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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보시고' 2019년 5월 12일 주일 설교

2019-05-1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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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2 부활절 네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2:1~12,  믿음을 보시고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13) 본문 5절의 ‘믿음을 보시고’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1장 말미에서 가버나움을 떠나 주변의 다른 작은 마을들로 가셨던 주님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와 집, 아마도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계셨다는 이야기로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째서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야 했는지는 다시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네,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의 자의적인 행동으로 인해 주님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야 했고, 결국 가버나움으로 되돌아오십니다. 그렇다면 가버나움에 오신 주님께서 무엇을 하셨다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2절 마지막 부분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도를 말씀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도를 말씀하셨다’고 하니 문득 오래 전,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도를 아십니까?”라고 질문하던, 한 종교 단체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혹시 얼굴이 선해 보인다고 이야기하며 접근하는 분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진짜 그런 줄 알고, 예수 믿고 성화가 된 걸 사람도 아는구나, 했습니다.) 네, 주님은 ‘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이 ‘도’는 어떤 ‘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마가는 어째서 주님의 교훈하심을 여기서는 “주님이 ‘도’를 말씀하셨다.”고 표현하는 걸까요? … 사실 이 도가 어떤 도인가, 하는 것과 왜 마가가 여기서 이런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요, 여기 ‘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다름 아닌 ‘호 로고스’입니다. 여러분, ‘로고스’가 무엇입니까? 네, 간단하게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지요.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 1장 1절, 곧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서 강조한 것처럼, 그것은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 그 자체로 ‘하나님이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 말씀이 곧 누구라고 알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요한 사도는 계속 말씀합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러니까 도를 말씀하시는 주님은 지금 실상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것입니까? 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누구시며, 왜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셨는지, 그것을 풀어 설명하시는 장면을, 마가는 한 마디로, ‘도를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로고스를 전하셔야만 하는 이유가 이미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나병환자가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들 속에서, 주님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왔고, 환호와 흥분이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지난주에도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메시지가 희석되고 오해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 그러한 기적들로 인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할 것처럼 주님을 재촉했고, 치료된 병자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치유 그 자체에 열광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대로라면 사람들이 복음을 오해하는 것도 시간문제였습니다. 이제 주님은 더 직접적이고 더 명확하게, 주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에 관하여 말씀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이 겪고 있는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했습니다. 다만 주님이 오신 목적이, 겉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증상’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근본적인 원인 자체’를 고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강조하시기 시작합니다. 본문에 평소와는 다른, 그리고 상황과 맞지 않는 것 같은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여러분, 질병과 죽음 그 이면의 근본적인 원인이 뭐라고 주님은 말씀합니까? 네, 죄라고 하시지요. 온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이 병자에게, 주님은 그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나 당황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멀어지고 어그러진 관계,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또한 어그러졌음을,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당신이 오셨음을, 주님은 이야기하십니다.  본문에는 서기관들의 당혹감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지만, 아마 그 중풍병자 역시도 크게 놀랐을 겁니다. 병 고쳐주실 것을 기대하고 왔는데, 난 데 없이 죄 사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의아함을 넘어 당황하고 부끄러울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실제 어떤 죄로 인해 그가 중풍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르는 어떤 숨겨진 죄를 주님이 보셨고, 또한 용서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 죄로 인해 생긴 질병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 자신의 생각이 그러했을 수도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질병으로 탄식하다가 이것이 다 내 죄가 커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울러 정작 자신은 아니어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여겼을 수도 있겠지요.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이었기에 하나님께 벌을 받아 그리 된 것이라고, 분명 죄가 있어 그렇게 됐을 거라고 수군거렸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런 모든 죄의 문제와 죄의식으로부터 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음을 또한 알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고치시는 권세만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려 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행하시는 모든 질병의 치유가, 단지 기적적인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은 자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연합한 자들이 누리는 구원의 일부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화해가 다름 아닌 육신이 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나게 됨을 선포하십니다. 본문의 다음 단락에 보면 주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과 그런 주님을 정죄하는 서기관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주님이 유명한 말씀으로 그들에게 대답하시지요. 17절,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아멘) 네, 주님은 의사이십니다. 병든 육체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죄로 병든 영혼과 삶을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의 몸을 치유하는 것은 ‘두 가지 별개의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의 치유는 주님의 용서와 함께 일어나고, 죄의 문제가 해결된 여러 열매 중 하나가 질병의 치유입니다. 