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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3. 모세가 장인의 말을 듣고
2019-05-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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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2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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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8장 13~27절, 모세가 장인의 말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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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와 그의 장인 이드로와의 만남과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 감동적인 18장의 만남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출애굽기의 한 국면이 마무리되는 일종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크고 능하심이 이드로로 대변되는 세상을 향해 선포되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여기서 출애굽의 제1막이 일단락되고, 19장부터는 새로운 하나님의 언약 시대가 열리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오늘 이드로가 있습니다. 미디안의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예배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먹고 마심으로 교통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의 복으로서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의 선한 영향력과 그 열매를 새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구원이 단지 그들만의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또 다른 민족, 다른 생명의 회복과 연합으로 이어지듯, 저와 여러분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이 땅의 많은 또 다른 이드로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되기를,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저와 여러분이 또 그들을 통해 더 새로운 믿음의 자리로 성장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이드로가 모세에게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큰 변화가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모세를 향한 의미 있는 조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것이지만, 실은 심각한 문제가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누구도 그걸 문제로 여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드로는 단 하루 만에 그 문제를 간파했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이드로의 경험과 탁월함이 일차적인 이유이겠지만, 같은 실력이라도 뭐든 밖에서 볼 때 더 잘 보입니다. 바둑 같은 걸 둘 때, “훈수꾼이 여덟 수를 더 본다.”는 속담이 그래서 나왔을 겁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바로 이방인 이드로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내부자의 시선이 아닌 이드로를 통해 문제가 분별되었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공동체의 변화와 발전에 있어 새로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유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항상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문제를 문제로 받아들이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에 대해서도 그만큼 무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고백교회 공동체 역시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또 그 열매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 외부자의 시선을 귀히 여기고 잘 곱씹어보는 우리 공동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내재된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모세가 너무나 많은 짐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나 전쟁을 치를 때, 또 물과 양식이 없을 때,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만이 모세의 일이 아니었던 거지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모세는 큰 짐에 눌려 있었습니다. 마치 백조가 물 위에서 아주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실상 물 아래에는 바동거리는 분주한 발놀림이 있는 것처럼, 모세의 일상도 그러했습니다. 하루 종일 백성들이 가져오는 문제를 듣고 재판해야 하는, 고단한 일들이 반복됐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애굽의 법에서 자유로워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줄 또 다른 법과 질서가 필요했습니다. 비록 정착해서 사는 삶은 아니라고 해도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으니, 수많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에 대한 조정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모세 혼자 다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은 모세를 찾아와 의견과 판결을 구했습니다. 명문화된 법도 율례도 없는 상태이기에, 조금만 상황이 복잡해지면 사람들은 일단 모세만 찾았습니다. 모세도 힘들고 기다리는 백성들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드로에게 설명하는 15절을 보면,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엿보입니다. 모세는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온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확실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스스로 어떻게 하나님께 묻고 들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고, 대부분의 것들을 모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묻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그 자체로 이미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복의 믿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잘 들리지 않을 때 그것과 씨름하며, 주시는 말씀에 따라 결정하고 살아가고 하는, ‘순종의 믿음’으로 자라고 있음을 모세는 이야기합니다. 분명 그 자체로 큰 믿음의 진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듣고자 하니까요. 