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복음의 시작' 2019년 2월 10일 주일 설교

2019-02-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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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0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메시지 ------------------------------------------------------- 마가복음 1:1~8,  복음의 시작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2) 본문 1절의 ‘복음의 시작’을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의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가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그 서론적인 이야기를 먼저 좀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이라는 이 책이 어떤 책이며, 어떤 배경에서 기록된 것인지를 아는 것이, 마가복음의 세부적인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이라는 말을 둘로 쪼개서, 오늘은 ‘마가’와 ‘복음’이라는 두 주제를 시간 되는 데까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 책을 쓴 사람, 마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 그의 이름 ‘마가’는 로마 식 이름(Marcus)입니다. 히브리 식의 이름은, ‘요한’이지요. ‘요한’이라는 이름은 유대인들에게 참 흔한 이름인데요, 그래서 다른 ‘요한’들과 구별하기 위해,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마가라 하는 요한’으로 부릅니다. 그럼 여러분은 마가라고 하면 어떤 일들이 생각나시는지요?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표현이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모여서 성령을 기다렸던 바로 그 장소가 마가가 사는 집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지요. 마가의 어머니도 또 하나의 낯익은 이름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부유한 과부였으리라 추측이 되는데요, ‘마가의 다락방’이 우리가 아는 그런 흔한 다락이 아닌, 120명의 성인들이 한꺼번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던, 엄청난 크기의 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락방이 있는 집이었으니, 그 집의 규모가 대략 가늠이 되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며, 첫 성찬의 예식을 함께 했던 곳 역시 바로 이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마가의 다락방은 초대교회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인 셈입니다. 자신이 가진 소유와 재물이 그렇게 쓰임을 받는 일도 참으로 귀한 것이지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형통함이, 그렇게 많은 성도들에게 덕과 유익을 끼치는, 그런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마가를 생각하면 늘 함께 떠오르는 이름은, 그의 삼촌인 바나바이지요. 전승에 따르면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오빠가 바나바였다고 하는데요, 이 바나바가 사실상 마가의 신앙적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한 1차 선교 여행에서, 바나바는 자신의 조카인 마가를 동행시키지요. 그러나 웬일인지 마가는 선교가 한창이던 때 밤빌리아라는 곳에서 이탈하여 다시 예루살렘의 집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바울은 여기서 마가에게 큰 실망을 느끼게 되지요. 훗날 바나바와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에 과연 이 마가를 포함시킬 것인지를 두고 크게 다투게 되고, 끝내 마가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바울로 인해 결국 두 사람은 서로 갈라서게 되기까지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에게도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마가에게야말로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마가에게는 그 외에도 뼈아픈 기억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 마가복음 안에 그 이야기를 슬며시 적어놓았는데요, 마가복음 14장으로 잠깐 가 보십시다. 14장 41절부터 52절까지 보시면, “41.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45.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 뜨리니라. 48.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아멘.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는데요, 이 때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로 된 홑이불을 두르고 체포된 예수님을 뒤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청년은 왜 이 장면에서 이불을 덮고 있었나 싶은데요, 다만 제 추측입니다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시며 잠들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아마 당시 이 청년은 아예 가지고 다니던 이불까지 덮고 제대로 자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청년은 그렇게 잠이 덜 깬 채로, ‘벗은 몸’에 덮고 있던 홑이불 하나만 걸친 채 끌려가는 주님을 따라가다 결국 발각되어 잡히고 맙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대단히 날렵한 사람이었든가 봅니다. 어둔 밤, 정신없는 틈을 이용해서, 그는 덮고 있던 이불을 벗어던지고, 벗은 몸으로 줄행랑을 친 겁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가복음만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실제로 당시 교회의 여러 초기 전승들이, 벗은 몸으로 도망친 이 청년이 다름 아닌 마가였음을 증언해주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 청년이 마가라고 밝힌 내용은 아니니 100% 정확한 fact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이 청년이 나름 대단한 것은, 어떻게든 체포된 주님을 뒤따라갔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다 도망가고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처럼 이불을 덮고 몰래 주님 뒤를 쫓아가던 마가 옆에 누가 있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 네,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마가가 붙잡혔다가 도망간 이후에도 베드로는 계속 주님을 뒤따라갔고, 결국 대제사장의 집까지 들어갔다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게 되지요. 아마도 마가가 그 밤에 겪은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도 바로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가는 젊은 시절 지우고 싶은 기억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마가’ 하면 당시 교회 성도들은 그런 부끄러운 장면들을 먼저 떠올리곤 했겠지요. 