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2019년 3월 17일 주일 설교

2019-03-1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0317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9~13,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6) 본문 12절의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되 온전히 그들과 연합하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신 예수님을 향해, 아버지께서 하늘을 찢으셨고, 그 사이로 성령이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셔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놀랍게도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시면,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여기 ‘곧’이라는 부사 [유뒤스]는 마가복음에 약 40회 정도 등장하는, ‘마가’ 특유의 표현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 안에 임재하신 성령께서 곧장, 긴급하게, 강한 의지로 그를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몰아내셨다’는 동사 [에크발레인] 역시 이러한 다급하고 강권적인 인도하심을 강조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시는 것처럼, 광야로 가신 예수님은 거기서 사십 일을 금식하며 지내십니다. 당연히 사막의 들짐승도 주님과 함께 있었고, 천사도 그런 주님 곁에 머물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천사가 주님을 수종 들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표현이 되지는 못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 하시며, 이 땅의 성도들에게도 각자의 천사가 있어, 그들 대신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8:10). (다만 그 수(數)가 복수여서, 예수님의 주 되심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광야로 가신 주님에 관해 우리가 보통 가장 주목하는 것은 주님이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짧게 언급되어 있는데요, 그럼에도 오늘 마가복음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의 시험에서 살짝 옆으로 비켜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단 다른 복음서에 비해 내용이 너무 짧습니다. 본래 오랜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손이 짧은 마가’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마가가 손에 장애가 있었다는 견해와 그의 간결한 문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문체가 간결한 것도 물론 맞지만, 사실 본문은 단지 짧고 간결하게 기록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주님의 시험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데요, 마가복음은, 사실 예수님의 시험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오늘 마가는, 그 시험을 어떤 하나의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으로 그려넣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2, 13절의 짧은 내용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의 시험을 포함하고 있는 조금 더 큰 그림이 보이실 겁니다. 마가의 초점은 시험이 아니라, 네 바로 시험의 배경이 되는 ‘광야’입니다. 12절, 13절에 반복되는 명사가 ‘광야’이고, 주님이 사탄에게 받으신 시험은 그 ‘광야 경험’의 한 부분입니다. 광야에는 시험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시험은 사십 일간 이어진 광야의 생활과 금식의 한 부분이었을 뿐입니다. 거기엔 사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드린 대로 들짐승과 천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시험을 포함한 더 큰 그림을 마가는 그려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 그림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시험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 광야,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대단히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간을 떠올리기 쉽지요. 요즘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찬송 중에 ‘광야를 지내며’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노래의 처음 가사가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네, 광야는 이처럼 막막한 상황 가운데 고독하게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광야’의 모습은 사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입니다. 여러분, 혹시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 시인의 ‘광야’라는 시 기억나시는지요?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여러분 이 시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신지요? 단순히 고난이다, 하는 느낌과는 다르지요? 어딘가 모를 장엄함과 신성함이 느껴지고, 힘겨운 현실이 있으나, 다시 그 현실을 새롭게 하려는 힘과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네, 광야는 그런 곳입니다. 하늘이 처음 열린 것 같은 원형 그대로의 세상이 보존된 순수한 곳, 소리도 없고, 사람도 없는 광막한 곳이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을 새롭게 할 힘과 에너지로 가득 찬 곳.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하는 초인, 혹은 하나님나라를 열고자 하는 그리스도가 그 나라의 새로운 시작을 목 놓아 외치는 곳, 거기가 바로 광야입니다. 고난이 아니라 창조의 공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사람들 많은 일상을 떠나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그렇게 광야를 생각하면,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계신 이 광야라는 배경은, 우리에게 낯익은 어떤 하나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지 않습니까? 혹시 본문의 모습에서, 성경 속 기억나는 장면이 없으신지요. … 네, 지금 13절의 광야는, 다름 아닌 아담이 있었던 에덴의 모습과 정확히 오버랩 됩니다. 환경이 낙원에서 사막으로 바뀌었을 뿐, 사탄의 시험과 들짐승, 그리고 천사들의 존재까지, 세상이 창조되던 그때의 원형(原形), 그 에덴의 모습입니다. 에덴의 재현으로 이 광야를 바라보면, 왜 주님이 거기로 가셔야 하는지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다시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합니다. 모든 환경과 조건이 부족함이 없이 갖춰진 낙원에서조차 실패한 인간의 역사를, 이제 주님은 가장 혹독한 광야의 환경에서 승리의 역사로 바꾸십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이제 가까이 온 하나님나라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새 에덴인 셈입니다. 어두운 현실을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제 광야에서 태동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첫 아담의 계보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승리한 새 아담의 뒤를 잇는 믿음의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금 마가는 그려내는 것입니다. 네, 성경의 광야는 그런 곳입니다.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탄도 시험하는 존재로 지금 주님과 함께 광야에 있습니다. 시험을 좋아하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주님 또한 시험을 당하셨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시험에 관한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한 시험, 그리고 이 땅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은, 참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시험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다른 시험들처럼, 시험에 통과해야, 합격해야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을 누리는 상황 가운데 이 시험이 진행됩니다. 자격을 얻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 아니라, 이미 그 자격을 얻었기에 ‘누리는’ 시험입니다. 