주님은 단지 마비된 육체만이 아니라, 그 뒤에 자리 잡은 거대한 죄의 세력을 상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참으로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내면의 고통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얽매는 많은 죄 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십시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어그러진 것들이 정돈되고, 마비된 것들이 다시 움직여 그 생명이 약동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처럼 이제 주님은 겉으로 드러난 기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적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십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리고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이 적극적으로 설명에 나서십니다. 서기관들이 속으로 한 생각까지 문제로 삼으셔서 하나의 설명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그들이 겉으로 한 말도 아닌데, 주님은 굳이 그들의 생각까지 지적하여 논쟁하시고, 주님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임을 드러내시면서, 당신을 가리켜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십니다. 네, ‘인자’라는 호칭이 그것입니다(10절). 아마 여러분도 이미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이 표현 ‘인자’는, 앞으로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하시는 걸 보게 될 겁니다. 타인이 주님을 부를 때는 단 한 번도 이 말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이 스스로를 향해 사용하시는 표현이 바로 이 ‘인자’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표현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인자’(人子,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 the Son of Man)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인자’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땅의 모든 남자가 다 ‘인자’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자’는 조금 다른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신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람의 아들’을 가리켜 ‘인자’라 합니다. 여기에는 구약의 배경이 있는데요, 종말을 다룬 예언서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인자’입니다. 잠깐 다니엘서 말씀을 한 곳 찾겠습니다. 다니엘 7장 9~14절의 말씀, 구약성경 1245쪽입니다. “9.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의 보좌는 불꽃이요 그의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10.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1.그 때에 내가 작은 뿔이 말하는 큰 목소리로 말미암아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가 상한 바 되어 타오르는 불에 던져졌으며 12.그 남은 짐승들은 그의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아멘.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봅니다. 여기 11, 12절에 나오는 ‘짐승(들)’은, 종말론적으로는 사탄을 의미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도구였던 바벨론을 (비롯한 패권국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통치가 끝나게 되며, 그들에게 주신 권세를 다시 빼앗으십니다. (네,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빼앗은 권세를 이제 누구에게 주셨다고 이야기합니까? 네, 바로 ‘인자 같은 이’(13절)에게 넘기십니다. ‘인자 같은 이’, 그러니까 다니엘이 보기에,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한 분이신데, 구름을 타고 영광 가운데 존귀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등장하고, 바로 그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가 넘겨집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인자’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그 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니엘은 또한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그 인자 같은 이’를 섬기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14절).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만이 아니라, 온 열방의 백성들이 그 인자를 섬기는 놀라운 장면이 바로 다니엘의 이 환상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오늘 이곳의 저와 여러분을 본 것이겠지요. 네, 그 ‘인자’가 드디어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위해 이 땅 가운데 육신이 되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처럼 ‘인자’는 하나님나라와 권세, 그리고 심판과 종말의 영광을 가지신 메시아를 가리키는 성경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를 바로 그 ‘인자’라 칭하시며, 동시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인자에게 주신 권세는 단지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니라, 오늘 서기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자’라는 말의 다른 한쪽 측면에는, 그 표현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를 가진 심판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런 메시아가 다름 아닌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인자는, 그가 가진 권세로 사람을 용서하는 데, 사람을 섬기는 데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그저 인자일 뿐인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아들인 인자’로 바꾸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 그리고 그가 자신의 권세를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데 사용하신 것, 그래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죄의 종이던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또한 하나님의 자녀 된 인자가 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며, 오늘 ‘인자’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예수님은 이제부터 복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전하십니다. 이 ‘인자’라는 표현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를 계속 하실 예정입니다. 2장 마지막 절에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등이 다 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본문의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를 대적하는 이들의 움직임도 명확해지기 시작합니다. 본문 7절에서 서기관들이 마음에 생각하는 바, ‘신성모독’(사형의 죄목, 레위기 24:10~16, 결국 이것으로 인하여 십자가. 막 14:64)과 같이 그들의 정죄가 명확해지고, 3장 6절의 말씀처럼,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는” 일이 본격화됩니다. 예수가 자신을 ‘인자’로 부르며, 당신이 가지신 권세와 주권을 선포하심과 동시에,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이들의 반격도 시작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이 험한 싸움의 길인 이유입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이러한 ‘인자’로서의 주님의 모습은 계속 오해되고 무시됩니다. 한쪽에서는 ‘인자’의 권세와 능력을 부인하려 하고, 또 다른 한쪽, 곧 제자들과 그 따르는 무리들은 그저 그의 권세와 영광만을 바라볼 뿐, 인자의 섬김과 고난과 죽음은 외면합니다. 그렇게 주님이 오해되고 왜곡되는 이야기를 이제 우리는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그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바르고 견고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만) 끝으로 우리는 여기서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한 가지 메시지에 대해서 마저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하신 말씀으로, 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대목이지요. 주님의 치유는 믿음을 보신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보신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네, 어떤 멋있는 말이나 고백이 아닙니다. 