주님 버리고 도망하지 않은 사람도 없고, 실수 없이 주님을 믿고 따른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그 드라마틱한 사건들 속에서 오래도록 성도들 사이에 회자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청년 마가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숙한 제자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비록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는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삼촌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 사역을 이어갔고(행 15:39), 그 이후에는 바울에게도 지속적인 도움과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옥에 갇힌 바울 옆에서 그를 돌보고 있던 이가 바로 마가였고, 골로새서를 들고 직접 골로새 교회를 방문하는 이 마가를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잘 영접하고 따뜻이 맞아줘야 한다고, 바울이 당부하기도 합니다(골 4:10~11).  또한 바울이 제일 마지막에 기록한 디모데후서에 보면, 바울은 다른 모든 이들이 자신을 떠나고 의사 누가만 자신과 함께 있다고 탄식하며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을 찾아올 때 꼭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그가 바울의 사역에 유익하다고 이야기합니다(딤후 4:11). 심지어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이 마가를, 우리가 로마서 16장 끝에서 디모데를 향해 썼던 표현이었던, ‘나의 동역자’라는 말로 부르고 있기까지 합니다(몬 1:24). 이처럼 더 이상 청년 마가를 향했던 아쉬움이나 실망감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마가를 인정하고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를 필요로 한다는 바울의 이야기가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마가는 더 이상, 도망가고, 쉽게 포기하는,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기록한 이 마가복음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일으키시고 사용하셨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지만 말입니다. 마가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모습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만,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그 연약한 모습을 주님의 영광을 위한 존귀한 삶으로,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하고 계심을, 그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실망스러운 모습보다 더 힘 있고, 더 능력 있음을, 믿으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마가가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마가복음에 기록한 것이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내용이 복음서마다 기록되어 있는 것이나, 제자들이 주님을 다 버리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그토록 적나라하게 적혀 있는 것이나, 모두 같은 취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3장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우리의 연약함을 감추게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게 하며, 그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며,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인내하시며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듭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또 서로에게, 또한 우리 자신에게, 무엇보다 진실하기를 원합니다. 괜히 더 실력이 있는 척, 믿음이 좋은 척, 다 괜찮아진 척, 그러지 말고 …,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죄인이며, 갈수록 더 엉망진창의 삶이라는 걸, 꾸밈없이 고백하며,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의지하고 갈망하는, 그런 진실한 모습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권능이 저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서로를 정죄하기 전에, 받아들이고, 기다릴 수 있는 마음과 그런 마음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반드시 있어야겠지요. 내가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조차도 오히려 감싸주고 다시 일으켜주는, 그런 믿음의 공동체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마가의 그 기적이, 마가의 그 패자부활전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청년 마가는 혼자 충성된 마가가 된 게 아닙니다. 홀로 주님께 기도하고 은혜 받아 변한 것이 아닙니다. … 바나바가 쓰러진 그를 일으켜주었고, 일어선 그를 마지막까지 붙잡아 준 많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바울이라는 영적인 아버지가 있었다면 마가에게는 다른 아버지가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가 누군지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네, 앞서 마가가 벗은 몸으로 도망가던 자리에 함께 있던 바로 그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로마(바벨론에 있는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가 마가를 성도들에게 소개하며 ‘내 아들 마가’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5:13). 실제로 마가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파피아스에 의하면) 헬라어에 서툴렀던 베드로 사도의 선교 통역관으로 로마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함께 사역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아니었던 마가가 그렇게 세세하게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남길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베드로와의 오랜 교제와 동역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사실 앞선 로마서 강해와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도움을 통해, 다시 한 번 로마라는 배경 속에서 기록되는 것입니다. 네, 마가에게는 ‘베드로’라는 영적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마가가 삼촌 바나바가 아닌 베드로와 동역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디모데에게는 바울이 있듯, 마가에게는 베드로라는 영적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쓰러진 마가를 일으켜 세웠고, 베드로는 그런 마가를 걷고 뛰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도와 마가, 마가와 베드로라니, 너무나 어울리는 부자(父子)관계 아닙니까? 왜 베드로가 그 많은 사람 중에 마가를 택하여 자신의 통역관으로, 또한 아들로 삼아 동역했겠습니까? 