지혜, 곧 ‘듣는 마음’을 구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큰 축복을 받은 솔로몬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묻고 듣는 신앙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잘 묻고, 잘 듣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문제는, 묻기는 하는데,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있는 방법과 실력, 그리고 경험이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성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개인적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경험도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사실 성령의 내주하심을 누리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분별키 어려운 걸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답답함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모세라는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숲속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타이밍에 율법을 주시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라는 고백처럼, 그 어둠을 비춰줄 등불 같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미 당연히 주어진 어떤 것으로 여기고, 또 하나님의 계명이요, 명령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하게 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율법은 본문 16절, 20절에서 반복되는 표현, ‘율례와 법도’의 약자(略字)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지침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모세는 흐릿하나마 자신이 하나님께 묻고 들음으로써 경험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지금껏 백성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율법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필요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우리의 필요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지키기 힘들 때도 있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는 필수적인 울타리가 바로 율례와 법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체적인 율례와 법도가 없으니,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모세에게 가져옵니다. 하루 종일의 과중한 업무로 모세는 탈진 직전이고, 그것은 비단 모세만의 문제가 아니라, 18절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지쳐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원래 이 공동체가 만들어질 때부터 그랬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너무나 힘들고 불편한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말씀드린 대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건 이방인 이드로입니다. 그는 오래 볼 것도 없었습니다. 모세의 일상을 단 하루 지켜본 것일 뿐인데, 그는 곧바로 문제를 발견하고 또 그 자리에서 대안까지 제시합니다. 그만큼 문제는 분명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드로가 제안한 대안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대단한 탁견인 것은 아닙니다. 군대와 조직의 리더로서 사람들을 이끌어본 경험이 있다면 아주 기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이라는 이 대안(21절)은 실상 행정조직이라기보다는 군대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미디안의 수장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전쟁을 치러 본 경험이 있는 이드로에게는 아마 상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식조차도 모세에겐 완전히 신세계였던 것이지요. 알면 쉽지만, 모르면 한 없이 어려운 법입니다. 새로움을 위해선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이 문제를 대단히 직설적으로 지적합니다. 17절에 보면, 모세에게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17)라고 말합니다. 또 대안을 제시하면서는, 19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방침을 가르치리니”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문제가 너무 분명하고 중요하기에, 더구나 자신의 가족의 안위가 달린 것이기에, 그는 괜히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너 지금 아주 잘못하고 있다. 내가 가르쳐줄 테니 그대로 해야 한다.”고 명확히 말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게 이드로도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모세는 예전에 자신이 종처럼 부리던 그 데릴사위 모세가 아닙니다. 이미 애굽과 아말렉을 굴복시킨 지도자이며, 수많은 백성의 통치자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무엇보다 모세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또한 모세가 그 말을 받아들일 사람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들을 사람인 줄 아니까 조언도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귀를 가지고 있으니 굳이 말을 돌려 힘든 수고를 감내할 필요도 없습니다. 참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귀한 장면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소위 ‘소통 비용’(communication cost)을 절약해야 발전이 있습니다. 소통이 어려워 소통 그 자체에 에너지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동력은 그만큼 떨어지고, 변화와 발전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서로를 신뢰함으로 직접 말할 수 있어야 괜한 오해도 없어집니다. 교회 공동체의 특성상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관계가 되기는 쉽지 않지만, 리더십이나 또 그 관계가 꽤 지속된 지체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이런 부분은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가족에서 일어나는 상처와 그 심리적 해결을 다룬 ‘가족의 발견’이라는 책에 보면, 가족 간의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둘 이상의 모순적인 방법으로 해석이 가능한 애매한 메시지를 전하고, 상대는 거기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그런 의사전달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이런 겁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데,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와서, 한 쪽이 상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많이 피곤하지. 얼른 씻고 좀 쉬고 있어. 내가 저녁 차릴게.” 상대방은, 아니라고, 당신도 하루 종일 힘들었을 텐데, 내가 하겠다고 하지만, 끝내 혼자 준비를 하는데요, 그런데 저녁을 준비하는 내내 한숨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이러면 상대방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 서로가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그 자체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서로 상의하고 조정해야 문제가 해결되는데, 혹 서운해할까봐, 마음이 상할까봐, 갈등이 생길까봐 그런 일들을 피한 채 계속 ‘소통의 비용’만 늘어갑니다. “나는 선물 하나도 필요 없다.” “바쁜 텐데 안 와도 된다.” 하는 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부모님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정말 그렇게 하면 엄청 서운해 하시지요. 보통의 가족 안에서는 흔하고 익숙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어느 공동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소통의 방식입니다.
