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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9. 너희 장정만 가서
2019-01-3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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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130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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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0장 1~20절, 너희 장정만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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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의 마음에 타격을 가하여 그 마음이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던 우박 재앙에 이어, 이번에는 메뚜기 재앙입니다. 여덟 번째 재앙으로, 이제 이 줄다리기도 거의 막바지로 접어듭니다. 사실 메뚜기 한두 마리야 무서울 리가 없지요. 아마 어린 시절 메뚜기 잡겠다고 이곳저곳 뛰어다니셨던 분들도 많이 계실 겁니다. 저도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 쯤 걸어 바로 교회 윗동네 약수터까지 올라와서, 메뚜기도 잡고 개구리도 잡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메뚜기, 아주 귀여운 곤충이지요. 그리고 맛과 영양도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메뚜기는 율법에 기록된 곤충 가운데 유일하게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된, 부정하지 않은 곤충입니다(레위기 11:20~23). 레위기에서 먹을 수 있다고 기록된 곤충들이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팥중이 모두 보다 큰 메뚜기목에 속해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이 메뚜기를 먹었다고 하지요. 나름 영양가 있고, 전통 있는 식재료를 찾았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메뚜기가 떼로 모이면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 됩니다. 무엇보다 농촌에서의 피해가 어마어마하지요.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에는 아예 흔적도 없이 황폐화 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5년 전쯤(2014년 8월) 전남 해남에 수십 억 마리의 메뚜기 떼가 나타나 수확을 앞둔 농작물에 엄청난 피해를 줬다는 뉴스 기사를 봤습니다. 중국에서는 서울의 스무 배 면적에 해당하는 지역이 메뚜기 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도 합니다. 성충 메뚜기는 메뚜기대로, 또 그 유충은 유충대로, 한창 자라고 있는 곡식을 닥치는 대로 갉아먹고 있다고, 그 기사는 언급했습니다. 기사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그 많은 메뚜기 떼가 어떤 종인지, 또 왜 출몰하게 됐는지, 그 원인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더욱 공포감을 주는 재해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메뚜기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주 등장하는 곤충입니다. 아모스와 요엘 등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실 때 사용된 곤충입니다. 특히 요엘서에 보면, 이런 메뚜기의 재앙이 ‘여호와의 날’에 임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명칭도 ‘하나님의 군대’라고까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군대’, 그 엄청난 수와 영향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이런 메뚜기를 고대 애굽에서는 수확과 풍요의 신으로 섬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네헴(Senehem)’이라는 이름의 신이었는데요, 메뚜기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여러 작은 해충들을 잡아먹는다는 생각, 그래서 해충들로부터 애굽의 논과 밭을 보호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재앙은 애굽이 신으로 여기는 대상을 통해, 그것들이 보호한다고 믿었던 애굽과 그 대지를 심판하는, 그런 성격을 갖는 셈입니다.
사실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이미 애굽의 상황은 대단히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우박 재앙으로 인해 모든 작물이 피해를 입은 터라 경제적으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본문에서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로 나아가 강력하게 호소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실 7절의 이야기는 대단히 충격적인 모습이지요. 바로의 신하들이 마치 바로를 책망하는 것처럼, 강한 어조로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만 그들을 내보내라고,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든 말든 좀 그만 멈추라고,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냐?”고 항변합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입니다. 그만큼 이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바로는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모세를 다시 소환하게 되지요.
실제로 이제 애굽은 굶어죽을 수 있는 상황으로 점점 치달아갑니다. 아직 철이 아니어서 우박 재앙에서 살아남은 밀과 쌀보리마저 메뚜기의 밥이 되게 생겼습니다. 이젠 정말이지 애굽의 살림이 거덜이 난 상태이고, 경제는 파탄에 이릅니다. 정말 막다른 골목에 몰렸기 때문에, 신하들은 바로마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겁니다.
