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이유 너머의 소망" 2014년 4월 21일 새벽기도회 설교
2014-04-2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421 월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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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장 2~6절, 이사야 강해 49 이유 너머의 소망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tkaQmkhCce/20140421_.html
이사야서 마흔아홉 번째 말씀으로, ‘이유 너머의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성서 일과에 맞춘 사순절 새벽기도가 지난 토요일로 모두 끝나고 이제 저희가 사순절 전에 묵상하던 이사야서를 다시 차례로 묵상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바로 앞의 부분, 그러니까 3장 1절부터 4장 1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1절은 4장의 한 부분이라기보다는 3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구절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해석입니다. 이 부분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1절은 그런 심판의 날에 나타나는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번 1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 이때만 하더라도 여인들이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자녀도 없는 상태를 일종의 수치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 남자들이 없습니다. 모두 전쟁에 나갔고 거기서 다 죽었습니다. 성문에서는 통곡의 소리만 들리고, 여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혼인을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온 가정과 사회가 무너진 기가 막힌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장 안에 계속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있어서 일종의 결론적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부분의 첫 머리, 2절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여기서는 분위기가 180도 바뀌어서,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비록 1절과 2절의 첫 마디는 같은 말씀입니다. ‘그 날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오직 그 표현 하나만 같을 뿐 모든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때를 나타내는 동일한 부사를 사용함으로써 두 현실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황폐해진 그 땅이 풍요로워지며, 피와 타락으로 얼룩진 그곳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당신의 백성의 멸망이 아니라, 깨끗케 하시는 정화임을 알게 됩니다. 출애굽의 시간부터 지금 나라가 망하여 사라진 이 순간가지,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 백성다움, 그것이 일관된 하나님의 목표였고, 그 거룩함이 어떤 인간적인 의의 완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거룩은 곧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과 희락 그 자체였습니다. 심판은 언제나 잠정적인 하나님의 선택일 뿐 궁극적인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 본문 2절과 같이 영화롭고 아름다운 현실이며, 또한 3절과 같이 거룩한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의 회복은 다시 우리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그 초점이 옮겨지는 회복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에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의 힘으로 그들이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패역하며 여전히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당신의 영을 보내사 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고 피로 얼룩진 예루살렘을 청결하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 남은 자들은 거룩하다 칭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문 3절에 등장하는 두 구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본문 3절의 ‘시온에 남아 있는 자’ 그리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해 주십시오. 여기 ‘남아 있는’ 그리고 ‘머물러 있는’이라는 두 히브리어 단어는 결코 능동이 아닙니다. 내가 남기를 원하여 거기 남은 것,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남겨진 자’ ‘하나님에 의하여 머물러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남겨지고 거기 머물러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가운데 남겨져 머물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결하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사실상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셨던 모든 교훈과 책망, 그리고 심판의 궁극적인 목표이지요.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우리와 온전한 관계 가운데 계시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친히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적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냐, 얼마나 평안하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냐, 얼마나 당신과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1차적인 관심이지요.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는 우리가 바른 모습인가 아닌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평안한가 아닌가는 우리가 온전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멸망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평안할 수 있음을 오늘 이스라엘이 역사와 삶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역도 분명히 성립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실패요,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제 부활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함께 나눈 것처럼, 심지어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미 죽음은 죽었고, 우리는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도 온전히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성령이 주시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없이는 한갓 자기변명에 불과한 소리가 되겠지요.
벌써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이 나라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몹시 당황하며 흔들리게 됩니다. 너무나 참담한 이 죽음의 현실 앞에서 그 어떤 위로와 소망도 그 빛을 잃게 됨을 우리 모두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그 많은 아이들을 그 차고 어두운 죽음의 심연에 내버려 두신다는 말입니까? 어째서 하나님은 자기만 살겠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책무를 내던진 이들은 삶으로 부르시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영혼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음에 넘기워 주신다는 말입니까? 거기 하나님은 계셨습니까? 왜 부르짖는 이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무 응답도 어떤 조치도 없단 말입니까? 거기 신앙이 무슨 의미이며, 거기 믿음과 소망이 무슨 의미입니까?
어제가 부활절이었고, 우리는 부활의 현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부활의 소망을 믿느냐 아니냐이기 이전에, 내가 어떤 상황 속에서 그 말씀을 신뢰하느냐, 그것입니다. 내게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내게 건강이 있고, 넉넉함이 있을 때, 부활의 현실은 굳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기쁨의 대상이며, 신뢰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믿음의 실체는 아닙니다. 그에게 고통이 찾아오고 고난이 찾아오기 전에는 그가 택한 현실이 부활인지, 아니면 이 땅의 행복인지,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고, 죽음의 현실이 나의 현실이 될 때, 우리는 내가 어떤 현실을 믿고 살아내고 있는지 목도하게 됩니다. 내가 믿는 예수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주는 램프의 거인인지, 아니면 나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여, 나로 죽음에 맞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그 나라를 그 부활을, 믿음으로 살아내기를 원하시는 나의 주인인지, 우리는 죽음의 현실 앞에 놓일 때 비로소 밝히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찾아왔으며, 왜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왜 유다는 그를 팔며, 왜 베드로는 그를 배신하며, 왜 십자가 위에서 그는 저주를 받아야 하며, 왜 창이 그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다 쏟아져야 하는지, 그것을 다 이해하고 헤아리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이 “왜”의 질문에 하나님은 아무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 답을 외면하셨습니다.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예수는 그 모든 고난을 다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현실이며, 그것이 우리가 처한 삶의 현실임을 주님은 결코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이유 없는 고난의 자리에 머물러 계셨고, 죽음에 넘기워져 거기에도 머무셨습니다. 우리를 부활의 소망으로 부르시기 위해, 우리를 그 이유 너머의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주님은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로 믿고 다시 이 현실을 살아내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죽음의 현실 가운데 친히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사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믿음은 죽음 없는 평안이 아니라, 죽음과 맞서는 소망임을 예수님은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나, 여전히 우리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난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을 우리는 언젠가 또 마주하게 될 수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 밖 어딘가에는 그 죽음의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누군가가 분명 또 있을 것입니다. 이 계속되는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부활의 현실을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현실이 지금 당장 우리의 현실인 것은 아닙니다. 사망의 현실을 우리는 부활로 살아내야 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그것이 그 믿음이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문제는 그 사망의 현실에 대한 이유를 알고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끝까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이유를 모른다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해야 할 이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 너머의 소망, 그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여전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한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내게 행하신 일들을 믿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망 앞에 선 우리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바로 그 부활의 현실을 살아내는 이들입니다. 사망 너머의 현실을 지금 이 죽음의 자리에 가져와 믿음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고, 그들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계속됩니다. 사순절은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의 고단한 일상은 이어집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이 현실이 내게 부활의 현실이냐 아니냐, 그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부활을 살아내십시오. 죽음이 끝이며, 죽음이 이겼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 그렇게 강요하는 사탄의 비웃음 앞에 우리의 소망의 이유가 누구인지,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그들을 꺾어 누르려 하지 말고 그저 부활의 현실을 살아내는 그 믿음 자체가 이미 우리의 승리임을 믿고 겸손히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견디십시오. 이유 너머의 소망에 우리 인생의 닻을 내리고 오늘도 묵묵히, 그러나 담대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