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삶이 부활을 고백하게 하라" 2014년 4월 20일 주일예배 설교

2014-04-2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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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0 부활절 ----------------------------------------------------- 요한복음 20장 19~23절,  삶이 부활을 고백하게 하라 * 설교 음성파일 : 이번 주는 없습니다.  ‘삶이 부활을 고백하게 하라’는 제목으로 부활주일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너무나 감격스럽고 감사하고 반가운 날이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운 부활주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더욱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매년 부활주일을 지내고, 또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과 부활을 둘러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혹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장소는 기억나시는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이 땅에 얼마나 계시다가 승천하셨지요? 또 승천은 어디서 하셨나요? (*)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여러분이 헛갈려하시고 또 잘 모르는 부분도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부활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각각 그 관점에 따라 중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초반부를 토대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에 대해 충분히 그려볼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 그런 작업을 통해 전체적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선 이 부활의 사건과 승천의 이야기를 일단 정리하고, 부활 사건의 재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부활의 정확한 의미와 교훈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면 오늘의 주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이렇게 세 사람이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갑니다. 가서 보니 이미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옆으로 굴려져 있었고, 거기 두 천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곳에 있음을, 또 그 무덤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놀라 죽은 사람처럼(마28:4)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천사가 여자들에게 두려워말라고 이야기하고, 주님의 부활과 갈릴리에서의 만남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이어 무덤가에 머물렀던 막말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그녀들이 돌아가 열한 사도에게 이 소식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잘 믿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베드로와 요한만이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훨씬 달리기를 잘해서 무덤에 먼저 도착했는데, (아마도 수위권의 문제, 두려워서?)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무덤 앞에서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도착하고 요한보다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뒤이어 요한도 들어가서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 믿으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장소에 모여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함께 하게 됩니다. 복합적인 마음과 감정이 그들 가운데 있었지만, 무엇보다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이 그곳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여러 이야기를 하시고, 이후 믿지 않고 두려워하는 제자들 앞에서 먹을 것을 잡수심으로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십니다. 그들은 여전히 영으로 주님이 계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시고, 제자들이 구운 생선을 드리니 그 앞에서 잡수십니다. 이어 주님은 부활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십니다. 이어 8일이 지나고 제자들이 다시 한 곳에 모였을 때 주님이 그곳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도마 때문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주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드시던 때 그가 거기 없었고, 그래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에 직접 손을 넣어보게 하셔서 도마를 다시 믿음 안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이어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시지요. 갈릴리에서 고기도 잡고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약 40일 간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계십니다.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등 총 7명의 제자들에게 가셔서 친히 그들을 위해 조반을 지어 준비해 주시고, 함께 떡과 생선을 드시던 때가 바로 이 기간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특별히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고, ‘내 양을 먹이라’고 역시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밖에도 갈릴리의 한 산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말씀드린 대로 40일 동안 이 땅에서 지내십니다. 그렇게 40일 간 이 땅에 계시던 주님은, 이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 다시 제자들과 만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여기 머물며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친히 데리고 예루살렘 바로 옆의 베다니라는 곳까지 나가셔서 그들을 마지막으로 축복하시고 거기서 승천하시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과 승천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정리해 보았는데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 혹지 제가 이렇게 시간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주님의 부활과 그 이후의 사건들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여러분이 정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그렇게 오래 계시며 여러 사건 가운데 계시고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계셨을까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제자들에게 평강과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부활의 신앙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이 믿어지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출발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정체성과 삶, 그리고 담대한 모습은 오직 부활에 대한 견고한 믿음, 그 하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성경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두려움이고, 오늘 본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시는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죄인의 제자들이었기에, 그들 안에는 사람을 향한 두려움,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막16: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만약 우리도 주님의 무덤이 열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면, 아마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더구나 날이 어두워지고 그렇게 문도 열지 않고 공간을 이동하여 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경악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그렇게 평강의 인사와 함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는 세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매순간이 걱정이요, 염려요, 두려움이요, 또 그도 아니면 허무입니다. 안타까운 사고를 주중에 저희가 접했습니다만, 이제 더 이상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것, 아마 죽음일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결국 죽음에 대한,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 두려움에서 많은 인간의 쓴 뿌리들이 나옵니다. 내가 죽을 수 있으니 불안하고 염려합니다. 두려우니 집착하고 두려우니 다툽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오래 계셨던 이유, 그리고 오늘 제가 여러분께 그 부활의 시간들을 정리하여 말씀드린 이유, 모두 한 가지의 같은 이유입니다.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 그 죽음이 늘 끌고 다니는 죽음의 수하들, 염려와 근심과 욕망과 이기심과 미움과 다툼으로부터까지 우리가 온전히 자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이 주님의 부활을 온전히 이해하고 믿기 위해서는 죽음과 천국에 대한 어떤 기존의 생각들을 성경으로 관점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부활에 대한 믿음보다 천국에 대한 믿음을 더 우선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둘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 거기 사용되는 동사가 주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통 우리는 죽어서 천국에 ‘간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으면 천국을 향해 ‘가는’ 것으로 이해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내게 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주기도문, “나라가 임하시오며”(마6:10) 요한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 관점입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21:10)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 때문에 천국에 간다는 표현이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잠깐 공중으로 들려 올라갑니다.) 