본문의 이드로는 전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금방 떠날 외부인이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모세가 충분히 받아들일 거라고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는 단지 하나님 앞에서만 온유하고 겸비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누구에게나 항상 들을 준비가 된 좋은 리더였습니다.
사실 모세 입장에서만 본다면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드로도 지도자이지만, 모세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더 탁월한 리더입니다. 이 백성들을 오늘 여기까지 끌고 온 장본인입니다. 더구나 이드로는 이제 막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새내기 신앙인이 아닙니까? “이건 내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이건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일이니 그런 세상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도전이 심한 자신의 권위를 생각하면 오해할 가능성은 더 컸습니다. 별로 예쁘게 한 말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드로의 모든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에 옮깁니다(24절,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자신이 비록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지도자였지만, 모세는 (누구처럼, 바로 ‘저’)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곧장 돌이킵니다. 백성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고작해야 단 몇 개월짜리 경력을 가진 지도자라는 것을 모세는 잊지 않았고, 경험 많은 이의 조언을 귀히 여겨 힘껏 받아들입니다. 소통에 필요한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곧장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어 대안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공동체의 발전에 있어 무엇이 정말 중요한 부분인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사랑어린 진실한 소통이 가능한 공동체, 그래서 늘 진보가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드로가 제시하는 솔루션이 무엇입니까? 이드로의 이야기 그러면, 보통은 리더십을 위임하고 여러 중간 리더들을 세운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습니다. 이드로가 제일 먼저 모세에게 강조하는 이야기는, 19~20절인데요,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여러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항상 하나님께 그 문제들을 아뢰어야 합니다. 그게 모세가 할 일입니다. 비록 리더십을 위임하지만, 백성들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모세는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이 있습니다. 네, 백성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사건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신앙을 통해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어느 한 사람이나 그룹이 독점하지 말고, 모든 백성들이 배워 알게 하여 스스로 판단하게 해야 합니다. 단기간의 실제적인 해결책만이 아니라, 이드로는 이처럼 본질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함께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 후 곧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타이밍, 놀라운 전개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러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시는 또 다른 여호와 이레의 손길이라는 것을 성경은 이처럼 분명히 강조합니다. 이제 주신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 그래서 더 이상 리더에게만 매이지 않게 할 책임이 모세에게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제 모세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그러하듯,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배우고, 그 기준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는 일, 그러면서 그 문제들을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그들을 중보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의 리더들에게도 같은 문제, 같은 해결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점점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아져서 그때부터 ‘집사’를 비롯한 여러 직분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일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일들을 다 감당하다가는, 정작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도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초대교회는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우고, 구제와 봉사의 일들을 맡김과 동시에, 사도들로 하여금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게’(행 6:4) 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바로 오늘 이드로의 대안과 정확히 일치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고백교회도 이 부분을 잘 지켜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본질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현실적인 여건이 여러모로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부디 이 본질과 역할을 잘 구별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바르게 선포되고 지켜지는 우리고백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21절 이하에는 보다 구체적인 해결 방침이 나오는데요, 이드로는 천부장을 비롯한 여러 ‘부장’들을 세울 것을 제안하면서, 동시에 그 기준까지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가 제시하는 이 기준이 또한 참으로 놀랍습니다. 21절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세우라고 말하지요. 아무나, 뭐 제비뽑고 해서, 그렇게 리더가 되는 게 아니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으라고 충고합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리더가 되면 곤란한 것이지요. 그러면 공동체 전체가 공멸할 수 있습니다. 명확한 기준과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드로가 말하는 ‘능력 있는 사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진실한 것, 그리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비록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예배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는 실로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단순히 그의 오랜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 조언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드로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매우 실제적으로 조언하면서도, 단지 단기적인 효율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공동체임을 인지하고 이야기합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드로와 창세기의 멜기세덱을 비견하기도 하는데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둘 다 이방의 제사장이고,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 어떤 이방인보다 정확합니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이 롯을 구출하는 가나안 전쟁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오늘 이드로와의 만남도 아말렉과의 전쟁 이후에 이루어집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과의 만남 이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체결되는 것처럼, 마찬가지고 이드로와의 만남 이후,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이 체결됩니다. 그저 우연한 만남이 아님을 짐작케 합니다.
