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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8.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2019-01-2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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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90123 수요 성경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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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9장 13~35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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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일곱 번째 재앙은 우박 재앙인데요, 자연재해(기상이변)로 인한 첫 재앙입니다. 물론 자연재해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고, 그것이 가지는 특성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한데요, 왜 하나님이 우박이라는 재해를 재앙으로 선택하셨는가를 생각해보면 …, 우박뿐 아니라 보통 자연재해의 성격이, 14절, 25절에 기록된 대로, 피할 수가 없는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햇빛이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 비치듯, 비가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내리듯, 우박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재앙의 대상이 된다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가장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 ‘모든’(혹은 ‘온’)인데요, ‘콜’이라는 형용사가 이 재앙에서 열두 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재앙’(14), ‘온 천하’(14, 16), ‘모든 것’(19), ‘모든 땅’(22), ‘모든 채소’(22, 25), ‘애굽 온 땅’(24, 25), ‘밭에 있는 모든 것’(25), ‘들의 모든 나무’(25) 등, 이 단어만으로도, 앞의 다른 모든 재앙들과 구분되는 이번 재앙만의 어떤 강렬함과 충만함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이번 재앙에서도 고센 땅에 거주하는 히브리인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박이 재앙에 속한다는 것, 그것도 갈수록 그 재앙의 강도가 강해지는 가운데 일곱 번째 재앙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23절과 24절에서 보는 것처럼, 단지 우박만 내리는 게 아니라, 그것과 함께 폭우도 내리고, 거기에 우렛소리, 곧 천둥, 또 불(덩이), 곧 번개까지 함께 내려치는 그런 강력한 기상재해였습니다. 우박 자체도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25절에 기록되었듯, 들의 모든 나무를 꺾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얼음덩어리가 쏟아지듯 내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8절 말씀처럼 이 우박이, 애굽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단 한 번도 없던 그런 우박이라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이 우박의 일차적인 타깃은 밭에 있는 작물들입니다. 사람과 동물도 물론 우박의 피해를 당하지만, 본문은 그들이 양식으로 삼는 작물들의 피해를 강조합니다. 31절과 32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미 싹이 나서 자라고 있던 보리와 삼이 상합니다. ‘삼’이라고 하면 ‘아마’ 혹은 ‘마’라고 하지요. 요즘에는 이 삼의 씨, ‘아마 씨’가 슈퍼 푸드로 알려지면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데요, 어쨌든 보리와 삼은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철이 아닌 밀과 쌀보리는 다행히 괜찮았음도 성경은 언급합니다. 이어지는 여덟 번째 재앙은 바로 이 남아 있는 밀과 쌀보리를 겨냥했다는 것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비록 직접적인 피해는 작물 몇 종만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나 애굽 왕 바로의 반응은, 이전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27절에,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해서, 대단히 겸비한 태도로, 구체적인 자백의 모습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이니, 다시는 그들이 애굽 땅에 머물지 않게 될 거라고 약속하지요(28절).
말씀드린 대로 이런 바로의 모습은, 이전 재앙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축들이 전염병으로 죽고, 또 독종이 피부에 오르고 할 때에도 없던 아주 이례적인 것입니다. 비록 우박으로 인해 직접적인 생명의 피해는 적었다고 해도, 천둥과 번개, 폭우(33절)를 동반하는 엄청난 우박은 그 자체로 바로의 마음을 강하게 압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번 재앙을 경고하는 장면이 기록된 14절에 보면,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라고 되어 있는데요, 여기 ‘너와’라는 부분에 있는 아래 주석을 보면 ‘네 마음과’라고 적혀 있음을 봅니다. 문자대로라면, ‘너의 심장에’라는 뜻입니다. 바로의 죄와 재앙이 멈추지 않게 하는 바로 그 신체기관이지요. 그러니까 이번 재앙은 애굽 왕 바로의 심장, 곧 그 교만한 마음 자체를 겨냥한 재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래서 그 마음의 평강이 소멸되는, 그러한 성격의 재앙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번 재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애굽 사람들 중에서조차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19절이지요.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네 가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사전에 이런 경고의 말씀을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애굽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20절에 보니, 바로의 신하 중에서도 이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일하는 종들과 가축들을 미리 피하도록 조치했다고 기록합니다. 물론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냥 평소처럼 내버려뒀습니다(21절)만, 지금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던 매우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애굽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이 재앙들의 목적이라고 하신 본문 1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희미하지만 깨닫고 이해하게 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록 임박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아 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애굽 사람이요, 바로의 신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재앙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밑져야 본전인데, 일단 이런 경고에는 귀를 기울여 듣는 게 상식적입니다. 더구나 앞에서 이미 일곱 번이나 학습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 비가 올 확률이 60~70%만 된다고 해도, 우산은 챙기고 볼 일입니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그래 두면 두고두고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애굽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랬겠습니까? 절대 그런 우박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우박 정도로는 망하지 않는다, 여호와라는 신이 그만큼의 능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심들로 인해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을까요? 물론 그렇게 의심한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만, 일부였을 것입니다. 의심해서가 아니라, 완악해서 버틴 것입니다. 바로가 지금껏 보여 온 태도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피해를 입을 때 입더라도, 절대로 여호와라는 신 앞에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완악함인 것이지요.