실패라면, 배신이라면, 연약함이라면, 그리고 패자부활전이라면, 베드로보다 더 전문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가에게 베드로보다 더 좋은 아버지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보며 늘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향해 던지신 그 말씀과 당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 세 번이나 반복하여 부탁하신 그 말씀이, 바로 이 마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고, 또한 마가를 대하는 베드로의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마가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삼았을 때, 분명 어떤 이들은 수군거리며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끼리끼리 잘 놀고 있다고, 유유상종이라고, 그리 말하며 그들의 과오들을 한 데 엮어 장난삼아 이야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도 그런 반응을 예상 못했을 리 없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그 간절한 부탁이 없었더라면, 베드로는 어쩌면 누구보다 더 강하게 마가를 비판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의 약함과 비슷한 실수 앞에 더욱 차갑고 날카롭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바나바가, 베드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만약 마가 옆에 바나바가 없고, 베드로가 없었더라면, 그의 삶은 어찌 되었을까요? 마가 옆에 그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한갓 가십거리로 삼아 늘 뒤에서 수군거리는 공동체가 있었다면, 도대체 마가는 어찌 되었을까요? 상상하기도 싫은 이야기입니다. 당장 이 마가복음 자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훗날 이집트 북부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by 그리스 신학자, 유세비우스). 선교를 재개하고, 교회를 세우고, 순교하고 …, 그 엄청난 믿음의 열매들이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그를 한없이 용서하고, 대신 죄의 값을 치르며, 다시 일으켜 소명의 길로 부르시는 주님, 그 복음의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에 의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로 인하여 시작된 열매들입니다. 나는 아닌 것처럼, 나는 마가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닌 것처럼, 나는 실수 없고 부족함 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그렇게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바쁜 이들의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많은 존귀한 마가들이 그저 청년 마가로 굳어지고 소멸되어 갔을지,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과연 청년 마가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보십시다. 저는 우리 자신에 묻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일들로 만나는 사람들보다, 가정과 친척, 그리고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관대하고, 더 인내심 있게 반응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이번 설 명절을 보내며 일가친척들을 만나셨겠지만, 여러분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모습, 어떤 삶으로 복음을 고백했습니까? 내 형제, 사촌, 친척들의 실수와 잘못을, 과연 바나바처럼 보듬고 위로하는, 그래서 그가 주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주님께로 되돌아오게 하는, 그런 사람 낚는 역할을 감당하셨는지요. 아니면 ‘나는 구원’, ‘너희는 심판’의 틀 속에서, 그저 차례 상에 절 한 번 안 하는 그것으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는지요. 예배 전 기도 모임을 통해 주님이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했습니다만, 베드로가 마가를 낚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의 탁월함이나 명석함이나 완전한 인격과 신앙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주님의 인내와 사랑을, 이번에는 마가에게, 자신의 인내와 사랑으로 드러내고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사로잡아지는 것이지요. 바울과 같은 역할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많아야 한두 사람이면 족합니다. 바른 말하고, 원칙대로 본이 되는 사람은 그저 하나면 족합니다. 반면에 바나바와 베드로는 수없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만큼 수없이 실수하며, 수없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타인을 향해, 가족과 지체들을 향해 조금 더 넉넉하고 여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그리 대하시듯, 여러분 또한 지체와 가족, 일가친척들에게 그런 관대함으로 대하십시오. 편협하고 옹졸하면 절대 사람을 낚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로잡는 부르심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음을, 그 부르심 가운데 여러분의 친척과 가족과 지체들을 만나고 있음을 우리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 자신에게도 그런 여유와 넉넉함으로 대하시기를 원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여도 다시 시작함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믿음,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믿음으로, 다시 일어서시기를 축복합니다. 서로에게, 나 자신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하루아침에 시몬이 베드로가 되고, 사울이 바울 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용서를 통해 우리를 빚으시고 우리를 길들여가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즉각 회개하고 돌이키며 변화되지 않더라도, 서로를 견뎌주십시오. 피하지 말고 견디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먹이고 자라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그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에게 그와 같은 부활의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패자의 부활만큼 아름다운 부활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패자부활전’이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저는 기독교가 패자부활의 종교라 생각합니다. 무한한 은혜와 용서, 그것만이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듭니다. 그 은혜를 값싸게 이용하든 말든,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일 뿐, 우리는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그 길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가 기록한 복음의 시작은 바로 그런 마가의 삶, 패자부활의 삶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공동체를 통해, 청년 마가가 마가복음의 마가로 일어나고 자라가는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삶이, 곧 또 다른 ‘복음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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