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출애굽기 강해 20.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2019-02-1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90213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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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0장 21~29절,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 설교 음성파일 : 오늘은 설교 음성이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메뚜기 재앙에 이어 아홉 번째 재앙으로 흑암의 재앙입니다. 이번에는 바로와 모세가 사전에 대면하는 장면이나 경고의 메시지 없이 곧장 재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모세가 그대로 행하자 캄캄한 흑암이 3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는데, 흑암은 땅 위에 있습니다.
이 흑암은 대단히 깊은 어둠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없고, 두려워 집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고, 그러자 바로가 모세를 부릅니다. 너희와 자녀들까지 다 나가라고, 메뚜기 재앙에서 제시한 타협안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조건은 붙습니다. 너희의 양과 소는 두고 가라고 이야기합니다(24절).
그러나 모세는 그 짐승이 다름 아닌 하나님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이니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고, 그 중에서 어떤 짐승으로 예배할지는 거기에 가서야 정해질 일이라서 일부를 남길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는 다시 분노하고, 모세를 협박합니다. 다시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보는 날에는 죽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모세 역시 물러서지 않습니다. 나도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모세도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느낌이 온 듯 합니다. 이제 거의 재앙이 마무리되어 가는구나, 출애굽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앞으로 더 이상 대면하지 않습니다.
사실 흑암이라는 이번 재앙은, 얼핏 보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앞의 재앙들처럼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오거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캄캄한 어두움 자체가 대단히 공포감을 주는 것이고, 그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건 정말 심각한 재앙이 되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어둠이 지속되는 기간이 처음부터 아예 사흘로 한정되어 있어서(22절), 회복 불가능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왜 흑암을 거의 마지막 재앙으로 선택하신 걸까요? …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이 재앙이 애굽의 가장 중요한 신에 해당하는, 태양의 신 ‘라’(혹은 ‘레’)를 향한 타격이라는 점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명칭인 이 ‘파라오’(브라, phra)라는 것 역시 이 ‘라’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태양신의 아들이 바로 파라오입니다. 그 빛이 사흘의 시간 동안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은, 애굽과 바로로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떻게 ‘라’의 나라에 빛이 없을 수 있는가?’라는 모순적인 상황이며, 애굽을 보호할 수 있는 힘의 근원 자체가 무기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흑암의 재앙은, 이제 곧 있을 장자의 죽음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일종의 그 전조가 되는 재앙이지요. 생명을 낳고 보존하는 힘이 무력하게 되었기에, 그 다음은 생명 그 자체를 향한 심판이 가능하게 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흑암은 종종 하나님의 결정적인 심판과 보복, 그리고 종말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사망의 그늘’이 곧 흑암인 것이지요(“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욥기 34:22).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바로는 이러한 시한부적인 흑암에도 모세를 불러 타협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른 건 몰라도 태양의 힘이 무력화된다는 건 그들에겐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모세 역시 이쯤 되었을 때는, 그 시기와 상황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거의 모든 재앙이 끝이 나고 있구나, 하나님의 때가 거의 임박했고, 출애굽이 이제 곧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바로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인 것이겠지요.
사실 이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사건은, 그 기원 자체가 흑암이라는 하나님의 강한 임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서의 종 됨과 출애굽을 예언하시던 소위 횃불 언약이 기록된 창세기 15장(“12.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을 반추해보면, 출애굽의 시작과 끝이 흑암의 임재와 함께였습니다. 이제 그 언약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 모두를 다스리시며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애굽과 바로의 관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애굽은 태양이 신이지만, 여호와는 빛과 어둠을 모두 다스리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빛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이라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빛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빛 역시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빛의 속성이 하나님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에 적합하다는 뜻이지, 빛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이 애굽의 태양신과 다른 점입니다. 애굽의 신앙은 하나님이 빛이시며, 빛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신앙을, 우상화 된 빛을, 흑암의 재앙을 통해 무력화 하십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 모두의 주관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그 믿음의 고백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장면에서도,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빛만 있는 세상을 만드신 것도 아니며, 힘이 미치지 못하여 어둠을 방치하거나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편의 고백처럼,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하셨고(시 104:20),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그곳을 어둡게.”(시편 105:28)도 하십니다. 어둠에 계시지 않고,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빛과 어둠 모두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함의를 갖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세상의 밝은 면과 좋은 것들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음부와 화(禍), 곧 재앙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고 계십니다.
