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그 날에는' 2019년 5월 26일 주일 설교
2019-05-2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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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526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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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8~22, 그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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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15) 본문 20절의 ‘그날에는’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리 마태의 집에서 열린 주님과 죄인들의 만찬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시작됩니다. 세례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지금 금식하는 중인데,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는 거였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어울려 먹는 것도 싫었지만, 그렇게 거하게 먹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금식이 어떤 절기, 또 어떤 목적으로 행해진 것인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1년에 한 번 모든 유대인들이 하도록 율법이 정하고 있는 속죄일의 금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한 경건한 유대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지키던 바로 그 금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 동안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금식했습니다(눅 18:12). (대단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한 회개와 그로 인한 망국의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금식했는데, 본문에서의 모습처럼, 그것이 일종의 그 시대를 살아가는 경건함의 지표가 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야기의 형식은 공손한 질문이지만, 실제 담긴 내용은 비난과 질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아, 옆집 철수랑 순이, 다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너는 왜 집에서 TV만 보고 있니?”라는 엄마의 질문과 그 성격이 똑같습니다. 질문이 아니지요? 지금 세례요한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하고 있는 금식을 도대체 왜 하지 않느냐는 질책입니다.
질문의 대상도 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세리들, 죄인들과 어울려 열심히 잡숫고 계신 예수님을 은근히 겨냥한 질문입니다. 죄인을 불러 고치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어떻게 고칠 것이냐, 무슨 능력으로 그들을 고칠 요량이냐, 반문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려는 속셈입니다.
아무리 그대로 그렇지 잔칫집에 와서 금식 이야기를 하다니, 이 사람들 못나도 참 못났습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남이 즐겁고 기쁜 건 참지 못하는 쫄보들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지금 주님이 하시는 말씀도 그런 거지요. 뻔히 잔칫날인 걸 알면서 무슨 금식 타령이냐, 상황 파악 좀 해라, 하는 겁니다. 남의 집 결혼식 피로연이 한창인데, 거기 가서 ‘경건하게 금식!’이라는 안내문을 걸어놓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지금이 어느 때인지 분간을 좀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결코 그들이 지금 잘못 금식하고 있다거나, 금식 자체가 나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경건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잘 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긴 금식을 통해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금식이 얼마나 중요한 경건의 모습인지 분명히 강조하셨습니다. 금식이 문제가 아니라, 때에 맞지 않는 금식, 그리고 사람의 눈을 의식한 금식이 문제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인간 만사가 그렇지만, 때를 분별하지 못하면 남에게는 민폐요, 자신에겐 불행입니다. 결혼식에 가서 금식 타령하고 있고, 장례식에 가서 몇 그릇씩 배를 채우는 사람은,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는 무시무시한 말씀이 잠언 27:2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지금 주님이 말씀하는 신앙의 문제가 딱 그런 분별의 문제입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에도 초를 칠 수 있습니다. 만찬의 자리에 와서 금식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을 했으니, 그 잔치 분위기가 어떻게 됐을지 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하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금식을 하되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네, 슬프고 힘든 기색 없이 하라고 말씀합니다(마 6:16~18). 티 안 나게, 특별히 미장원도 가고(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목용탕도 가고(얼굴은 깨끗이 씻고), 예쁘게 화장도 해서 말쑥한 모습으로, 누가 봐도 금식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금식하라고, 경건의 모습은 다 그와 같이 행하라고 하십니다. 뭐 조금 하는 걸 남들이 다 아는 그런 것을, 주님은 외식(外飾)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제대로 된 금식과 기도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보시고, 은밀하게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겐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숨기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한 어떤 외식적인 행위가 돼서는 그 경건이 향하는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금식하라고, 왜 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나 있겠습니까?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찾아와 질문하는 이들은, 이미 그 금식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다 알도록 드러내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언제 금식하는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 본문의 내용은 모든 공관복음에 다 기록된 유명한 말씀인데요,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께 질문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금식하는 사람이 와서 안 하는 사람에게 따진 셈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는데 왜 너희는 안 하냐?” 이겁니다. 스스로 금식을 드러내고 있고, 더 나아가 그 기준을 다른 이들에게도 강요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경건의 유익은 딱 거기까지라고 말씀하지요. 이미 그들은 그걸로 그들이 받을 상은 다 받은 셈이라고, 더는 하나님께서 주실 게 없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식이든 기도든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만 아시도록 은밀히 해야 합니다. 사람이 알아준다, 심지어 스스로 드러내고 자랑한다? 이미 나중에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남들 모르게 은밀히 기도하고, 금식하고,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줄 수 있는 인정과 칭찬 말고, 은밀한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과 응답이 있을 겁니다.
