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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2019년 3월 3일 주일 설교

2019-03-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2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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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3 주현절 후 여덟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1~11,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4) 본문 8절의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를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소망합니다. 흔히들 세례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단 6개월 먼저 태어나, 예수님과 중첩되는 삶을 살았고, 따라서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충분히 신약 세계의 사도이자 성도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는 신약의 첫 선지자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큰 시간의 격차가 있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구약의 마지막 성경 말라기서는, 언젠가 이스라엘 가운데 (공간적으로는) 하나님나라, (시간적으로는)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 그리고 그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다시 백성들에게로 내려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것을 예언함으로 끝납니다. 그것이 구약 말씀의 마침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날,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인데, 그 전에 엘리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돌이키게 하고, 그 날을 준비케 할 것에 대한 말씀으로 구약의 말씀이 마무리됩니다. 그럼 왜 굳이 엘리야 선지자일까요? …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죽은(?) 유일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산 채로 하나님나라에 받아들여진 엘리야였기에, 다시 한 번 하나님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어졌겠지요. 본문이 세례요한의 모습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그 때문입니다. 나중에(14절 이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 모습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는 것과는 다르지요. 외모를 설명함으로써 누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까? 네, 엘리야입니다. 실제로 마가가 묘사하는 요한의 모습은 엘리야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6절에 보면,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열왕기하 1장 사람들이 엘리야의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나오는데요,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모습만 이야기를 했는데도 당시 보고를 받은 아하시야 왕은 그가 엘리야임을 알아차립니다. 물론 세례요한은 털이 많았던 엘리야와는 달리, 낙타털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만, 누구나 세례요한을 보았을 때 엘리야에 대한 데자부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처음엔, 마가가 이렇게 세례요한의 입성을 묘사하는 게 사실 조금 우습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주중에 QT 묵상을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게 됐습니다. 기억나시겠지만, 지난 수요일 예수님께서 제자 3인방과 함께 변화산에 오르신 대목에서,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세례요한이 바로 그 예언된 엘리야가 맞다고, 그가 나보다 먼저 와서 내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했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이 설명해주신 후에야 비로소 세례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임을 깨닫습니다. 네, 분명 엘리야로 온 것이 맞는데, 사람들이 그의 역할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니, 그가 예언된 그 엘리야가 맞다는 것을, 그의 외적 모습을 통해서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세례요한이 예언된 엘리야인 것이 중요합니까? 네, 그의 말과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가 증언되어야 하고, 주님 오심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례요한을, 구약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그 ‘선지자보다도 더 나은 자’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마 11:9). 요한은 마지막 구약의 선지자로서, 가장 위대한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신약이 아닌 구약의 선지자인 이유는 잠시 후에 세례의 문제를 다룰 때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고요, 그가 구약의 다른 어떤 선지자들보다 더 위대한 이유는, 멀리서 오시 주님을 보고 기뻐했던 그들과 달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보고, 증언하고, 몸소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네, 요한은 가장 위대한 구약의 선지자였습니다. 물론 세례요한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위대했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증언하고, 예수를 보게 하고,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것, 그 위대한 사명으로 인해 그는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존귀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이 존귀하면 그 사람이 존귀해집니다. 그 존재 자체로 존귀한 것이 사람이지만, 그가 맡은 사명은 더욱 그를 존귀하게 세우며, 그 존귀함을 드러내 줍니다. 올 해 주제 말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는 말씀은, 존재의 존귀함과 그 사명의 존귀함이 항상 분리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의 존귀함을 자신이 행하는 일들로 인하여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존귀한 자임을 믿으십니까? 주님은 여러분을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선언하십니다. 명령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됐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빛이 되기 위한 모든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셨으니, 존귀한 자의 그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믿고, 빛과 소금 자체로 비추며, 맛을 내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계속 빛이 되려고만 하고, 그 빛을 비추지를 않습니다. 그 빛을 저 아래 감춰둡니다. 큰 보자기 안에 숨겨둡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빛이 되게 해달라고, 소금이 되게 해달라고. 아니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얼마나 큰 자인지를 모르면서 큰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너희는 이미 빛이니 그 빛을 비추라고 하십니다. 더 큰 빛이 되려고 하지 말고, 더 존귀한 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지금도 충분히 빛이니, 존귀하니, 일어나 그 빛을 발하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세상은 빛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은, 남들보다 높아지고 남들의 영광을 받는 것이 존귀함이라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미 스스로 존귀하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질병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처럼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처럼 되라는 유혹에 넘어갑니다. 이미 하나님 같은 존재이니 그 영광을 비추라 하시는데, 그 눈을 뜨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와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야 겨우 실감이 날까말까 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세례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 7:28)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바로 이어서,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하나님나라에서는, 어째서 저와 여러분이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입니까? 네, 요한은 주님의 오심과 그 나라를 준비한 자인 반면, 저와 여러분은 그 나라를 실제 살아내고, 그 나라를 증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올림픽의 성화 봉송 주자와 실제 올림픽 대표선수의 차이라고 할까요, 연예인이나 정치인, 혹은 은퇴한 선수들이 성화를 봉송하는 것도 영광이지만, 올림픽의 진짜 영광은 경기를 뛰는 선수들에게 있는 것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세례요한이 그저 성화 봉송 주자일 뿐이라고, 실제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반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와 있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내는, 실제 경주자라고 말씀하시고, 그 경주를 영광 가운데 마쳐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선수이지 관중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비평하고 판단하는 이들이 아니라, 실제 그 일을 감당하는 이들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부름의 상을 좇아 열심히 뛰어야 하고, 꼭 메달을 따지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뛸 수 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존귀한 자리로 부르셨고, 주의 존귀한 일을 맡기셨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일을 분별하고 끝까지 완주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비추는 자가 존귀한 자입니다. 