우리도 그럴 때 있습니다.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절대 남의 말 안 듣는 경우, 잊지 않습니까? 소소하게는 운전할 때 가끔 그렇습니다. 사람의 조언이든 기계의 조언이든, 옆에서 하는 말을 잘 안 듣습니다. 그냥 길을 멀리 돌아가고,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그걸 기꺼이 감수하면서 고집을 부리지요. 절대 남의 말 듣지 않기로 아예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처럼 말입니다. 예고된 재앙을 대비하지 않은 건 그런 단단한 마음에서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손해 볼 때 보더라도, 굴복하기 싫은 겁니다.
바로는 이번에도 같은 모습입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에게 잘못했다 말하면서도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습니다. 자백은 하지만 참 콧대가 높습니다. 27절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바로는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라고 해서 ‘이번’을 강조하는 이 표현은, 과거엔 결코 잘못한 게 없다고 하는 말이자, 자신을 굽히지 않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매번 고집을 부리고 남의 말을 안 듣는 사람이, ‘그래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현상에 대한 인정이지, 본질에 대한 인정이 아닌 겁니다. 지금 바로가 딱 그 상황입니다. 문제의 본질, 곧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은 회피하면서, 단지 드러난 현상에 대한 인정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합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몸부림입니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내면의 교만함은 이어지는 재앙을 통해서도 꺾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여기서는 잠깐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박이 그치자 다시 바로와 백성의 마음은 완악해집니다. 한두 번 손해 보고 그래도 사람은 안 변합니다. 더 고집스러워집니다. 그게 인간이지요. 내가 주인인 이상, 내가 살아 있는 이상, 재앙만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결국 사랑을 통해 변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하듯,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바로는,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거나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 완악해집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버틸 수만도 없고, 자백도 하고 회개도 해 보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은 단단해지기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재앙을 통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순종보다 먼저 배우는 것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번이, 사람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하고(glorify), 또 즐거워하는 것(enjoy)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을 경험하는 순서는 ‘거꾸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게 하시고, 그래서 당신을 섬기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5:1 말씀 암송해 보십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만이 그를 본받는 자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도 타락할 수 있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됐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히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이제 출애굽 하여 광야로 나간 이스라엘을 통해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오직 환경의 조건에 의한 것인 사람들의 모습, 하나님을 즐거워함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래서 다시 바로의 종으로 살겠노라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스라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단순히 이분법적이고, 시간의 순서대로 진행되는 성도의 성장이 아님을,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우리의 태도와 습관과 연관된 문제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태도, 어떤 습관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받고 얻어서 누리는 기쁨보다 하나님 자체로부터 얻고 누리는 기쁨이 더 커야 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움과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한 것이지,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다면, 성도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가, 하나님 자체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신앙,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신앙으로 자라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뻐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의 이 기쁨,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 누리는 이 기쁨은,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시작될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잔치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정확히 맛보고 누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좋은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그 물을 하객들에게 떠다 준 하인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제대로 누린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좋은 포도주를 즐겼습니다. 물론 그것도 주님의 손에서 나온 기적이요, 즐거운 축복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즐긴 게 아니라 포도주를 즐겼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 하인들은 비록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을 한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히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단순한 순종’이 있었습니다.