뒤늦게나마 바로도 이 재앙의 심각성을 인지합니다. 나중에 모세에게 간청하면서, ‘이 죽음’만은 떠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17절).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살아 있어도 식량이 없으면 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없는 것이지요. 이건 정말 나라가 통째로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메뚜기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생명의 근원을 마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라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가 올라오고, 이와 파리가 우글대도 사람은 어찌어찌 살아갑니다. 우박이 내려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 없으면 모든 게 무의미해집니다. 경제는 마비되고, 국가는 통제가 불가능해집니다. 과거 요셉 시절의 근동 대기근도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씨가 마르면 그 다음은 없습니다. 미래가 없고, 장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재앙인 장자가 죽는 재앙에서보다도 여기서 보여주는 애굽의 반응이 더 간절한 겁니다. 나중에 장자들이 다 죽었어도 어쨌든 살아남은 생명은 있습니다.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미래 자체가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메뚜기 재앙의 핵심 주제는, ‘미래에 대한 싸움’입니다. 바로 왕과 애굽의 미래와 모세와 그 민족의 미래가 달린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미래를 건드리심으로써,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애굽의 억압, 아이들을 볼모로 하려는 바로의 억압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십니다. 너희의 미래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다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의 겸비함’에 달려 있다고. 너희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여 키워야 된다고, 그럴 때에만 비로소 미래의 소망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신하들의 원성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다시 부릅니다. 그리고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섬기러 갈 자가 누구누구냐고 묻고, 남녀노소와 양과 소까지(9절) 다 절기를 지키러 나가야한다는 모세의 대답에, 바로는 호통을 치며 격하게 반응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나갈 거면 장정들만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11절 끝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표현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기억해보면 이것은 바로의 두 번째 타협안입니다. 앞서 파리 재앙에서, 너희가 나가기는 나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조건을 달았던 것 이후 다시 타협안이 제시됩니다. 보내줄 테니 장정들만, 어른들만 나가고, 자녀들은 두고 가라 말합니다. 여기엔 바로의 여러 가지 계획이 숨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번 메뚜기 재앙에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고센 땅의 작물들을, 장정들이 나간 사이 어찌 해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볼모로 잡아두겠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애굽 땅에 있는 한, 절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음을 잘 아는 것이지요. 역시 대단히 지혜롭습니다.
그렇게 면박을 당하고 쫓겨난 모세에게 하나님은 드디어 메뚜기 재앙의 시작을 알립니다. 밤낮으로 동풍이 불어 메뚜기를 애굽 땅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동풍이면 당시 홍해 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계절풍을 의미하는데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는 동풍이 부는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로 치면 3~4월인데, 애굽에 동풍이 불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을 통치하시고, 그것으로 애굽을 심판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이미 우박 재앙을 통해 확인했던 바입니다. 사실 본문의 ‘메뚜기’라는 단어 [아르베]가 모두 단수형으로 사용된 것도 같은 이유로 놀랍습니다. 그 많은 메뚜기가 단수형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메뚜기 한 마리를 다스리고 가지고 놀듯, 하나님께는 한 마리를 다스리시는 것이나 수억 마리의 떼를 다스리시는 것이 일반이라는 메시지로 들립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난 데 없는 동풍이 불었고,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메뚜기 떼가 그 바람에 휩쓸려 들어와 애굽 온 땅, 바로의 모든 영토(4절, 경내)를 뒤덮습니다. 얼마나 메뚜기의 수가 많았는지, 온 땅을 덮은 메뚜기로 인해 빛이 가려져 사람들은 어두움을 경험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마치 다음 재앙인 흑암 재앙의 예고편처럼 말입니다.