‘나는 하는데 왜 너는, 그는, 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이 나보다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들은 금식할 때가 아니어서 하지 않을 뿐입니다. 때가 되면 할 것이고, 필요하면 할 것이며, 또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때도 올 것입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처한 시기가 어떠하며, 그래서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할 때인가, 그걸 분별하는 일이며,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은밀히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그 분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지금 금식하지 않는다고 주님은 말씀합니까? 금식이 중요한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시간을 축제의 시간으로 분별하십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똑같은 시간[크로노스]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슬픔과 고통의 시간[카이로스]으로 분별합니다. 그 차이에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분별이 문제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경건한 바리새인들은 지금이 금식할 때임을 주장합니다. 얼핏 보면 합당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지배 아래 있고,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은 채 헤매다 지쳐 쓰러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금식이라도 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얻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각이 다릅니다. 지금은 축제의 시간이며, 즐거워할 때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분별의 차이가 생긴 것입니까?
네, 이 차이는 전적으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판단의 차이, 그리고 그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인자로,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메시아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만찬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도 금식하며 그리스도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확히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인자다, 나는 신랑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혼인잔치의 주인공이다, 스스로 선언하십니다. 구약에서 ‘신랑’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당신 스스로가 신랑이라 말하 계십니다. 신랑이 왔고, 지금은 혼인잔치의 시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그 선택이 오늘 금식이냐 만찬이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분명 금식할 때가 올 거라고 하십니다. 언제입니까? 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며, 그때 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보통 일주일씩 이어지곤 했는데요, 그 혼인잔치가 잘 마무리돼서가 아니라, 신랑을 폭력에 의해 억지로 빼앗겨서 잔치가 끝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누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니, 하나님을 빼앗긴다니,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또 상상하기 싫은 비극입니다. 저 옛날 사울 왕 시대에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긴 그 치욕스런 순간이나, 바벨론에 의해 성전의 모든 기물을 다 빼앗겼던 그 참혹한 순간을 또 경험해야 한다니, 이번엔 아예 신랑 그 자체를 빼앗길 수 있다니, 그와는 차원이 다른, 생각조차 싫은 비극적 순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날이 올 거라고 말씀하지요. 그리고 그때 울며 금식할 거라 하십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오늘 본문은,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는 첫 번째 말씀이 되는 셈입니다.
당연히 주님의 신부들은, 주님의 제자들은, 그때 금식해야 합니다. 그때 울어야 하고, 그때 슬퍼해야 합니다. 주님을 억지로 빼앗길 때, 주님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지 못했을 때, 그때 금식할 겁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주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맛보고 즐거워해야 할 때이며, 주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나라, 그 천국을 함께 누릴 때입니다.
물론 우리는, 제자들 역시 신랑을 빼앗기던 그 순간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했음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그 고통의 때가 이르렀으니, 이제 함께 기도하자고, 내가 지금 죽을 만큼 힘이 드니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주님이 부탁하실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축제의 여흥에 젖어 있었습니다. 즐거워해야 할 때 슬퍼하던 바리새인들이나, 슬퍼해야 할 때 즐거워한 제자들이나, 모두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과 연합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분별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시간, 어떤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판단이 지금 우리의 삶을 결정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기도하고 금식할 때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누리며 만찬을 즐길 때입니까? (번갈아 가면서?) 혹 분별이 쉽지 않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분별의 기준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생각해보십시다. … 그 판단의 기준은 다름 아닌, 신랑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 있는가, 아니면 그를 빼앗겼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과 함께, 주님의 임재를 누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과 하나로 연합되신 예수의 기쁨과 소망이 여러분의 것이 되고 있고, 그것이 충만하여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힘써 그 말씀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주님과 함께 있으며, 따라서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때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슬퍼하며 금식하지 말고, 그 주님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십시오.
혹시 여러분에게 주님이 너무 멀리 계십니까? 삶속에 별로 기쁨이 없고, 기쁨이라고 해 봐야 예수로 인한 기쁨이 아니라, 그냥 세상 사람들이 다 느끼는, 그 똑같은 기쁨뿐입니까? 맛있는 것 먹어서 기쁘고, 취해서 기쁘고, 여행 가서 기쁘고, 재미있게 노니 기쁘고, 뭐 그런 기쁨뿐입니까? 그런 기쁨도 이젠 다 소멸되고, 염려와 근심으로 한숨짓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열심히 살아도 허무하고, 지치기만 하십니까? 주님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금식할 때입니다. 이미 주님을 빼앗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빼앗아갔든, 여러분이 스스로 내다 버렸든, 만약 우리에게 주님이 없다면, 그땐 금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든, 축배를 들던, 그것은 오롯이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으며, 그 상황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을 온전히 분별하고 여러분이 취해야 할 행동을 바르게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분별의 지혜를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때를 분별하는 것’은 단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주관적인 기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일은 어느 한 사람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객관적인 사실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된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땐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빼앗기는 때이니, 누구는 예외적으로 축제의 시간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각 사람의 신앙적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이 때를 규정하는 하나의 큰 틀이 있습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믿음은 달라도, 객관적으로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공통의 영적 상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나라의 큰 틀에서 본다면, 지금 축제의 때입니까, 아니면 슬픔의 때입니까?