천국을 오는 것으로가 아니라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을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은 이제 좀 아니시지만, 많은 성도님들이 천국은 몸을 버리고 간다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영이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기, 즉 이 땅을 떠나, 내 몸을 버려 천국에 갑니다. 그러니 이 땅은 무의미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저 천국에서만 잘 살면 된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씀합니다. 천국이 내게로 오고, 나는 새 몸을 입어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이 땅을, 또 내 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는 땅과 몸으로 계속 삶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생각해보십시오. 손에 못자국과 몸에 창 자국이 그대로 있습니다. 여전히 몸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음식을 드시기까지 합니다. 부활하시고 주로 생선을 드셨지요. 그게 부활의 몸입니다. 그게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왔던 것처럼 무슨 귀신같은 희끄무레한 모습으로 떠다니는 게 천국이고 부활이 아닙니다. 서로 알아보고 구별되고 먹고 마시며 함께 부대끼며 또 살아갑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저 죽은 것처럼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는 온전한 몸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천국이 오는 나라이고, 우리가 그 천국을 다시 몸으로 살아낸다는 이 부활을 믿는 믿음을 주시고자 주님은 그렇게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매우 긴 시간을 함께 계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시간이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천국에 가기 전의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부활의 시간이자 영생의 시간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저 부활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가기 위한 아주 작고 귀여운 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죽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저와 여러분의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 모두(?) 비록 아직 젊지만 반드시 죽습니다. 며칠 전 수학여행을 떠나던 아이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지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애써 잊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죽음을 기억하라고(Memento Mori)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죽음이 우리의 현실인 것만큼, 부활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작은 문에 불과함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비록 때를 알 수 없을 뿐 죽음의 문이 우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부활도 우리를 향해 함께 달려오고 있습니다. 부활이 현실임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부활을 살아낸다는 것,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요? 죽음이 부활의 문이지만, 우리는 그 문이 아무 힘이 없는 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 문은 이미 열린 문입니다. 아니 깨어진 문입니다. 문으로서 아무 위력이 없습니다. 열쇠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부활이 그 문을 통해, 역으로 우리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성령이 이제 우리에게 임하여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 그 자체인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은 이미 깨뜨려진 죽음의 문을 뚫고 지금 우리를 다스리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아직 몸은 옛 모습이지만, 우리의 존재는 부활의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이 가진 무기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함으로, 성령에 순종함으로, 부활의 현실을 이 땅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마치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고 거기 생기를 불어넣으시듯,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십니다. 주님은 그 성령을 마지막 선물로 우리에게 주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다시 살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 부활을 살아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의 현실을 삶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죽입니다. 부활이 죽음보다 앞서는 사람, 그가 죽음을 이기며, 죽음을 극복하고 아울러 세상을 이깁니다. 여러분 독일의 고백교회를 세웠던 본회퍼의 순교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수감된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를 담당하고 본회퍼의 마지막 죽음을 목격하고 기록한 피셔 휠슈트룽이라는 의사가 본회퍼의 마지막 몇 분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날 아침 5시와 6시 사이에 카나리스 제독, 오스터 장군, 토마스 장군, 자크 판사 등 피고들이 감방에서 끌려나왔다. 군법회의에서 그들에게 판결문을 낭독했다. 막사에 있는 방의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나는 본회퍼 목사가 죄수복을 벗기 전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기도하는 방식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찌나 경건한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그는 형장에서 다시 짤막한 기도를 드린 다음 용감하고 침착하게 계단을 밟고 교수대에 올랐다. 그리고 몇 초 뒤에 죽었다. 지난 50년 간 의사로 일하면서 그토록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죽음을 이기며, 세상을 이깁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사탄과 맞서, 죄와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사탄의 무기가 죽음인데, 어떻게 부활의 믿음 없이 그들을 상대하여 싸울 수 있습니까? 무기 없이 싸울 수 없듯, 부활의 신앙 없이 사탄과 죄와 싸울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죽음의 졸개인 모든 염려와 근심을 이기며, 우리의 초점을 여기가 아닌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에 맞추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말씀의 기초 위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있어야 실은 주님의 모든 말씀, 여기 이 말씀을 믿고 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부활의 신앙 없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야 할 때, 부활을 믿는 이만이 담대히 그 밀알이 되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며, 속량할 수 없는 죄를 속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풍성한 열매로 맺어질 것을 믿기에, 성도만이 말씀 앞에 자신을 죽여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와 세상이 다른 이유, 그것은 이 지점입니다. 부활의 현실을 사느냐, 죽음의 현실을 사느냐.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세상을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우리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복입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승리요, 성공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들이 죽음의 저주 아래 있지 않으며, 그들을 짓눌렀던 죽음이 이미 죽었음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는 부활을 증언하고 살아내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성도의 삶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 한 순간 한 순간이 부활을 향한 시간임을, 성령이 다스리는 부활의 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두 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21절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입니다. 누구를 어디로 왜 보내십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을, 죽음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에게로, 그들에게 부활을 증언하라고 보내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에게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낸다. 가서 부활을 살아내고 부활을 선포하여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부활을 고백하게 하십시오. 담대함으로 부활의 현실을 살아가십시오.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죽음을 깨뜨리고 예수를 일으키신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부활의 자녀답게 더 담대히 세상 앞에 바로 서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하십시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며 사망의 권세 아래 눌린 이들에게 이미 그 죽음이 죽었음을 선포하십시오. 이미 하나님나라가 부활을 믿는 저와 여러분 안에, 여기 와 있습니다. 이 부활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내 삶에 어떻게 부활이 증거되어야 할지, 함께 고민하며 살아가십시다. 예수를 따라 사는 삶이 때로 버겁고 힘들지만, 성도의 수고는 여기서 끝나는 허무한 수고가 아닙니다. 부활의 때 반드시 그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로 담대히, 부활로 거룩하게 이 이 땅을 살아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모습 하나하나가 부활의 현실이 되게 하십시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이 주의 부활을 전하고 선포하는 하나님나라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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