다급해진 바로가 한 번 더 모세와 아론을 부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보여준 것과 같은 표면적인 회개, 기회주의적인 회개를 반복합니다. “16.…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17.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 얼마나 간절한지, 전에 없던 모세와 아론을 향한 사죄도 포함된 것이 눈에 띕니다만, 대부분의 이런 회개가 그렇듯, 표현만 강해질 뿐, 행동의 변화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런 바로를 위해 다시 하나님께 간구하고, 하나님은 또 한 번 돌이키사 강렬한 서풍으로 메뚜기들을 홍해에 몰아넣어버리십니다. 마치 이것도 홍해 사건의 전조인 것 같이, 그들이 의지하던 신을 먼저 그 바다에 수장(水葬)시키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바로의 마음은 완악하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키지도 않을 걸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이번에도 바로의 요청을 수락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를 위함입니까? 바로를 살려주기 위함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바로와의 협상이나 소통의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결론을 향한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이번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이 이 재앙의 목적을 설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바로와 신하들의 마음이 완강해진 것은, 1)하나님의 표징을 그들 가운데 보이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2)이러한 표징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들과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고,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바로와 애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이것들이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내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거라면 이렇게 바로와 밀고 당기기를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시면 되고, 그냥 열 가지를 한 번에 내리셔도 됩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긴 시간에 걸쳐,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 바로를 굴복시키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를 굴복시키려 하시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굴복시키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하나님의 권능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스스로 항복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알려주시며 반복하여 교훈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그를 신뢰하고 의지할 것을 가르치는 일, 지금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본문의 ‘자녀’ 문제가 중요합니다. 이 과정이 단지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재앙의 시작부터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제시하십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표적들을 너의 아들과 너희의 자손들의 귀에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래서 이처럼 드라마틱하고, 이처럼 충격적인 일들을 반복하여 행하고 계시다고 강조하십니다.
사실 이 ‘자손’의 문제는 모세오경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지요.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을 약속하셨고, 그것이 언약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많은 자손만 약속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뭐라고 언급하십니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 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부터, 이 모든 것이 자녀와 후손을 향한 신앙의 유산과 연관된 것임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성경이 자녀에 대한 신앙적 양육에 대해 대단히 엄하게 강조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어떤 종교보다, 어떤 경전보다, 이 부분이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사실 아직 자녀가 없는 제가 이런 말씀을 전하게 돼서 참 죄송하고, 또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에게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도 조금은 어색니다만 …, 여러분, 우리가 결코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훗날 필요한 때에 저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이 꼭 다시 생각나게 되는 성령의 은혜가 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절대적 존재입니다. 자녀들이 애굽에 머물러 있는 한, 이스라엘은 절대로 애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애굽으로 돌아옵니다. 자녀는 그런 존재입니다. 부모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바로는 자녀들을 통해 전체를 다스리려 합니다. 대단히 지혜로운 발상입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이지요. 신자의 믿음을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 자녀라고 하는 아주 유용하고 연약한 틈을 노립니다.
사실 어지간한 신앙을 가진 부모일지라도 자녀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온전히 견고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뭐랄까, 신앙의 ‘치외법권’이 작동하는 곳이 이 자녀의 영역입니다. 어릴 적 저희 부모님도 그러셨습니다. 예배든 말씀 묵상이든, 당신들 자신에게 하시는 것처럼, 제게 엄한 기준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그렇게 못하셨습니다. 공부와 대학문제가 거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습니다. 그 공부를 핑계로 아들은 사탄에게 지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지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지고, 그렇게 온 가족이 패배했습니다.
잠깐 신명기 6장을 보십시다. 1~8절입니다. “1.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할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자녀의 양육을 강조하시는 대목입니다. 주목할 것은, 말씀의 양육에 있어, 대단히 철저하고 강력한 부모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부모는 자신의 마음에 말씀을 새기고,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부지런히’입니까?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웠을 때, 일어났을 때, 시간 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라 하십니다.
여러분, ‘강론’이 무엇입니까? 그냥 동화책 읽어주듯 그렇게 아이들에게 들려주라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이 ‘강론’이라는 단어는, 오직 사도행전과 신명기에서만 사용되는데요, 사도행전에서는 누가 강론합니까?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하는 겁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걸 부모가 하라는 것입니다.
‘강론’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샤난’이라는 단어는 본래 ‘날카롭게 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심도 있게 가르쳐 분별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이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음을 성경은 명확히 이야기합니다. 그저 교회 나가라, 예배 드려라, 기도해라, 이런 이야기를 반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도가 성도에게 해야 할 일들을 해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말은, 사람이 떡으로만 자녀를 기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국의 성도들이 신앙에 있어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저는 우리가 이 문제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 복을 가르치고, 성공을 가르치고, 일류대를 가르치고, 좋은 직장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망합니다. 자녀들만 망하는 게 아니라, 부모도 망합니다.
