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무덤에 머물러" 2014년 4월 19일 새벽기도회 설교 (사순절40)
2014-04-1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8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40419 토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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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장 57~66절, 사순절(40) 무덤에 머물러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NZRIs96nce/20140419__40_.html
사순절 마흔 번째 말씀으로, ‘무덤에 머물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통상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 전,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이고, 우리에게는 부활절 전날 토요일인 오늘을 성 토요일이라 부릅니다. 교단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아직 무덤 속에 계시기 때문에 보통 오후까지는 주님의 죽음과 수난을 묵상하기를 계속하고, 밤에는 부활전야, 곧 ‘Easter night’이라고 해서 부활절의 준비시기로 지냅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이 시간은 아직 주님이 무덤에 머물러 계신 때이고,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과 삶 역시도 그 주님의 무덤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그런 시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본문에는 돌아가신 주님 곁에 머물렀던 몇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아직 무덤에 머물러 계신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어제 저녁이 되겠습니다. 주님이 운명하시고, 날이 저물어 갈 무렵 예수님을 따르던 한 제자,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기 위해 빌라도에게로 갑니다. 언젠가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의 경우 가족이나 누가 따로 가져가지 않는 한 공공쓰레기장에 내버려지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많은 경우 뒤에 있을지 모르는 피해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시신이 버려지곤 했습니다. 오늘 주님의 시신도 그러할 뻔 했지요. 예수님의 12명 제자들 가운데 속한 사람이 아닌 요셉이 그 일을 자청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주님의 시신을 받아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본래 자신이 죽고 난 후 사용하려 했던 바위 무덤에 안치합니다. 그리고 직접 사람을 통해 그 무덤의 입구를 돌로 막아놓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죽음이 온전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죽음이 온전히 마무리되었다고 말씀드린 이유를 여러분 혹시 짐작하시겠는지요? 십자가 위에서가 아니라, 무덤에 머물러 돌로 입구가 닫힌 이때에 주님의 죽음이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 주님의 부활에 필요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주님의 시신이 그렇게 버려졌더라면, 그래서 시신의 정확한 위치와 정확한 상황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아마 부활에 대한 수많은 의심과 논란이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신을 도둑질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그저 부패하여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아마도 온전한 부활의 기사가 전해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주님께 내어드림으로써 그와 같은 부활의 문제들을 다 제거해 놓았습니다. 이제 부활에 필요한 모든 조건이 구비되었고, 그 상황은 온전히 보전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그 준비를 함께 거들게 되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따라, 경비병들로 하여금 무덤 앞의 돌을 인봉하고 굳게 지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목적은 달랐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덤을 준비한 요셉이나 무덤을 지키게 한 유대 지도자들이나 모두 동일하게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주님의 무덤가에 머물던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아주 조그맣게 등장합니다. 본문 61절의 말씀인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여기 다른 마리아라고 기록된 여인은 마가복음에는 요세의 어머니라고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세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야고보가 아닌 다른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고, 여기 야고보와 요세는 알패오의 아들이지요. 어쨌든 이 두 명의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 곁에 머무릅니다. 바로 이 두 여인이 내일 아침, 그러니까 주님이 부활하신 날 새벽에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이 무덤을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두 여인에 대해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셨을 때에도 늘 주님의 곁에 머무르며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주님의 무덤에 가장 가까이, 그리고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여인들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머문다는 말에 잠시 우리의 시선을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 곁에 머문다. 주님의 몸에 머문다. 주님의 무덤에 머문다. … 오래 전 한 유명한 가수가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요, 가사를 조금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샌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 한순간 스쳐가는 그 세월을,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주오.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을, 사랑은 영원히 남아 언제나 내 곁에.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샌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참 오늘 같은 성토요일에 듣기에 너무나 은혜가 되는 노랫말입니다.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숨결이 느껴진 곳에. 내 마음 머물게 하여 주오. 그대 긴 밤을 지샌 별처럼, 사랑의 그림자 되어 그 곁에 살리라.” 나를 위해 고난당하고 나를 위해 죽은 예수를 위해 우리가 하는 고백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진실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주님 곁에 머물기는커녕, 우리 안에 머물기 원하시는 주님을 내치기에 급급한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숨결이 있는 곳은커녕 나의 유익과 재미와 욕망과 돈의 숨결이 있는 그 자리에 머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참 가요 하나에도 부끄러워지는 우리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기 위해, 더 우리 곁에 온전히 머물러 주시기 위해, 그렇게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믿음을 더하십니다. 잠시 잠깐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위해 주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화려하고 아름답고 탐스러운 그 어딘가,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고난, 십자가, 죽음, 이 모든 것들은 머무르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두려운 그런 곳인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주의 깊에 살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머무름에 대한 묵상 가운데, 문득 구약의 한 여인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그녀는 인간적인 소망이 다 끊어진 자신의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그 곁에 머물며 그렇게 그녀를 붙쫓았던 여인, 바로 이방인 여인 룻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가 있었지요. 이방 나라에서 나오미의 남편, 그리고 두 아들이 모두 사망하고 이제 나오미는 그 두 며느리를 떠나보냅니다. 오르바라는 이름의 한 며느리는 그렇게 나오미를 떠나지요. 그러나 룻은 이렇게 말하며 나오미 곁에 머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기1:16~17) 결국 나오미와 함께 룻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리고 거기서 보아스를 만나 룻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룻은 결국 다윗의 증조할머니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남아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자리, 불편하고 답답하고 어두운 자리, 거기 머물며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오늘도 그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야 하며, 누구 곁에 머물러야 하는지, 말입니다. 오늘 주님의 무덤 곁에 머무르던 이들도 결국 주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전하는 귀한 은혜를 입습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주님 곁에 머물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머물러 있는 이들이 결국 주께 쓰임 받습니다. 어디 높은 자리의 사람 곁에 머물러도 기쁨이 있고 남는 것이 있는데, 우리 주님 곁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주님 곁에 머물 때, 거기 온전히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그리고 사명이 있음은 당연한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 곁에 머물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곁에 머물게 하십시오.
부디,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하나님 곁에 머물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담아 이 시간 찬송 한 곡 함께 부르시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찬송가 322장(통357)입니다. (찬송)
이제 사순절이 모두 끝났습니다. 길게 보이던 시간, 어느새 이제 부활절입니다. 주님 곁에 머물러 그 곁을 지키는 시간, 길고 지루해 보여도, 곧 주님 오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과 머무름에 대해, 우리의 머무름이 어디였는지에 대해 심판하실 때가 곧 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오늘 부른 찬양처럼,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 안에 거하고 머무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