어쨌든 여러분, 누가 하나님 앞에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기억해 두십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리더의 조건은, 결코 어떤 지식이나 지위와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얼마나 똑똑하고 탁월한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가, 그의 직업이 무엇이며, 얼마나 좋은 집안 출신인가, 또 얼마나 좋은 대학을 나왔고, 얼마나 많이 배웠으며, 재산은 얼마인가, 이런 기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경건과 성품에 관련된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리더십이 결정된다는 본문의 메시지에 우리는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일꾼을 세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집사를 세울 때의 기준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서, 단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을 뽑으라고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세우는 일에 다른 기준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이유 중 큰 부분이, 교회가 세우는 직분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 곧 부와 지위와 힘의 기준과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나님 믿은 이드로도 아는 진리를 놓쳤기 때문에, 수많은 한국교회가 반목과 분열로 너무나 큰 상처와 오점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고백교회가 그 길로 가지 못하게, 처음부터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 말씀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세워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시 기억해봅시다. 본문은 어떤 능력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까?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성경은 계속 강조하고 있으니(잠 9:10 등), 이는 결국 성령으로 지혜로운 자를 택하라는 것인데요,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 이건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도 분별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건 향기와 같은 것이어서 느낄 수 있고, 또 그의 삶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집사를 세울 때 성도들 또 주변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기준이 그래서 나옵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다 보고, 다 압니다. 사적인 친분으로 인해 표현에서만 다를 뿐,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나름 공통의 관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특히 저희처럼 작은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러하겠지요.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한 것, 곧 참되고 거짓 없는 삶, 그리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것 역시도 삶과 신앙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 정도 보입니다. 리더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그 기준을 지켜갈 수만 있다면, 누구를 세워야 할지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신앙은 열매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고백교회가 같은 믿음의 고백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하고 순전한 믿음의 종들을 바르게 세워가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건강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인도해 가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드로의 방문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였던 것만이 아니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힘겨워하는 모세를 돌보기 원하셨고, 그가 단순히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수고하기만을 바라시는 게 아니라, 그의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그의 삶을 위로하시려는 목적 가운데, 그를 인도하시고 지도해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어떤 일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의 영적 회복의 과정으로 그 일을 맡기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저와 여러분 모두 지금과 내일의 맡은 사명과 직분에 감사함으로 충성하십시다.
지금의 모든 상황이 이제 곧 있게 될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장면 직전에 전개되고 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본문의 내용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왜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 말씀들이 필요함을. 즉 율법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그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키고 보존하시는 길임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시기 전에도 이미 사람을 통해 말씀하셨고, 그가 본래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었다는 것도 기억합시다. 마치 여기 18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율법적 제도가 시작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상황이 벌어집니다. 결국 사람의 말이든 하나님의 말이든 분별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듣는 마음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확인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어질 때 가능한 것임을 알고, 주님과 늘 연합된 삶을 살아가십시다.
끝으로 여기 나오는 말씀과 리더의 조건들을 잘 기억하고, 앞으로 교회의 사역 방향을 정하고 일꾼을 세우는 과정에 바르게 적용하십시다. 그냥 어떻게 되겠지, 다 잘 될 거야, 이런 모습이 아니라, 기준을 의식하고, 생각하며, 늘 조심하는 것만이 답입니다. 엊그제 묵상한 QT 본문에서 보셨겠지만, 다윗의 실패는 의식적으로 깨어 있지 못한 결과의 성격이 강합니다. QT 책에 그런 설명이 있더라고요. “우리는 의식적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으로 교만하게 된다.”고. 늘 의식적으로 깨어 바르고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