얼마나 큰 빛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 그 빛을 얼마나 비추고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존귀해지기 위해 하시는 일 말고, 이미 존귀한 자의 존귀한 그 일, 누군가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고백교회, 교회를 섬기는 교회) 지난 수요일 말씀에서, 악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의 시간을 구원하는 방법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라 했는데요,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빛이 되기 위해 분주한 삶이 아니라, 이미 빛임을 믿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고민하고, 시험하는(엡 5:10), 실제로 이루어가는 존귀한 삶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의 세례요한과 저와 여러분, 신약의 성도들 사이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이 더 그어져 있는데요, 오늘은 그 부분까지 마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 나오는데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세례입니다. 사실 ‘세례’[밥티스마]라는 말은 신약에 와서 갑자기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방인이 정식으로 유대교를 받아들이고자 할 경우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할례라는 공적 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형식의 입교 절차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방인인가요, 아니면 유대인인가요? 네, 유대인입니다. 매우 독특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단순히 유대인이 되기 위한 표지가 아니라, 그 유대인들 중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표지, 다른 말로 ‘남은 자’의 표지였습니다. 말라기에 예언된 것처럼, 엘리야는 그는 메시아의 도래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촉구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었고, 세례가 바로 그 돌이킴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4절에 보면,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그의 세례가 직접 죄를 사하는 세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에 직접 걸리는 건 ‘회개’이지 ‘세례’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껏 어떻게 죄를 사함 받았습니까? 죄의 용서가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습니까? 네, 간단히 말해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 제사를 통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피 흘림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요한의 때에 그 제사가 여전히 유효했습니까? 네, 유효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대제사장이 있었고, 거기서 백성들은 율법이 정한 대로 속죄와 정결의 규례를 따랐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런 죄 용서의 제사는 아닙니다. 세례에 그런 기능은 없습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죄가 용서 받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세례는 하나님의 용서에 뒤따르는 우리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백성이 되었으니, 과거의 삶과 완전히 단절된 새 삶으로의 방향 전환, 곧 전향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 언급한 것처럼, 세례는 일종의 전향서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세례 안에도 포함된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물로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네, 그것이 일종의 전향서입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전향하는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러니까 이것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받는 세례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었음을 믿고 드러내는 일종의 사후(事後) 표지입니다. 단순히 내가 지은 어떤 죄를 씻고자 함이 아니라, 내 삶 전부를 하나님께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철저하게 돌이키겠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 역시 그런 고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세례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같은 물의 세례지만 요한의 세례에는 담을 수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구약의 사람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세례의 의미는, 사도 바울이 증언한 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인데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새 사람의 부활로 거듭났음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그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영적 의미입니다. 아울러 그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 공동체와의 연합을 낳습니다. 주님과 연합됨으로써, 주님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 또한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 교단에서는 세례(洗禮, 씻는 예식)가 아닌 침례(浸禮, 잠기는 예식)를 매우 강조합니다. 교단의 이름까지 ‘침례’라고 부르면서 말입니다(본문에 ‘세례’라는 말 앞에는 모두 ‘2)’라는 표시가 되어 있고, 아래에는, ‘헬, 또는 침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듭난다는 영적인 의미가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저는 비록 장로교 목사이지만, 상당부분 공감이 갑니다. 과거에 선교 차 동남아시아의 한 교회(베트남이던가, 캄보디아이던가 …)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높이 올라와 있는 강대상 전체가 침례단으로 되어 있는 걸 본 기억이 납니다. 통처럼 생긴 구조인데, 이쪽 끝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세례자는 반대쪽 출구까지, 세례자는 잠수하여 건너가게 됩니다. 옛 사람의 죽음이 무엇이고, 거듭남이 무엇인지, 정말 몸으로 기억할 수 있겠지요. 초기 교회에서도 세례는 그러한 거듭남을 강조하여 행해졌습니다. 세례 때 수세자가 모든 교인들 앞에서 옷을 벗은 채 물과 기름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만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단지 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 그런 마음으로는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적신으로 태어난 갓난아기처럼, 세례자들은 벌거벗은 채 세 번 물 속에 잠기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옴으로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새 삶을 시작할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삶과 분명하게 단절하여,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 이제 더 이상 세상의 백성이 아니라, 주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자신과 교우들 앞에 확증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한 번의 세례만이 아니라, ‘날마다 죽는’ 삶의 고백을 강조했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법, 부활을 사는 길은, 도리어 ‘날마다 죽는 것’임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놀라운 고백이지요. 내가 드러나고, 내가 영광을 받는 삶이 아니라, 이미 충만한 영광을 누리는 가운데 그 영광의 빛을 비추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향해 매순간 힘껏 돌이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 존귀한 자로 세우시고, 존귀한 일을 꿈꾸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성령의 음성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귀를 기울이시고, 그 말씀을 분별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들을 생각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으면서도, 구약의 성도들처럼, 성령의 능력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삶을 사로잡으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십시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나라의 관중이 아니라, 영광스런 경주자로서, 최후 승리 얻을 때까지, 빛임을 믿고 힘써 비추는 삶을 사십시다. 나의 의와 자랑이 아니라, 나는 죽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길을 힘껏 선택하십시다. 그래서 삶의 매순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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