사탄은 절대 사탄 자신을 섬기라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섬기라고 하거나, 여러분의 자녀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바로의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너는 예배드려라, 그러나 자녀들은 두고 가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자주 들었던 말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역사하시고, 기적을 베푸셔도, 우리의 자녀들을 빼앗기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나는 못나갈지언정 자녀는 나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라도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착각합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철저하게 하면 세상에서 뒤떨어질 것으로 여깁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앙과 세상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하니까, 오로지 인간의 생각과 욕심으로 하니까 아이도 뒤떨어집니다.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오경을 가르치는 유대인들이, 오늘날 세계적인 엘리트 집단이 된 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자신의 욕심이 아닌 말씀대로, 말씀으로 양육하면 반드시 말씀에 약속된 형통함이 자녀들을 복 되게 할 것입니다.
자식만 복 받는 게 아니라, 부모도 온전해집니다. 목사가 성도에게 말씀으로 양육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스스로도 변화되고 온전해지는 것처럼,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며, 부모 역시 그 말씀으로 온전해집니다. 그래서 2절 말씀처럼, 이것이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복 받는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자녀들까지 함께 출애굽시켜야 합니다. 자녀들까지도 출애굽시키기 위해 어려운 수고를 한 번 더 감내해야 합니다. 바로를 한 번 더 만나야 하고, 바로의 고집과 한 번 더 싸워야 합니다.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어릴 때부터 말씀을 암송하게 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말씀으로 도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실제 그 가정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한 가지 말씀만 덧붙이며 설교를 갈무리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닙니다. 순서가 잘못되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서 자식만 그렇게 키우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부모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겸비하고 경건해야 하며, 그렇게 부모가 삶으로 복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에게 대언하는 3절에 보면,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격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않니 하겠느냐?” 이 또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우리의 완악함 말입니다.
저는 바로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미 스스로 높아진 자가 겸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또한 그렇게 높아지고자 애쓰는 이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실상 바로에게는 지금 가장 어려운 일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애굽의 왕에게, 겸비하라니요. 신의 아들에게 겸비하라니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존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하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사탄은 얼마나 우리를 교묘히 교만하게 만드는지요. 우리가 존귀함을 강조하여 교만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교만합니다. 교만은 사람만큼 여러 종류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만약 우리가, 존귀한 자인 것과 교만한 자인 것을 분별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수많은 죄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은 우리 신앙을 모조리 갉아먹는 영혼의 메뚜기 같은 것입니다. 교만하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교만은 처음엔 마귀의 죄였으나 이젠 인간의 죄라고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만큼 사탄적입니다. 다른 어떤 죄악들도 이런 결말은 아닙니다. 거기엔 회복과 자비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교만은 심판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를 보며 우리는 알게 됩니다.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수단으로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면, 사람은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황폐해집니다. 그리고 더욱 완강해집니다. 그래서 교만하기 전에, 완악해지기 전에 스스로 겸비하거나, 아니면 다른 수단을 통해 겸비해지는 것이 최선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 부족한 것, 약한 것이 그래서 더 큰 은혜입니다. 내가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고 고백한 바울이 생각납니다. 네, 바울조차도 그 질병이 없었다면 교만해질 것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사자’, ‘사탄의 메신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라야 겨우 꺾이는 교만입니다. 바울이 말입니다.
교만이 꺾이기 전에, 스스로 겸비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의 은혜입니다. 그 가난한 마음,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겸손한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구하십시다.
무엇보다 감사의 고백을 늘 잊지 마십시다. 교회 오셨던 간사님들이 기증하신,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덕과 성품’이라는 책을 보니, “겸손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할 때 따라오는 습관적 성향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선물로 주어졌고,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만들어 주는 여러 선을 통해 그 선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준 선물들을 인정하며 산다는 뜻(이고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감사가 우리를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를 선택하고 연습함으로 겸비함을 배웁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만 출애굽하지 말고, 우리의 자녀들까지 모두 출애굽시키십시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우리 집이 모두 구원을 얻는 가나안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