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다 이루기 위한 십자가" 2014년 4월 18일 새벽기도회 설교 (사순절39)

2014-04-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8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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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8 금요일 새벽기도회  ----------------------------------------------------- 요한복음 19장 23~37절, 사순절(39)  다 이루기 위한 십자가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MxGwqVATba/20140418__39_.html 사순절 서른아홉 번째 말씀으로, ‘다 이루기 위한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룬다’는 말을 매우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이루마라는 한 유명한 뮤지션의 이름과 그분의 누나 ‘이루다’라는 이름도 있습니다만, 이룬다는 말은 보통 중요한 일을 완성함을 뜻합니다. 꿈을 이루고, 소망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고, 대업을 이루고, 그렇게 가장 좋은 것들에 이룬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성공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동사가 바로 ‘이루다’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목숨이 다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말씀을 하십니다. 죽기 전에 다 이루었다는 말을 혹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도무지 그 말과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참혹한 모습 그 자체입니다. 주님은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심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저주를 받아, 발가벗겨진 채 나무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더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비참한 모습의 하나님을 봅니다. 세상이 보면 다 실패라고, 다 망했고 끝났다고 할 그때 주님은 다 이루었다 하십니다. 실패도 이보다 더한 처절한 실패가 없는데, 말입니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가장 피동적이고, 가장 무기력한 모습으로 세상에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까? 주님이 처한 상황, 그 모습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과 함께 오늘 주님은 고난의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보내시고 계십니다. 이룬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와 직접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냥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이 모든 십자가의 일을 친히 이끌어가셨고, 결국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 모두 자신이 원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하고 늘 죽이려 했던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도 자신들이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여겼을 것이고, 예수를 팔았던 가룟 유다도, 또 오늘 주님을 못 박고 그 옷을 나눠 가진 병사들도, 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저 그 일을 당한 사람으로서, 힘없이 거기 끌려와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성자께서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어 내신 일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모든 것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다 이루신 것이지요. 십자가, 곧 나무에 달리는 것부터가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신명기 21장(23절)의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고 율법은 규정합니다. 그리고 이는 갈3:13의 말씀이 증언하는 것처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주님이 친히 그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23절 이하에는 예수님을 못 박은 후 예수님께서 입고 계시던 겉옷과 속옷을 모두 군인들이 나눠가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속옷이 이음새 없이 통으로 된 옷이었다는 다소 뜻밖의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형수에 대한 로마의 관례였다고 전해지는데요, 이 또한 시편22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또한 군인들이 아닌 하나님의 이루심의 결과임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인, 목마르다는 말씀 또한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시편 69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드시지도 않는 신포도주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군인들은 관례대로 십자가 위의 죄인들의 다리를 부러뜨림으로써 그들의 죽음을 앞당기려고 했지만, 이미 주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숨을 거두신 뒤였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예수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게 됩니다. 이 또한 유월절 양의 규례를 기록한 출애굽기 12장의 말씀, 곧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병사가 찌른 창에 주님의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복부에 피와 물이 함께 고여 있었다는 것은 죽기 전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이미 겪은 것이라는 한 의사의 설명이 기억이 납니다만, 그러나 그 또한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셔서 왜 그렇게 죽으셔야 했는지를 말씀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피와 물. 주님이 흘린 그 피로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화해의 관계 가운데 회복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물은 성령,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한 거듭남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주님의 몸에서 나온 물은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 역시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민수기의 말씀을 그대로 응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이루심이었습니다. 본문 30절 마지막에 보면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마지막 표현, ‘영혼이 떠나가셨다’는 우리식의 표현입니다. 헬라어를 그대로 옮기면 ‘그가 영혼을 넘겨주셨다’ 이렇게 번역되는 말씀입니다. 그가 영혼을 넘겨주셨다. 무슨 뜻입니까? 이 모든 일을 주님이 스스로 결정하고 결단하고, 온전히 성취하셨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 순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죽음, 그것이 주님의 자발적인 선택과 순종의 결과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죽임 당하심을 친히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침 뱉고 조롱하는 이들을 저주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온 세상 앞에 발가벗겨진 채 저주받은 자로 죽어가는 그 자리. 그 감당키 어려운 수치와 부끄러움, 그리고 참혹한 고통과 배신의 아픔, 그 모두를 주님은 기꺼이 선택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거기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저 십자가의 고통을 잠시 잠깐 참는 것으로 끝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고통을 그대로 다 받으시고자 하셨고, 성경이 예언한 모든 메시아의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당신의 죽은 몸을 통해서도 성경의 말씀을 응하려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왜 주님은 그토록 다 이루셔야 했습니까? 왜 주님은 그렇게까지 온전히 다 성취하시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기울이셔야 했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신이 우리를 구원할 오직 한 분 메시아이심을 우리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로 예수가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다른 가능성도, 어떤 다른 의심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으시기 위함입니다. 혹시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그 작은 의심의 조각도 남겨두지 않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온전히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다 이루시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여기 이루었다는 헬라어는 ‘테텔로스타이’라는 한 단어입니다. 이는 본래 상업적인 용어로 모든 물건 값을 다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모든 죄의 값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두 지불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남은 것은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 영생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남은 일이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친히 다 이루셨다는 이 말씀을 믿고, 그 구원을 받아 누리는 것만 남았습니다. 괜히 더 지불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무언가를 더 하려 하지 말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도 마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친히 다 이루셨다는 그 일에 더 온전히 주목하고, 깊이 헤아리며, 더 주님의 은혜를 뼈저리게 느끼고 누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이 완전한 성취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다 이루셨음 더 온전히 믿고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본래 성금요일에 교회와 성도들은 별도의 예배 시간을 가지고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고난에 대한 기록을 함께 낭독하며 묵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검은 천을 두르고 이를 부활절 아침에 거두기도 합니다. 동서방의 모든 교회들이 함께 이날을 기념하며 단식함으로 거룩하게 보냅니다. 이제 그 성금요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그 주님의 이루심을 온전히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가능하시다면 금식도 하시고, 말씀드린 다른 어려운 이웃과 교회들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시간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들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십자가의 주님을 더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함께 말씀을 나누고 예배할 수 없지만, 멀리서나마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 이루신 주님의 십자가, 거기 우리의 마음이 머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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