물론 하인들은 그 잔치 자체를 즐길 수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하인이고, 어쨌든 일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종들을 당신의 그 기쁨으로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달란트 비유에 보면, 충성된 종(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을 향해 주인이 뭐라고 칭찬합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가까이에서 누리고 맛볼 수 있도록 예수님은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단순한 순종’으로 응답한 우리를 당신의 즐거움으로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단순히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고, 하나님의 기쁨 안에 들어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기쁠 것을 생각하며 기쁘고, 그가 기뻐하니, 더 기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그와 같이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되, 하나님 자체를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신앙,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신앙으로 자라가고, 단순한 순종으로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없는 바로는, 비록 회개하고 자백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기회주의적인 것으로, 당장의 고통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건 사실 회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바로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지난주 금요일 QT 본문에 등장했던 세례요한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거기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며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스라엘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여러분, 왜 요한이 그들을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고 이야기합니까? 회개하러 나왔는데, 그래서 착하게 살겠다는데, 왜 그렇게 정죄합니까?
네, 오늘 바로와 마찬가지로 임박한 환난만 피하려고 하는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고, 그 죄의 근원에 어떤 교만이 있는지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메시아가 자기 자신들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저주를 받아 대속의 피를 흘려야 함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미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이방인들과 달리 선하고 온전하다 여깁니다. 그런 전제 하에서 하는 회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회개로는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 못갑니다. 이번에는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 재앙을 그만 거두어가시라고, 그렇게 반복되는 회개로는 주님의 평강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로의 모습,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세례요한에게 나아가는 이들이 모두 똑같은 내면의 문제에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의 회개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어떤 하나의 잘못된 행위나 죄가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진 빙산 그 자체를 겨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지 않는 삶의 태도와 그 주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못하며, 그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는, 애매한 삶의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번에 이걸 잘못했고, 저번에 저걸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회개 말고, 저번이나 이번이나, 동일하게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그 마음의 방향, 그 삶의 방향을 분별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는 마음을 찢는 회개입니다.
그런 참된 회개는 내 힘으로만 되지 않음을 알기에,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먼저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나로 하여금 주 앞에 겸손케 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하게 됩니다. 바로에게는 그런 고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28절에,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처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단호함만 강조합니다. 거짓 회개의 특징 중의 하나가, 강한 결심이지요. 그게 안 된다는 걸 성도는 압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없음에 눈을 뜨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할 수 있게 하심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늘 받아주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지요. 오늘 바로에게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감사이지요. 기도한 대로 재앙이 멈춰도 바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악해져서 말을 바꿀 따름이지요. 광야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감사하는 삶은 그래서 회개의 열매와도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강조한다면 …, 오늘 본문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바로와 바로의 백성을 구별하는, 출애굽기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반복하면서 새롭게 강조되는 것이 있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34절 말씀인데요,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네, 바로와 그의 신하가, 종과 주인이 꼭 같다고 선언하며 이 재앙이 마무리됩니다. 왕과 신하가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 닮아가며,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섬기면서 닮아갑니다. 내가 무엇을 섬기고, 누구를 섬기느냐에 따라, 나도 역시 그를 닮아갑니다. 좋은 스승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돈을 조금 덜 받더라도 배울 수 있는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배우고 닮은 그 모습이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욕하면서 배웁니다. 부모에게도 배우고, 직장 상사에게도 배우고, 교회 목사에게도 배웁니다. 욕하고 미워하면서도 배웁니다. 그래서 관계가 무섭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 당신을 기준으로 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더러,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자비하시니, 그 섬기는 우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이고 율법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그를 사모하는 사람의 삶은 더디고 느려도 반드시 그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를 주로 섬기는 삶이 아니면, 그는 오래 믿어도 결국 예수와는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열매로 그 신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을 닮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힘으로 안 될 걸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씨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고 야고보 사도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심으로 태어난 첫 생명과 달리, 우리의 거듭난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심’으로 태어난 생명입니다. 실로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도 놀랍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은 더욱 놀랍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닮을 수 있고, 또 닮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십시다.
성도는, 저와 여러분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딸이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예수의 종 된 삶을 살아갈 때, 반드시 하나님을 닮고 예수를 닮아,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의 길 위에서, 누군가로부터, ‘아, 정말 당신은 하나님을 닮았구나!’, ‘하나님과 당신이 꼭 같구나!’ 하는 이야기를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리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한, 우리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한,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