단지 남의 집 지붕에까지 올라가, 기어이 그것을 뜯어내어, 그 누운 중풍병자의 침상 째 주님께 내려 보내는 그런 믿음입니다. 사실 표현은 ‘믿음’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다른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병자를 향한 긍휼과 사랑, 또 간절함과 집요함, 이런 것들이지요. 앞서 중풍의 치유가 죄 사함으로 표현된 것처럼, 주님은 그 ‘사랑어린 집요함’을 ‘믿음’이라 달리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보시는 믿음은 어떤 말의 고백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께로 나아가는 그 처절하고 끈질긴 모습을 주님은 믿음이라 하시고, 그것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네, 그것이 주님이 생각하는 믿음이며, 치유가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행위의 집요함. 비록 많은 장애와 방해가 있다 해도, 기어이 주님 앞에 그 문제와 그 절망을 가져가는 그것을, 주님은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지난 나병환자도 그러했고 오늘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외에 다른 소망이 없음을 깨닫고 주께 내 모든 것을 내맡기는 그 행위를 주님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 믿음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믿음의 성격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그로 인한 움직임, 동작입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본문엔 예수님 외에 그 누구의 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사람들이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12절)를 제외하고는, 오직 주님만 말씀하십니다.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만이 말씀하고 계시며, 다른 이들은 침묵합니다. 그들은 단지 생각만 하거나 아니면 움직입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믿음은 결국 말씀에 대한 반응이며, 말씀을 향한 움직임입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 여기서도 ‘일어나, 들고, 가는 움직임’을 명령하십니다. “구원을 받으라, 치유를 받으라,” 추상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십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의 믿음에 의해 내게 오게 됐으니, 이젠 너 스스로 움직여 너의 믿음을 고백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 스스로 움직이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움직이든 어떻게든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행위가 바로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구원이 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떤 한 사람의 믿음이 아닌 ‘그들의 믿음’에 주목하심을 기억하십시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이끌고 주님께로 온 ‘그들의 믿음’을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평가하실 때, 얼마나 후한 기준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떨어뜨리려는 시험이 아니라, 어떻게든 붙게 하고, 들어오게 하시기 위한 시험입니다. 누구나 들어와 누리기를 원하시는 넉넉한 관점의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침상을 들고 온 네 명의 믿음은, 실로 사랑과 긍휼의 믿음입니다. 평생 침상에 누워 그러고 살았으니, 그냥 운명인가 보다, 생각하고 살아라,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의 일이니 그냥 스스로 해결하라고 방치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중풍병자는 이미 자포자기의 마음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를 업고 온 게 아니라 그 침상 째 들고 온 것은, 그를 억지로 데려와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네, 주님은 그런 네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기어이 그를 주께로 데려가는 그 집요한 사랑의 믿음을 말입니다. 오늘 예배 준비 모임에서 교회력 말씀을 묵상했는데, 거기서도 그 사랑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주님의 사람을 모셔가는 믿음이 있었지요. 죽은 다비다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성도들은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말을 전하러 두 사람이 베드로에게 달려갑니다. 결국 그 사랑의 믿음이 한 사람을 살렸고,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통한 이방의 선교가 열리게 만들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사는 선교의 전환점이 거기서 시작됐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사랑어린 집요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누군가의 믿음을 통해 오늘 여기 있게 됐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게 됐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우리가 원래는 중풍병자였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예수에 관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줬고, 억지로 우리를 끌고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인도함이 믿음이고, 그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도 믿음이 잉태되었습니다. 네 명의 믿음이 중풍병자의 믿음으로 이어진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누군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그 믿음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고백교회가 그 일을 멈추지 않기를 원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묵상한 것이지만, 천국의 믿음은 나 혼자의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고백교회’라는 이름처럼, 우리가 함께 고백하는 믿음이며,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믿음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때로 또 다시 중풍병자 같아질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절대 움직여지지 않는 믿음의 절망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모세와 같이 지친 팔이 내려와 더는 기도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실눈을 떠 보니, 호식 형제). 그러나 그 때에도 단지 ‘내 믿음’으로만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아론이 있고, 훌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주님께로 기어이 데리고 갈 네 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 되어 주십시다. ‘우리의 믿음’으로 어느 한 사람의 구원을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그런 우리고백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인자’이십니다. 주님은 그 권세를 우리를 위해 사용하셨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우리의 삶의 여러 문제들도 함께 치유되고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거룩의 길’, ‘순종의 길’, 죄와 싸우는 믿음의 길이 곧 우리의 ‘치유의 길’임을 믿으셔서 죄와 맞선 믿음의 싸움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치유는 주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심을 봤습니다. 그 믿음은 말이 아닌, 생각이 아닌, 집요한 발걸음이었고, 움직이지 못하는 이를 주께로 매고 가는 사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보신다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적 중풍병자의 모습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는 것,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생각만 할 뿐 움직이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 말만 번지르르 하고 아무런 행함도 없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영적 마비, 영적 중풍입니다. 주님이 그런 우리를 고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 다시금 누군가 침상 째로라도 주님께 나아오는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고백교회가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주께로 매고 나아가는 그 ‘함께’의 믿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중보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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