이미 아들이기에, 자녀이기에, 이미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그래서 치러야 하는 시험,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앞에 놓인 여러 시험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당연히 이것은 아무나 치를 수 없는 시험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에게만, 그리고 광야로 나가 하나님의 새로움에 동참하려는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시험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야고보서 1:2) 말씀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그 시험이 우리를 떨어뜨리려는 시험이 아니라 확증하는 시험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하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온전하고 구비하여, 그 새로움 앞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만약 성도에게 그 시험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입니다. 나는 사탄의 시험도 없고, 신앙의 싸움도 없다, 그저 평안하다고 한다면, 그건 둘 중 하나이지요. 내가 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이미 시험을 받고 있는 상태이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거나,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둘 다 아니시길 바랍니다. 광야와 시험 있는 것이 당연함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광야의 경험을 통해 이제 하나님나라의 모든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광야와 시험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증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나라의 존귀한 일들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시험의 본질과 그 내용이 뭔지, 어떤 문제가 출제되는지, 그 기출문제를 살펴볼 차례인데요,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첫 시험만 잠깐 살펴봅시다. 여러분 사탄의 첫 시험이 무엇입니까? 네, 금식하고 배고플 테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하는 겁니다. 물론 배고픔 자체는 사탄의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금식은 주님의 선택이었고, 여기엔 더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먹을 게 없어 금식하신 게 아닙니다. 가난과 굶주림은 시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성도를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금식을 해서 사탄이 시험한 것도 아닙니다. 시험은 피할 수 없었고, 오히려 금식을 통해서 주님은 그 ‘예정된’ 시험을 준비하셨고, 또한 이기셨다는 것,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그렇다면 금식하고 배고플 테니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 왜 시험입니까? 배고파서 떡 만들어 먹는 건 당연한 것입니다. 40일이나 금식하셨는데 광야에서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배를 채우겠습니까? (금식 사흘째부터는 그냥 누워 있는 겁니다.)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먹으라는 것이 왜 시험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얼마든지 그리 해 드실 수 있고, 또 그것이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사탄이 시험하지만 않았어도, 주님은 그렇게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을지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건 돌로 떡을 만드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사탄이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것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배고프니,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라는 것 때문에 주님은 그리 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이 찢어지고 이미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런데 그걸 증명해보이라고 사탄이, 또 세상이 요구한단 말입니다. 어떻게요?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기적으로, 환경을 바꾸는 힘으로, 기도로,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그걸 시험으로 간파하시고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이 그와 같은 능력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향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희롱하여 말합니다. 거기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겠다고,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는 자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내려온다면 너를 인정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역시 사탄의 같은 시험입니다(이 시험을 다룬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마틴 스콜세지, 1988)이라는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내려올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아들 됨을 드러내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두 시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성도가 치르는 시험은, 할 수 없는 걸 해내는 어떤 능력의 시험이 아닙니다. 사탄은 주님께, 주님이 할 수 없는 걸 해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고, 또 당연히 해야 할 것인데, 그걸로 네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증명하라 하니,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하라고 하여 시험인 게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 방법으로는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고 참아야 하는 시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하는 시험의 특수성입니다. 살다보면 ‘아휴 그냥, 이 걸 확!’ 하는 그 순간 있습니다. 그게 시험입니다.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성도의 성도 됨은, 돌을 떡으로 바꾸는 기적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흥분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 때가 아니라, 기적 같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할 때가 아니라, 기적이 없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나를 통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음을 믿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걸 그냥 다 엎어버려! 내가 누군지 좀 보여줘!’ 이게 아니라, 그걸 참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마지막까지 걸어가는 것,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고, 거기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할 수 있는데 안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다 그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누릴 수 있는 절제하는 것, 보복할 수 있는데 보복하지 않는 것, 똑같이 화낼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 자랑할 수 있는데 자랑하지 않는 것, 거부할 수 있는데 받아들이는 것, 그 싸움을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해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하나님나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환경의 문제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어 형통하고 잘 되고 성공하면,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그와 같은 기적으로 확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삶과 신앙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마치 우리 인생, 우리 믿음의 승패가 거기 달린 것처럼, 오직 세상의 형통으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려 합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그것이 우리 믿음의 증거요,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내리는 평가와 이야기들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판단 받으려 합니다. 아닙니다. 그건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광야로 몰아가십니다. 