못한 것은 분명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과 자랑을 못견뎌하고 어떻게든 거기서 안 좋은 뭔가를 찾아내어 비난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물량주의이며, 그들은 기복신앙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나 정의 같은 건 모른다고 싸잡아 비판합니다. 심지어 명백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들까지도 어떻게든 트집을 잡습니다. 그래야 나의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고, 내 빈약함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 시기심이 완악함으로 굳어집니다. 성령의 권능이 나타난 결과인지 아닌지 분별할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그냥 조용히 있기라도 해야 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 앞에 모독하는 자로 서 있지 않도록, 시기심의 미혹을 이겨야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분별하지 못한 채, 은혜를 대적하는 끔찍한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별로 열심히 한 것도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잘 되고 복 받으면 배 아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다른 의미의 시기심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하고 이미 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가족이, 친족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서기관들보다도 먼저 왔겠습니까?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안다고 생각한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내가 모르겠냐, 우리 형인데, 내 동생인데, 우리 교회 집사님이고, 목사님인데, 그들의 수준과 의도를 모르지 않는다고 그들은 단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익숙한 것이지,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내가 오랜 시간 그 사람을 봐 왔다.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다, 좋은 뜻이 아니라 다 자기 이익 때문에,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저렇게 헌신하는 것이다, 성령이 엄연히 그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데도 우리는 그리 말하기 쉽습니다. (물론 …) 우리는 늘 그가 성령의 사람임을 기억하고, 겉사람이 아닌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 여러분 시기심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시기심 자체를 상대하여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끈질긴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물론 내가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은혜가 충만하면 됩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의 뜻’(35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내 감정과 기분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고, 내가 분별한 하나님의 뜻에 올곧게 헌신하는 것, 그것만이 시기심의 미혹을 이기고 주님 편에 서게 할 수 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수치와 배신과 외면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실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당신의 삶에서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내 뜻과 내 꿈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으셨기에, 시기의 미혹을 뿌리치고, 기어이 십자가까지 나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 역시 같은 고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 내 삶에, 오직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든 아니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그 나라의 영광을 누리든 아니든, 거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시기심을 나도 모르게 밟아버릴 수 있으며, 예수와 함께 오는 그 나라를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이 땅에서 얼마나 높은 곳에 앉아,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치며, 얼마나 많은 존중과 인정을 받았는가로 평가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통해, 나의 낮아짐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는가, 오직 그것으로만 심판 받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의 제자들로 구별하여 세운 열둘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예수의 진짜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 보면, 오히려 원치 않는 대적이 생기기도 하고, 그 대적이 누구인지 더 명확해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타협과 공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침입하고, 결박하고, 강탈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성도가 지불해야 할 대가 중 하나가 바로 관계입니다. 두루두루 관계가 넓어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원수 역시 많아지는 것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때론 주님처럼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고후 5:13)라고 바울 사도가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늘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겁니다. 저는 솔직히 예수 믿으며 사실 그런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그게 더 이상하고 부끄럽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람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을 방해할 때에는 단호하게 그들을 거부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자랑하지 말고, 누구 앞에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행하는, 겸손한 성도들이 되십시오.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열매라면 그가 누구든 쿨하게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리 하십시오. 복잡하고 애매하게 말하지 말고, 다만 악은 악이며, 선은 선이라고 말씀하십시오.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모두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님 말씀합니다.) 설사 그렇게 하여 내가 패배하고 손해를 봐도,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비록 우리는 약하여지나 결국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것이며, 우리를 그 나라의 가장 귀한 영광 가운데 참여케 하실 것입니다.
예수가 여러분의 형이요, 오빠요, 아들이라고 하시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이기셨고, 우리로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며,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이 땅에서 천국과 영생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