앞서 성찬의 떡과 잔을 함께 먹고 마실 때, 그 식탁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 중에서 오직 마가만이 기록한 그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여러분, 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고 주님은 이야기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말해,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이 땅에 오시는 그 날까지, 그래서 모든 부활한 성도들과 인내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그 날까지, 저와 여러분이 영광 가운데 면류관을 쓰게 될 그 날까지, 죽음이 삼킴을 당하고 사탄이 무저갱에 영원히 던져질 때까지, 그 최후의 혼인잔치를 벌일 그 때까지, 주님은 더는 포도나무에서 난 음료, 축하와 기쁨의 그 음료를 더는 마시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축제와 만찬의 시간을 그때까지 보류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기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만찬이 잠시 중단되었으며, 다시 오실 신랑을 믿고 기다리는 우리에겐, 주님이 부탁하신 말씀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인생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함을, 우리는 매주 성찬을 통해 되새기는 것입니다.
이번 5월의 암송구절이지요, 에베소서 5장 말씀에서, 사도는 권면합니다.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주님의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때는 악합니다. 아직 완전한 축제의 시간이 아닌 것입니다. 여전히 이 땅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역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맡겨진 주님의 남은 일들과 남은 고난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지혜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갈지, ‘자세히 주의하며’ 아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자세히 주의하라’는 이 말은 직역하면 ‘정확히, 오차 없이, 걸어가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별하고, 정확하게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사도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엡 5:18) 말씀하는 이유는, 술 그 자체의 문제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분별과 주님 없는 축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실 때가 아닌 술을 분별없이 마시는 그 영적 무지를 지적하는 것이고, 그래서 ‘방탕하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술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때를 분별하지 못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주님과 무관하게 혼자 잔치 분위기를 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랑 예수께서 잠시 잔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만찬은 끝나지 않았지만 주님은 더는 마시지 않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마시는 날까지,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완전한 기쁨의 시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믿음의 싸움이 남아 있고, 때로 승리하나, 때로 넘어지는, 힘겨운 굴곡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세상과 함께 애통하고 계시며, 애통하는 자들을 복 있다 하시며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마시지 않은 그 샴페인을 우리끼리 터뜨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그렇게 이 땅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 없는 술자리에 취해 주님과 무관한 삶 살지 마십시다. 때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 주시기를, 우리 함께 깨어 기도하고 필요하면 금식도 하면서, 주님을 빼앗기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십시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에게 즐거움과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서처럼 주님을 빼앗겨서 잔치가 끝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해, 잠깐 중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intermission, 4막으로 된 공연, 3부와 4부의 climax를 향하여) 지금의 고난은 장차 올 기쁨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며, 비록 자주 넘어지나 그 넘어짐조차도 결국 하나님의 완전한 선으로 합력하여질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주님은 곁에 없지만,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축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축제를 위하여 잠깐의 쉼이 있을 따름임을 믿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성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무슨 조울증 환자처럼, 기쁨과 애통함을 오락가락하며 이 땅을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임한 구원의 기쁨에 감격하면서도,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 만찬을 기다리며, 매순간 주님과 함께 애통과 근심을 공유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습니다. 그러니 세상 보기엔 뭔가 이상합니다. 즐거운 것 같으나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자 같으나 소망 가운데 도리어 다른 슬퍼하는 자를 위로합니다. 네, 우리의 삶이 실제 그런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 깨어 분별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사 잠든 우리를 깨우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내고 계신지, 부디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빼앗기고도 누리고 있는 거짓 평안이 있다면, 분별하고, 힘껏 깨뜨리십시오.
무엇보다 주님 오셔서 시작될 그 잔치에 입고 갈 예복을 정결히 준비하십시다. 자신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되다 말씀하십니다(계 22:14). 그 거룩한 잔치에 어울리도록, 우리의 마음과 삶을 날마다 정돈하며 사십시다. 비록 우리가 주님으로 인하여, 또 주님 주신 것으로 기쁘고 감사하나, 아직 가장 좋은 것이 남겨져 있음을 기억하며, 지금의 기쁨이 전부인 것처럼, 이 세상의 기쁨이 전부인 것처럼, 그리 살지는 마십시다. 메인 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appetizer로 배를 꽉 채우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듯, 절제로 우리의 삶을 잘 지켜내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주님과 함께 애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