태양의 신 ‘라’의 백성과 달리, 여호와의 백성은 빛만 누리며 사는 게 아닙니다. 빛도 있고 어둠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절망의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백하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 피조물의 목록 맨 앞에 놓인 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죽음과 깊음마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성도는 어떤 형편에 처하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영화롭게 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어둠의 시간을 정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그것이 사흘이 될지, 또 언제가 될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주권 안에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 땅에서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흑암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님을, 흑암이 하나님이 아무 것도 행하실 수 없는 상태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 오히려 거기서 정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말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이 그 훈련의 과정입니다. 어떤 인공적인 빛이 존재하지 않는 광야의 밤 가운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임재하시고 그들을 돌보십니다. 그 밤을 대낮 같이 밝히시는 게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어두워지면 살아나는 감각이 청각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감각이 살아나는 것이 바로 그 어둠의 시간 속에서입니다. 세상의 시각적 대상으로 인한 영적 감각의 상실을 멈추고, 오롯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기회가 흑암 가운데 있음을 기억하고, 무릇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태양의 신 ‘라’가 아니라, 빛과 어둠을 창조하시며 다스리시는 여호와이심을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는 … 모세를 향한 바로의 마지막 타협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는 지금까지 총 세 번의 타협안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1)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파리’ 재앙의 경고 시)는 첫 타협안과, 2)가라, 하지만 멀리 가지는 말라고(파리 재앙 이후) 했던 두 번째 타협안. 그리고 3)가라, 하지만 너희 자녀들을 두고 떠나라고 했던 지난 메뚜기 재앙에서의 타협안 등이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타협안이 제시되는데요, 24절 말씀처럼, 자녀들도 데리고 가라, 하지만 너희의 양과 소는 남겨두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바로의 땅에 있는 바로의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야 한다고, 그 중 단 한 마리도 남겨둘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그들의 모든 소유가 함께 출애굽 해야 합니다. 그것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목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마리의 양도 애굽 땅에 남겨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그들의 모든 소유가 다함께 애굽 땅을 나와야 합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까지 전부, 병들고 약한 것까지 전부 다 예외 없이 출애굽 할 것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요한복음 18:9) 네, 하나님은 전부를 구원하시며, 전부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전부를, 그리고 우리의 삶 모든 부분을 구원하십니다. 엊그제 월요일 QT 본문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전과 안식일보다 더 크신 ‘주 되심’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은, 양 한 마리를 가진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전 재산이 양 한 마리뿐인 가난한 이 사람이 구덩이에 빠진 그 양을 반드시 끌어내야 하듯, 안식일에 병든 이를 고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씀인데,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그 소유가 오직 그 양 한 마리뿐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각각 사랑스럽고, 소중한, ‘단 하나뿐인’ 존재로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단 한 마리의 양으로서, 마치 단 한 마리의 양을 소유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를 명확하게 알고 계시며, 깊은 흑암 중에서도 친히 품고 보호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주님은 우리 전부를 데려가실 것이며, 전부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어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말입니다. 그것이 오롯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우리의 신앙의 고백 역시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말합니다. 이 모든 소유가 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여기에 남겨 두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이야기합니다(26절).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쳐 예배할 것인지, 지금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광야로 나가 예배의 자리에 갔을 때에 비로소 그 대상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소유가 함께 출애굽 해야 함을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나가는 이유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들은 구별되었고, 자유하게 됩니다. 제물에 대한 선택과 구별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그래서 성도는 모든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나님께 드려질 것을 선택하고 구별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함을 하나님은 지금 주장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일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은 단 한 가지도 양보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탄에게 억눌려 빼앗긴 그 모든 것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모든 것들을 주께서 친히 소유하십니다. 값으로 사신 소유물 중 어느 부분도 그리스도께서는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라는 말씀은 그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주장하시는 것이자,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미움과 박해를 당할 때에도,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21:18)는 약속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신체와 터럭과 살갗 전부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어서, 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말처럼) 주님은 우리의 전부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보호하시길 원하십니다.