세상의 소리, 사람들의 소리가 멈춘 곳, 세상의 거짓된 빛들이 꺼진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거기서 우리의 실체와 우리의 진면목을 보게 하십니다. 내 밑바닥을 볼 수 있고, 내 신앙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들짐승과 사탄, 그리고 천사만 있을 뿐, 우리가 의식하며 살았던 모든 세상의 시선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광야를, ‘미드바르’라고, 하나님의 말씀, ‘다바르’만이 존재하는 신적 공간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진짜 모습을 비추어 직면하는 곳, 거기가 광야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그곳으로 끌고 가십니다. 광야는 두려운 곳입니다. 그 거친 환경과 조건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말씀 앞에 서 있는 나를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굶어죽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의 삶을 살았습니다. 돕는 천사도 있습니다. 고통은 다른 데 있습니다. 내 민낯을 직면하는 일, 그것이 더 큰 고통입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 내가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광야를 피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광야는 우리에게, 에덴의 아담 말고도 또 하나의 낯익은 장면을 떠오르게 하지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오늘 본문의 성령과 마찬가지로, 급하고 주도적이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께 들린 직후 광야로 이끌리듯,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이 확인된 직후, 광야로 인도됩니다. 본문의 ‘몰아내신지라’는 표현이 정확히 어울리지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로 나가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잠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세례요한이 먹었던 메뚜기와 석청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먹이십니다. 주중에 읽은 느헤미야 말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이 부족함 없는 세월이었음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습니다.”(9:21~22). 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게 광야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나에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했을 뿐임을 그들은 광야에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네, 광야는 그런 곳입니다. 우리의 실체를 확인하는 곳이며,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곳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사랑하고 사는 삶인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려 하는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한갓 종교인에 불과한 것인지, 광야는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성령은 계속 우리를 광야로, 그 미드바르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지요. 그런데 그는 그 회심 이후 어디로 갑니까?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다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가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소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찾아가지도 않고, 그의 스승 가말리엘의 조언을 받으러 가지도 않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합니다(갈 1:17). 아라비아가 어디입니까? 네,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같은 갈라디아서에는, 바로 그 아라비아에 ‘시내 산’이 있다고 바이야기하지요(4:25,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 네, ‘미드바르’로 간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과 말씀 앞으로 갔습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거기서 광야의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과 똑같이, 자신의 새 삶을 준비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신앙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 성도는 스스로 알아서 광야로 나아갑니다. 주님은 사역하시는 내내 그리 하셨습니다. 저 먼 광야까지 갈 수 없어도, 주님은 삶의 자리에서 항상 조용한 곳으로, 산으로, 골방으로, 스스로 사람에게서 물러나 광야의 시간을 가지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거기서 다시 나 자신을 말씀 앞에 비추어보고, 진짜 자신을 직면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광야를 피하려고만 하지 않습니까?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억지로 성령의 인도하심 앞에 버티고 서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광야의 경험 자체를 자주 외면해 버립니다. 광야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히려 더 분주한 삶으로 도피합니다. 말씀 앞에 나를 비추고 나를 직면하는 게 아니라, 시끄러운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숨어버립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로 대신합니다. 나의 실체와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나 두려운 일인 것이지요. 그냥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평가하는 ‘나’를 진짜 나인 걸로 착각한 채 살아가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안 됩니다. 광야를 외면하는 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선한 일이,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능력이 시작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이 광야를 통과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광야 없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수 없고, 광야 없이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수 없습니다. 광야의 고독과 시험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놓인 상수(常數)의 현실임을 여러분 기억하시고, 광야를 피하지 마시기를, 스스로 그곳을 선택하고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광야의 경험은 결코 단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서 다시는 주님 옆에 얼씬거리지 못한 게 아닙니다. (병행본문에 해당하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오늘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눅 4:13) 네, ‘얼마 동안’입니다. 잠시 물러갔다가, 다시 다가옵니다. 십자가까지 따라옵니다. 광야와 시험은 성도의 일평생에 걸쳐 계속됩니다. 사탄은 잠시 물러갈 뿐, 우리에게 반드시 돌아옵니다(I will be back!). 예수님이 경고하신 대로, 때로는 떠난 마귀가 더 세고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오기도 합니다(마 12:45). 사탄도 억울하고 미칠 지경이지요. 자기 손에 놀아나던 사람들이, 도저히 하나님나라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어느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얻게 됐으니, 그래서 하루아침에 그들을 더 이상 쥐락펴락 할 수 없게 됐으니,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억울해서라도 물러서지 않고, 절대 포기치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 가운데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과정 가운데 끊임없이 다가와 시험하고 미혹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때마다 광야로 나가십시오. 광야와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들을 마땅히 받아들이십시오. 할 수 있으면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그 다가올 시험을 대비하십시오. 그래서 멋있게 시험을 이기십시오. 사람들이 놀라고 흥분할 수 있는 기적을 경험할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다 해낼 때가 아니라, 떡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남을 답안지에 잘 써 넣으십시오. 부디 그 시험 잘 통과하셔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비로소 시작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