사탄이 다른 일부를 다스리도록 그리스도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그의 소유이며(벧전 2:9), 그에게 속한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무심히 잊어버리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합니다. 나의 일부만 그리스도의 것인 양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나머지는 내 뜻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만 주님의 날이라고 여기고, 주일만 예배와 관련된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래도 된다는 것입니까? 정말 우리의 일부분만 구원을 받아도 좋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전인적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며, 소유하십니다. 일부에만 소유권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all or nothing의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전적인 관계를 맺으시거나 아니면 아무 관계도 없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전부를 주셨고, 당신의 전부를 또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늘 말해왔던 것처럼, 그 일부를 통해 전체를 다스리려 합니다. 이 부분만은 예외로 두라고, 여기만은 너의 몫으로 남겨두라고, 이것만은 네 주권으로 해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 양 포장합니다.
오늘 바로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기하고, 그들의 소와 양만 취하겠다는 뜻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보여 온 바로의 모습은 그렇게 무모하고 무식하지 않습니다. 양과 소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들 전부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주님이 경고하셨습니다(마 6:21). 소유가 애굽에 남아 있는 한, 그들은 반드시 애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바로는 알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그 미혹에 넘어갑니다. 자신의 삶 전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의 뜻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재능과 물질과 시간과 관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치외법권처럼,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며, 마치 거기 하나님이 없는 듯 살아갑니다. 여기만큼은 하나님이 눈감아 주실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합니다. 아니요, 그런 영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타협의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데도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말씀에는 아멘으로 응답하지만, 자신이 정해놓은 그 선을 넘는 말씀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절하며 거부합니다. 수많은 핑계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생각으로 말씀을 합리화해버립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5:19)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스스로 지킬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해버립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길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마태복음 18:8)고 말씀합니다. 잔인해 보이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니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가 당신의 것이라고, 전부가 당신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부는 괜찮은 게 아닙니다. 그 일부로 인하여 몸 전부가 구원과 무관해질 수 있음을, 그래서 그 일부를 차라리 전체에서 끊어내야 함을 경고하십니다.
얼마 전 TV 다큐를 보니 방사한 곰이 덫에 걸려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육사에 의해 일정 기간 길러지고 야생에서의 훈련까지 마쳤는데 산에 풀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야생에서 그 어떤 천적도 없는 곰이 죽은 이유는, 곰의 한 발이 인간이 쳐 놓은 덫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발 하나가 덫에 걸려 꼼짝달싹 하지 못한 채, 결국 곰은 그 자리에서 죽은 겁니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올무에 걸린 건 발 하나지만, 그것이 결국 온 생명을 위협합니다. 우리의 삶에 놓인 사탄의 올무가 무엇인지, 성령의 지혜를 구하며 분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반드시 분별하여, 거기서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내 소유, 내 주권을 주장하는 타협이 아닌 겸손한 간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따로 구별하여 내 주권을 세우려는 타협 대신, 내 전부를 주께 맡기지 못한,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까지도 출애굽 시키기 위해 또 한 번의 재앙이 필요했듯, 우리의 모든 소유와 삶 전부를 출애굽 시키기 위한 또 한 번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의 삶 전부를 다스리심을, 우리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심을 믿고, 우리의 전부를 주님의 주권 아래 맡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리고 무모하고 위험스러워 보이지만, 주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온전히 자유롭게 하심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의 삶 전부가 주님의 빛 아래 드러나기를,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